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39화 (39/146)

39화

아란은 재빨리 걷어 올렸던 드레스를 내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 뒤늦게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어색하게 부딪혔다.

그 때, 대공이 다가와 둘의 시선을 갈라놓았다. 그의 손엔 아란의 샌들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황제의 것이라지만 여자 신발을 들고 있는 걸 부끄럽게 여길 법도 한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대공은 아란 앞에 무릎을 꿇고 드레스 밑자락 안으로 손을 넣어 작은 발을 감싸 쥐었다. 아란은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 이럴 필요까지는……. 짐이 신을 수 있네.”

어깨를 살짝 밀쳤지만 이미 그는 발에 묻은 모래를 털고 샌들을 신긴 뒤였다. 그는 다른 쪽 발도 잡아 똑같이 쓸어냈다. 손가락이 발바닥을 스치는 감촉이 간지러워 저절로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아란은 민망함에 빨개진 얼굴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가실까요, 폐하.”

신발을 다 신긴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아란도, 공작도 민망해하는 와중에 그만 태연했다.

아란은 불편한 마음에 걸음을 빨리했다. 대공도, 공작도 전부 이상했다. 대공이야 원래 그랬다지만, 공작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차양 아래에 도착한 아란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하면서도 조금은 관조적인 얼굴이었다.

아까 그 눈빛은 착각이었을까?

뭐가 되었든 부정적인 감정만 아니길 바랐다. 그나마 아란에게 호의적인 귀족인 그마저 그녀를 기만하고 있는 거라면 조금은 서글플 것 같았다. 동시에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청승이나 떠는 자신이 한심했다.

모처럼 좋은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 서둘러 의자 위에 앉아 책을 펼쳤다.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공작의 말처럼 파도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약간 끈적이는 바닷바람도 익숙해지니 거슬리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책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러다 뒤늦게 다음 목적지가 있었음을 떠올리고 고개를 드니 이미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런. 지금 항구를 가기엔 너무 늦었을까? 어째서 말하지 않았나.”

“몰두하신 것 같기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구보다는 이곳의 일몰을 보여드리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확실히 일몰도 기대가 되는구나.”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아란은 거의 다 읽은 책을 덮고 하늘이 점점 주홍색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았다. 늘 보는 석양인데, 황궁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마침내 태양이 바다 아래로 반쯤 가라앉았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와.”

이 순간을 오래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해가 완전히 진 뒤에도, 아란은 한동안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즈음에야, 그녀는 겨우 미련을 버리고 일어섰다. 두 남자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대공이 사일러스 공작에게 도로 책을 돌려주었다. 아예 펼쳐보지도 않았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잘 읽었습니다. 흥미롭더군요.”

“재미있게 보셨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책입니다.”

대공이 거짓말을 하는 걸 알면서도 공작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읽는 내내 공의 안목에 감탄했습니다.”

아란은 두 남자를 어이없게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론 그 뻔뻔함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공작성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야시장에 갈 준비를 했다. 지친 아란은 야시장에 가는 걸 조금 망설였지만, 또 언제 다나르에 오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좀 더 기운을 내보기로 했다.

아란은 최대한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두건을 써 머리카락을 가렸다. 안 그래도 복잡할 야시장에 황제가 왔음을 알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떤가? 너무 화려하거나 초라하지는 않은가?”

아란이 동행할 두 남자를 향해 물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공작이 대답했다. 얼굴이 알려진 공작도 코와 턱을 가린 상태였다.

대공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을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한 눈에 보기에도 지금 그녀는 귀한 집 아가씨 티가 물씬 났지만, 원래 밤의 다나르는 신분과 성별, 연령과 국적이 다양한 계층이 뒤섞이는 곳이라 그리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들은 마차 대신 말을 타고 야시장으로 향했다. 야시장은 아주 복잡하여 마차를 세워두기가 여의치 않다는 공작의 설명 때문이었다. 공작은 곧잘 말을 타는 아란을 보고 은근히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밤이 깊어도 도시는 낮처럼 밝았다. 아란은 눈을 크게 뜨고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수도의 밤도 화려했지만, 다나르는 정말로 밤을 잊은 도시 같았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수도와 달리 다나르는 좀 더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었다.

야시장 입구는 벌써 인파로 북적였다. 사방에서 웃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고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떠밀리는 통에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황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기가 가득했다.

해변의 일몰을 처음 보았듯, 이렇게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움직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밤인데도 인파의 열기 때문에 땀이 났다.

다른 황제들도 이런 경험을 해 보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런 삶을 바라지는 않았을까?

아란은 제가 얼마나 세상을 몰랐는지 이 짧은 시간에도 통감했다. 그나마 죽은 두 형제는 황궁을 떠나 몇 년간 공부하거나 잠시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지만 아란은 아니었다. 어릴 땐 과보호를 받느라, 조금 더 자라서는 부황을 간호하느라, 즉위한 후엔 제 한 몸 지키느라 한 번도 황궁 밖의 삶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어깨가 계속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혔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대공은 아란을 자신의 품 쪽으로 끌어당기곤 큰 체격으로 사람들 틈을 뚫어 길을 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 함께 계시니 이럴 땐 편하군요.”

