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42화 (42/146)

42화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공이 피식 웃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폐하의 정부가 된다는 뜻이니까요.”

늘 그랬듯, 아란은 이번에도 대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걸까.

“겪어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더군요. 한낱 시종이었던 제가 폐하의 정부씩이나 될 수 있었으니 도리어 영광이었지요.”

대공의 잔인한 말이 비수처럼 아란의 가슴에 꽂혔다. 야윈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물론, 폐하께서 그 시종을 사랑하셨을 때의 마음은 저런 싸구려가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모든 이가 폐하처럼 숭고한 사랑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제발, 제발 그만해…….”

아란이 애원했다. 대공이 저렇게 말할 때마다, 에녹과의 추억이 진창 속에 처박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전부 그녀의 죄였다. 지켜주겠다는 말을 어겼으니, 이제 그녀에겐 그 죗값을 받으러 온 사신 같은 사내만이 남았다.

고개를 떨군 그녀를 대공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과거는 진작 의미가 사라져, 이따금 아란을 놀리기 위해 입 밖에 꺼내 놓는 값싼 추억에 지나지 않았다.

죄책감에 물든 얼굴을 보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질렸는지 영 흥이 나지 않았다. 되레 기분만 더 나빠졌다. 그는 아란을 놀리는 걸 그만두고 다시 충직한 종을 연기했다.

“아무튼, 마음 쓰시는 일 없도록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셨습니까?”

“아니. 못 봤어. 키가 크다는 것 말고는…….”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시선을 떨군 채였다.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가능한 한 빨리 찾아내 숨통을 끊어 놓겠습니다.”

“죽이겠다는 소리야?”

과격한 말에 경악한 아란이 외쳤다.

“살려 둘 이유가 있습니까? 발칙한 짓을 했으니 응당 그 죗값을 치러야지요.”

“그자가 발칙한 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을 텐데…….”

“세상에 그보다 더 사소한 죄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관의 이름을 한 번에 외우지 못했다거나, 빵을 반쪽 더 먹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대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아란은 심장이 저며지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저렇게 비참한 죽음들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그것이 괴로워 에녹은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친 걸까?

“감히 황제의 정사를 훔쳐보았으니 죽을 이유로는 충분합니다.”

“그러지 마.”

아란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대공은 그녀가 사랑하던 에녹이 아니었지만, 그가 이런 일로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싫었다.

“걱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죽이는 건 싫어. 가능한 인도적으로 해결해.”

“정말이지, 폐하처럼 까다로운 주군도 드물 겁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공이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괜히 죽였다가 황제가 알면 성가시게 굴 테니 적당히 혀를 뽑는 선에서 끝내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했다.

“안 죽일 거지……?”

아란이 불안한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원하시는 대로.”

대공이 아란의 뺨을 쓰다듬으며 공손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이제는 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충직한 종이 얼마 없다는 걸 말입니다.”

* * *

사일러스 공작은 거의 한 달 만에 황궁에 들렀다.

그는 입궁하기 전, 잠시 멈춰 거대한 황궁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나이에 공작위를 물려받아 선선대 황제 때부터 곧잘 드나들던 황궁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아마도 그 문 너머, 황궁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곳에 있을 여자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 번 심호흡하곤 안으로 발을 디뎠다.

공작을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했다. 평소라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돌려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그의 목적지 끝에 황제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찼다.

벌써 며칠이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날 이후 황제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꿈에 나타났다. 때로는 더없이 방탕한 모습으로, 때로는 여신을 따르는 사제들처럼 정결한 모습으로.

길고 오랜 번민의 밤을 보내고 나서야 공작은 인정했다. 자신은 황제를 여자로 원했다.

그것이 사랑인지 단순한 육욕인지는 아직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확실한 건 쾌락에 떠는 그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이번엔 더 가까이에서. 그 변화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전부. 그리고 그녀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게 자신이길 원했다.

여색엔 크게 관심 없다고 자부했는데, 대낮부터 이렇게 난잡한 생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내내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가 회의감에 빠지길 반복했다. 그것은 황제의 시종장이 황제에게 그가 왔음을 고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폐하. 사일러스 공작 각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허한다.”

잠시 후, 안에서 가냘프지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짧은 한마디가 공작에겐 꼭 중대한 선고처럼 들렸다.

곧 육중한 문이 열리고, 커다란 의자에 앉은 황제가 보였다. 키는 작지 않았지만 체형이 가늘어 그녀는 거의 의자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황제를 마주했다.

