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신분 높아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괜히 잘못 입을 놀렸다가 안 좋은 꼴을 당하게 될까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아란은 핵심을 다 듣고 말았다.
“저들의 말이 사실인가, 사일러스 공? 법적으론 소작료로 5할 이상을 걷을 수 없을 텐데? 혹시 그대도 소작료를 7할이나 걷나?”
아란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공작이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7할까지는 아닙니다.”
“그럼 5할은 넘는다는 뜻이겠군?”
“…….”
“왜 법을 지키지 않지?”
아란이 황망한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수확량의 절반 이상을 내놓으면 생활이 곤궁해진다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하는 공작에게서 눈을 떼고 대공에게 물었다.
“대공, 그대 영지는 소작료가 얼마나 되지?”
“지주마다 다르지만 법적 기준을 넘으면 처벌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위안은 되지 못했다. 수탈이 비단 소작농들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아란은 찻집 손님들과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살폈다. 그래도 찻집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차림은 평균 이상이었다. 이 싸구려 차 한 잔 사 마실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 거리에 온통 넘쳐났다.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지금 이렇게 야시장에 숨어들어 재미 삼아 잡동사니나 사들이는 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이만 돌아가자.”
돌아오는 내내, 아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등불이 환한 상점들 뒤로 아까는 있는 줄도 몰랐던 더러운 골목들을 보았다. 오물로 가득 차 발도 들여놓고 싶지 않은 곳에 아이들 몇 명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마르고 더러웠다. 아이들의 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아란과 눈이 마주친 아이들이 구걸하러 겁도 없이 아란의 말 아래로 뛰어들었다. 빠르게 달리는 중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작고 꼬질꼬질한 손바닥이 그녀를 향해 펼쳐졌다. 가진 돈이 없는 그녀는 말 위에 앉아 어쩔 줄 몰랐다.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하필 입고 있는 옷엔 자잘한 보석조차 달리지 않았다.
공작이 은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 아이들의 손바닥 위에 하나씩 얹어주었다. 그에게 돈이 있어 아란은 안도했다. 적선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오늘만이라도 굶지 않길 바랐다. 가슴 위에 무거운 납덩이가 올려진 것 같았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일은 늘 있었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들도 빈곤과 불평등은 해결하지 못했다. 하물며 허수아비인 아란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의욕이 넘쳤던 군주들이 어째서 돌연 세상과 소통하길 거부하고 황궁에 틀어박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공작성으로 돌아온 아란은 시녀들에게 잡동사니가 든 바구니를 안겨주곤 침실로 향했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일러스 공작도 그의 영지민에겐 가혹한 수탈자였다.
그러나 수많은 수탈자 중 가장 악랄한 건 다름 아닌 아란 자신이었다. 대공이 말했던 것처럼, 눈 감고 귀를 막은 채 황궁에 틀어박혀 사치나 부리면서 사는 게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들어오는 기척도 없이,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란은 화들짝 놀랐으나, 곧 익숙한 체취로 대공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나이트가운 속으로 손을 넣었다. 가볍게 가슴을 쥐고, 뒤에서 귓바퀴를 살짝 빨았다. 아란이 허리를 뒤틀며 물었다.
“어, 어떻게 들어왔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이 나이트가운을 한 손으로 끌어내리며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아래부터 쥐어 올려 그대로 물었다.
“흣.”
강하게 가슴을 빨아들이는 촉감에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채웠던 걱정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속옷 안으로 대뜸 손이 들어왔다.
“잠깐…….”
그를 밀어내고 싶었으나 뒤에서부터 감싸듯 붙잡혀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사일러스 공작을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사일러스 공작의 이름이 나오자 아란은 지레 겁부터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억울해졌다. 왜 자신과 공작이 함께 있는 걸 싫어하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왜, 그렇게 공작을, 읏, 싫어해?”
무엇이 기분에 거슬렸는지, 갑자기 가슴을 쥐는 힘이 세졌다.
“그는 기회주의자입니다. 사람 좋은 척 굴어도 결국 본인이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으려 들죠.”
“하지만 다들, 마찬가지…….”
“공작은 폐하를 돕지 못할 겁니다. 그에겐 폐하를 성군으로 만들어 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대공이 아란의 가슴을 놓고 의자째 반 바퀴 돌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허공에 들렸다.
“앗……!”
의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온 대공의 입술이 속삭였다.
“그러니 웃는 건 제 앞에서만 하세요.”
* * *
사일러스 공작은 밤이 늦도록 서재에 남아 서류를 뒤적였다. 며칠 성을 비워 두었더니 자질구레하게 처리할 일들이 조금 있었다. 급한 건 아니지만 대단히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생각난 김에 처리하는 중이었다.