그 모습을 본 공작이 대공의 호칭을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는 대공이 낸 길을 따라 두 사람을 따라오고 있었다. 공작이 아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에 드시는 물건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주위가 시끄러워 그는 황제에게 언성을 높이는 무엄함을 저질러야 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

아란은 뒤늦게 이곳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라는 걸 떠올렸다. 길을 잃지 않는 것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물건은 하나도 구경하지 못했다. 공작이 덧붙였다.

“운이 좋으면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화폐 단위의 개념이 없는 그녀는 무엇이 싸고 무엇이 비싼지 잘 몰랐다. 그러나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물을 상황은 아니라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가격을 따지기 전에 뭘 구입하기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야시장 출구 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줄어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아란도 대공의 품에서 벗어나 조금씩 주변 가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좌판마다 조악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들이지만 등불 아래 있으니 제법 훌륭해 보였다.

한눈에도 돈 좀 있어 뵈는 세 사람이 등장하자 좌판 상인들은 전부 눈독을 들였다. 그들 대부분은 특히 아란을 노리고 있었다. 똑같이 부유한 티가 나도 녹록지 않아 보이는 두 남자와 달리, 곱상한 외모에 행동도 어리숙한 그녀는 누가 보아도 대어였다.

“손님! 이것 좀 보세요. 오늘 오르치드 왕국에서 들여온 향유랍니다!”

“장신구 골라보세요, 싸게 드릴게요.”

상인들이 아란을 향해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나같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라 아란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상점마다 멈춰 섰다. 이때다 싶은 상인들은 잡히는 대로 그녀에게 물건을 권했다.

“피부가 고와서 뭘 해도 다 잘 어울리시네요! 이건 어떠신가요?”

한 상인이 이미 잡동사니가 잔뜩 올려진 아란의 손에 또 목걸이 하나를 올려놓았다. 펜던트는 나무를 깎아 색을 입힌 싸구려였다.

“귀, 귀엽구나…….”

반쯤 얼이 빠진 아란이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건 잘 모르는 그녀의 눈에도 그 목걸이는 좀 아니었지만, 싫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상인들이 권하는 대로 물건을 받아 들면, 뒤에선 두 남자가 값을 치렀다.

아란은 질린 얼굴로 나무껍질로 짠 가방 안에 수북하게 들어있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 가방도 조금 전에 반강제로 산 것이었다. 한 번도 시장에 와 본 적은 없지만, 이런 게 평범한 구매 방식 같지는 않았다.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이렇게 물건을 잔뜩 사들고 어쩔 줄 모르는 건 그녀뿐이었다.

“상인들이 똑같은 물건을 자꾸 권한다. 이미 샀다고 말을 했는데도 그러니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시녀들에게 나눠주어도 남을 것 같은데.”

빨간색으로 염색한 리본을 벌써 아홉 개째 산 아란이 난처한 얼굴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물건을 구매하실 용의가 없다면 저들과 눈을 마주치지 마십시오.”

그의 말에 아란은 어색하게 정면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양옆에서는 아란을 잡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냥 지나치려니 마치 죄를 짓는 것 같구나.”

“예. 저쪽으로 가면 밤늦게까지 여는 찻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시지요.”

보다 못한 공작이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그 와중에도 또다시 상인들에게 붙잡힌 아란을, 대공이 재빨리 낚아채 방향을 틀었다. 아란은 그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시장이란 곳이 이렇게 정신없는 곳이었던가. 만약 또 이와 비슷한 곳을 갈 일이 있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어야겠구나.”

“처음이라 그러실 겁니다. 익숙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어이 괜찮은 물건들을 찾아내고 말지요.”

그녀를 격려하듯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공작이 말했다.

“지, 아니, 나는 백 년이 지나도 못할 것 같네.”

아란은 작게 한숨을 쉬며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가 빠진 싸구려 잔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말린 잎사귀가 둥둥 떠다녔다. 향을 맡아보니 썩 나쁘지 않았다. 그 풀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듣자 하니 가진 재산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작년보다 세금을 적게 내도 될 거라던데.”

“나도 듣긴 했는데, 반대가 워낙 심해 확실하지 않다더라고. 어째 점점 더 살기가 팍팍해지니 원.”

“차라리 가진 땅 다 팔아버리고 소작이나 부칠까. 그럼 세금 걱정은 없을 텐데.”

“관둬. 소작료로 수확량의 7할을 가져간다는데, 그걸로 입에 풀칠이나 하겠어?”

“아이쿠, 7할이나 내면 뭘 먹고 살라고? 나쁜 놈들 같으니!”

“그래도 여긴 대도시라 사정이 좀 나아. 저기 어떤 후작은 소작료를 8할 5푼이나 걷는대. 겨울에 동사하는 사람보다 굶어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군.”

“조용, 조용. 크게 떠들지 말라구.”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이 아란 일행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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