눈앞의 황제와 대공의 품에 안겨 잔뜩 흐트러졌던 여자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옷차림에 무심한 눈동자, 일자로 꽉 다물린 입술은 초연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공작의 마음을 더 흔들었다.

황제가 눈을 들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으나 그는 노련하게 자신의 속내를 숨겼다.

한편, 공작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아란은 재빨리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잘생긴 낯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정중한 태도 역시 그대로였다. 어쩌면 공작은 그 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금방 찾아낼 수 있다며 장담했던 것과 달리 아직 대공은 그날 밤 훔쳐본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문이 퍼졌다는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란은 조금 희망을 품었다. 그녀를 목격한 사람이 너무 놀라 혼자 묻어두기로 마음먹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다면 그녀도, 그 사람도 다치지 않고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앞으로 그녀가 사일러스 공작이나 그의 권속들을 대면하는 일이 괴로워질 거라는 건 자명했다. 아란은 그날 밤을 연상시키는 거라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피하고 싶었다.

그녀에겐 불행히도, 제국의 주인과 제국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의 영주는 얼굴을 맞댈 일이 잦았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쪽은 사일러스 공작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저의 성에 머무셨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달이 한 번 차오르고 졌군요.”

공작이 다가와 아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흔한 경애의 표시일 뿐인데, 그녀는 오늘따라 그 행위가 몹시 거북하다고 느꼈다. 아란은 조금 빠르게 손을 거두곤, 애써 태연한 척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아직도 다나르의 해변에서 보았던 일몰이 눈에 선한데 말일세.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보고 싶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아란이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짐을 보자고 했소.”

그녀는 다소 빠르게 본론을 물었다. 공작은 황제가 자신을 오래 붙잡아 둘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

“유감스럽게도, 그간 잠잠하던 해적들이 최근 들어 다나르 항구 연안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저런. 무역선이 약탈당하면 국가적으로도 손실이 크니 대응이 필요하겠군.”

“예. 다행히 얼마 전 해적 떼의 본거지를 찾아냈습니다. 병력을 지원해주신다면 이 기회에 소탕하려 합니다.”

“그래. 얼마나 필요한가?”

“그게…….”

공작은 말꼬리를 늘이며 황제를 훔쳐보았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녀의 시선은 그를 똑바로 향하지 않고 교묘히 엇나가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훔쳐본 범인이 그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건 그날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공작도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늘 담담한 척하던 얼굴이 은밀한 쾌락으로 일그러지던 그 순간을, 그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미 알아버린 이상,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황제의 얼굴 위로 그때의 표정이 겹쳐지자 갑자기 갈증이 일었다. 조금 전 그녀의 손에 닿았던 입술에서부터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공작은 저도 모르게 그 감촉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손 아래에서 긴장한 듯 떨렸던 작은 맥동까지 생생했다. 다시 한번 닿고 싶었다. 그녀의 더 깊고 은밀한 곳도 이렇게 부드러울지 궁금했다.

그날 봤을 때처럼 그렇게, 내 아래에서도 흐트러져주실까.

“왜 말을 하다 마는가, 사일러스 공? 병력이 많이 필요한가?”

황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공작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송구합니다, 폐하. 아무래도 해적들의 규모가 제법 되는 만큼 대형 전함 세 척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과하는 순간에도, 그는 황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황제는 날카롭게 그의 무례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엔 되레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기까지 했다. 치아에 눌렸던 입술이 희게 질렸다가 다시 제 빛을 되찾는 장면이 관능적이었다. 그날 밤도, 그녀는 부끄러운 소리를 숨기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물곤 했다.

이윽고, 황제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래. 다른 해적 무리에게도 본보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겠네.”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더 필요한 건?”

공작은 잠시 망설였다. 필요한 건 많았다. 전함과 병사 외에도 노를 저을 노예와 무기……. 그러나 그런 것들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다나르는 부유한 도시였고, 따로 지원이 없어도 노예와 무기는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면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말하도록 할까.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내일 다시 알현 신청을 하면 시간 나는 대로 받아주겠소.”

“그럼 내일 다시 뵙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사일러스 공작은 애써 미련을 거둬들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그의 눈에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대공이 보였다.

“여기서 뵙는군요, 전하.”

공작이 인사를 건네자 그는 걸음도 멈추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눈인사를 한 번 하고는 그대로 가던 길을 향했다.

냉랭하게 스쳐 지나가는 대공을 보며 그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몇 달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대공이 뺨을 맞았던 날이었다. 황제의 얼굴을 훔쳐본 일로 면박을 들은 것도 바로 그날이었다.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고작 사랑싸움이었나.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가 났다. 그게 더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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