오래 글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목이 뻐근해져 그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잠시 머리나 식힐 생각으로 서재를 나섰다.
따라붙는 집사를 물리고 목적지 없이 성 내부를 배회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황제가 머무르는 침실 근처였다. 그는 묘한 감상에 젖어 침실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문 너머에 잠들어 있을 황제를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낮에 보았던 그녀의 맨발이 생각났다. 햇빛을 받을 일 없어 유달리 하얀빛이 더 은밀한 느낌을 주었다. 뒤이어 거침없이 그 발을 잡아 샌들을 신기던 대공의 커다란 손도 생각났다. 공작이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오늘 두 사람과 함께 다니며 그들의 사이가 생각보다 더 미묘하다는 걸 느꼈다.
먼저, 대공이 황제를 대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과했다. 아무리 충직하다고 해도 보통은 그렇게까지 시중을 들지 않는다. 신하가 아니라 노예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대공을 불편해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을 땐 꼭 그를 바라보았다. 녹색 눈동자엔 그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믿는 깊은 신뢰가 있었다.
무슨 사일까.
로아크 대공가가 몰락했을 시절, 둘이 한때 진짜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긴 했으나 그건 지금은 완전히 뜬소문으로 판명된 이야기였다. 공작은 어째서 이렇게 찜찜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자신이 황제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난 뭘 바라고 여기까지 왔는지.
밤중에 남의 침실 앞에 서 있으니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추태를 자각한 그는 다시 서재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얼핏 우는 소리와 비슷한 낮은 흐느낌이었다.
여자 울음소리? 황제의 시녀인가?
일이 서툰 시녀가 남몰래 속상해하는 거겠거니 여기고 지나치려는데,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흐느낌 끝에 선명한 신음이 섞여 있었다. 그제야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달은 공작은 조금 당황했다.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성은 넓었고, 어둠을 틈타 위험한 놀이를 즐기는 자들 역시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황제의 침실 안에서 들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문 앞으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공작은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숨을 삼켰다.
등을 돌리고 있긴 하지만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인물이 두 명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분명 대공이었다. 그는 여자 한 명과 얽혀 있었다.
급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느긋한 건지, 두 사람은 옷도 벗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두 발이 허공에 들려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다리 한쪽은 대공의 접힌 팔 안쪽에, 다른 쪽은 허리에 걸쳐진 채였다. 그 상태로 여자를 벽에 몰아붙이는 모습은 보는 이의 낯이 달아오를 정도로 난잡했다.
왜 대공이 여기에 있지? 황제 폐하는 어디로 가셨나?
제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는 그 여자가 황제일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인 줄은 알면서도, 어디까지나 대공이 황제의 침실에 여자를 끌어들였다고 여겼다.
얼마나 몰두했는지 두 사람은 지켜보는 이가 있는 줄도 모른 채 격렬하게 몸을 섞었다. 여색이라곤 전혀 관심이 없는 척하더니 대공도 결국은 사내였나 싶어 공작은 조소했다.
심지어 그는 여자에게 꽤 다정하게 굴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가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뒷덜미를 꼭 감싸고, 입술은 여자의 뺨과 귀를 연신 부드럽게 문지르고 빨았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듯해도 그가 매초 여자의 반응을 살피며 그녀의 쾌락을 끌어내고 있다는 걸, 공작은 눈치챘다. 어떤 여자기에 저렇게 공을 들이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반면 여자는 그의 어깨에 매달려 고개를 박고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대공이 거칠게 다리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한 번씩 흐느낌 같은 소리를 내곤 했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었다.
황제의 시녀라도 꾀어냈나.
여자는 대공의 반이나 될까 싶은 아주 가냘픈 체구였다. 그의 몸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을 감싼 팔과 흔들리는 다리가 몹시 가늘었다.
저렇게 마른 여자가 취향이었나.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에겐 더 육감적이고 적극적인 여자가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하긴, 제가 남의 취향을 운운할 때가 아니었다. 황제도 지금 저 여자만큼이나 말랐다.
그나저나 폐하께선 도대체 어디에 계시기에 제 침실을 무도한 자가 차지하게 놔두는 걸까.
궁금증이 들었을 때, 구름에 가렸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여자를 비췄다. 때맞춰 여자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본능적으로, 공작은 여자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 서둘러 이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러나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시선도,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드러난 얼굴은 눈물로 흥건했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달빛과 똑같이 창백한 빛깔이었다.
“아…….”
쾌락으로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붙박은 듯 서 있던 공작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두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