43화
공작은 어릴 때부터 제 분수를 잘 알아, 안되는 것에 호승심을 느끼거나 미련 두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일에 저항하는 건 무의미하고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피의 결혼식에서 다시 돌아온 대공을 봤을 때부터 공작은 절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공작은 그곳에 있던 사람 중 가장 먼저 항복했고, 그 사실을 수치로 여긴 적도 없었다.
그런 그였는데, 스스로 황제에게 정욕을 품고, 대공에게 열패감을 느끼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단단한 대공의 등을 슬쩍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불장난인지 혹은 애정 깊은 연인인지는 아직 몰랐지만, 공작은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지식한 황제의 성정도 그랬지만, 자존심 강한 대공이 고작 정부로 만족할 것 같진 않았다.
“기가 막히는군.”
다시 걸음을 옮기며, 사일러스 공작은 작게 중얼거렸다. 둘만 남은 집무실에서 황제와 대공이 무엇을 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두 사람의 행태에 실소가 나오면서도 입맛이 썼다. 그리고 그 연극에 깜박 속은 자신은 한심했다.
황제, 대공, 집무실.
대공은 자꾸만 고개를 드는 허튼 생각을 억눌렀다. 그리고 황제에게 품은 마음을 평생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 * *
다음날, 아란은 사일러스 공작이 알현을 신청하기도 전에 다시 그를 불러들였다. 난처한 티를 숨기지 못하던 전날과 달리 오늘은 한층 의연한 모습이었다.
“어제는 급하게 보내 미안했소. 오늘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아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전히 그를 대하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황제였다.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아란은 공작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 후, 시종을 시켜 차를 내오도록 했다.
“어디 보자, 대형 군함 세 척과 해군 2개 대대, 노잡이 노예 이백 명, 그리고 이천 명분의 군량과 무기를 지원하려 하는데 공의 생각은 어떠한가? 다나르 연안의 해적무리는 인원이 천 명이 넘고 체계도 정규군 못지않게 잘 짜여 있다고 들었네. 제법 큰 전투가 될 테니 이쪽도 병력을 넉넉히 배치하는 게 좋겠지.”
예상보다 후한 지원에 공작은 다소 놀랐다. 이런 쪽으로는 무지할 것 같은 황제가 설명을 듣기도 전에 미리 해적의 규모를 파악하고 지원 병력을 생각해 둔 것도 의외였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히 해적들이 다나르 해변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도록.”
“예.”
대답한 공작은 한참을 주저하다 계속 생각해 왔던 말을 꺼냈다.
“……그리고 폐하, 저는 해적들을 소탕한 후 한동안은 수도에 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 얼마나 오래?”
“최소 1년 이상 생각 중입니다.”
무심한 낯으로 서류를 읽던 황제가 놀라 시선을 들었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마주하자 공작은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마냥 건조해 보이는 그녀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생각보다 표정이 풍부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별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다만, 그간 영지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저번에 폐하께서 방문하셨을 때 뼈저리게 느꼈죠.”
“……그렇다고 굳이 수도에 오지 않을 것까지야 있는가.”
“수도에 있으면 아무래도 나태해지기 쉬우니까요. 제 대리인을 수도에 남겨둘 테니 하명하실 일이 있을 땐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저도 그를 통해 공작령의 근황을 보고하겠습니다.”
“아니…….”
아란은 아연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와 사일러스 공작 사이에 각별한 친분이 있는 건 아니다. 공작은 냉정할 정도로 현실적인 인물이었고, 자신 같은 무능력한 황제에게 진심으로 충정을 다할 일은 없을 터였다.
아란 역시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특별히 총애하여 곁에 둘 생각도 없었다. 되레 그와 얽히기만 하면 난폭해지는 대공 때문이라도 절대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한동안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그의 성에서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낯 뜨거운 일이 있었는데도.
아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겐 공작을 붙잡을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 공작령은 광활하고 다나르 외에도 큰 도시가 많으니 살뜰히 보살피려면 몸이 두 개라도 벅찰 테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작게 덧붙였다.
“그래도 짐을 보아, 가끔은 수도에 들려주게.”
아란이 공작을 생각하는 마음은 딱 그 정도였다. 의례적인 인사말에 아주 약간의 진심을 담는 것. 공작이 그 청을 수락할지는 상관없었다.
공손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공작이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말은 환청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어느새 다시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력하겠습니다.”
공작이 홀린 듯이 대답했다. 황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그 단순한 동작에 공작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내내 그를 혼란스럽게 하던 음욕마저 한순간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작은 황제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비록 그와는 다른 마음이겠지만.
그는 황제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안 보면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의도치 않게 제가 공작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는 걸 모르는 아란은 다시 메마른 목소리로 무심히 내뱉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시오. 수도의 살림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촉박할 텐데.”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도를 떠나기 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도록.”
공작이 집무실을 나갈 때까지, 아란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기도 전에, 공작은 수도에서의 생활을 처분했다. 그러나 타운 하우스는 끝내 남겨두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왔을 때 지낼 곳이 없다면 불편할 거라는 이유였지만, 실은 자신을 보러 수도에 와달라는 황제의 말이 계속 걸린 탓이었다.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공작은 서둘러 입궁했다.
시종을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는 내내 그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이제 한동안은 황제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품어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집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공작도, 그를 안내한 시종도 잠시 당황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각하.”
시종이 다른 시종에게 황제의 행방을 묻고는 다시 돌아왔다. 상당히 민망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공작 각하.”
“그래, 폐하께선 어디 계신다고 하던가? 혹, 또 편찮으신 게 아닌지…….”
곧잘 앓아눕곤 하는 황제를 떠올리며 사일러스 공작이 말끝을 흐렸다.
“아닙니다. 조금 전에 로아크 대공 전하께서 입궁하셔서 함께 후원으로 향하셨다고 하십니다.”
“대공께서?”
“예. 어쩔까요, 각하.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기다리지 마시고 그냥 돌아가셔도 좋다고 하셨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기다리시겠습니까?”
공작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공작 정도 되는 이를 이런 식으로 헛걸음하게 만드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하러 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정작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황제가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이었을까. 마지막으로 황제를 만날 기회까지 빼앗아 간 대공이 야속했다.
공작은 이대로 돌아갈지, 아니면 기다릴지 고민했다.
“폐하께서 언제 돌아오신다는 말씀은 없으셨나?”
“예…….”
돌아가도 좋다고 말한 걸 보면, 아마도 황제는 오래 자리를 비울 예정인 것 같았다.
공작 역시 사내였다. 제가 탐내는 여자가 다른 사내와 함께 있다는 말을 듣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그 사내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후원’이라는 단어에 깃든 낭만적인 어감마저도 못마땅했다.
평소 같았으면 고민하지도 않고 돌아갔을 테지만, 지금이 아니면 황제에게 인사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에 잠겼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후원으로 가겠다.”
반쯤은 오기였다. 황제와 선약이 되어있던 건 대공이 아니라 자신이었으니, 이렇게 찾아가도 황제는 그를 탓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엔 차라리 단둘이 있을 그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공작은 이미 공적인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대공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는 황제와 대공이 얼마나 다정한지 직접 확인하고 나면 이 마음을 빠르게 단념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후원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 나란히 산책 중인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공작은 뿌리내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질시 어린 눈으로 둘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확실히, 최소한의 수행 인원만 뒤따를 때 두 사람은 평소보다 더 스스럼없어 보이긴 했다. 특히 황제는 평소보다 훨씬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가 상상했던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뭐지?
황제는 무력하고 우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대공 앞에서 그런 감정을 내보이는 게 꽤 익숙해 보였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거리가 꽤 멀어 대화 내용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공이 뭐라 말하자 황제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표정이 제법 사나웠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계속 걸었다. 공기는 냉담하고 무거웠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차라리 그날 다나르의 해변과 야시장에서 보았던 모습이 더 다정해 보였다. 그때는 적어도 황제가 감정을 숨기고 있었으니.
그러다 황제가 갑자기 휘청거리자 대공이 민첩하게 그녀를 낚아챘다.
대공의 품에 안기는 순간 황제의 얼굴에 떠오른 건 명백한 거부감이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공은 그것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가 그의 손길을 거부하자 되레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더 놀라운 건, 황제가 곧 체념한 얼굴로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는 사실이었다.
공작이 혼란에 빠졌을 때, 두 사람이 그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