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다음 순행엔 로아크 대공령에 들러야겠어.”
첫 순행에 로아크 대공령을 방문하지 않은 것 때문에 속이 상한 게 아닐까 추측한 아란이 떠보듯 말했다. 수도와 대공령은 거리가 멀어 이번 순행에서 제외했는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넣는 게 좋았을지도 몰랐다.
“그다지 볼 만한 게 없을 겁니다.”
대공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란의 추측과 다르게, 그는 애초에 그녀를 제 영지에 들여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란은 몰랐지만 로아크 대공령은 전반적으로 현 황실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애당초 황가와 대공가의 사이가 좋지도 않았을뿐더러, 존경받던 전 대공 부처가 재판도 받지 못하고 처형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황제는 아직 전대 대공 부처가 억울하게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아비가 대공가의 반역과 관련된 기록을 전부 없애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공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사실은 아직도 그와 대대로 대공가에 충성했던 가문의 극히 소수만 아는 비밀로 남았다.
“그래도 놀러 가는 건 아니니까……. 다음엔 꼭 순행지에 넣을게.”
“다나르는 몇 번이나 가보셨습니까?”
아란이 무안해하자 대공이 말을 화제를 돌렸다.
“한 번도 못 가봤어.”
사실 아란은 수도를 벗어난 적이 많지 않았다. 더위나 추위를 피해 수도 근교의 별장을 방문하는 게 지금까지 그녀가 해 본 유일한 여행이었다. 아란이 순행을 애타게 기다렸던 건 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대는?”
“세 번 가봤습니다.”
“어때? 좋아?”
“그다지.”
“그렇구나.”
대화가 끊겼다. 이후로는 다나르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 내내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몸은 편한 시간이었다.
다나르는 거대한 항구 도시였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다 비린내가 훅 끼쳤다.
공작의 성은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사일러스 공작은 일 때문에 수도에 있었고, 그의 집사가 황제를 맞이했다.
“주인께서는 모레 안에 도착하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은 부득이하게 제가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집사장이 송구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괜찮네. 짐이 공작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긴 탓이니.”
공작이 있든 없든 아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공작을 보러 다나르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와 얽힐 때마다 대공에게 시달렸던 탓에, 차라리 그녀가 수도로 돌아갈 때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길 빌었다. 그러나 사일러스 공작은 아란의 마음도 모른 채 종일 말을 달려 그날 밤 공작성에 도착했다.
“폐하.”
오래 말을 달린 탓인지,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던 공작의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아란이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그를 맞았다.
“손님이 오셨는데 주인이 자리를 비우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요. 늦었지만 다나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테니 이만 들어가 쉬어도 좋다.”
“괜찮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저도 아직 식사 전이라 괜찮으시다면 함께 드시지요.”
“아니, 짐은 입맛이…….”
트집이 잡힐 바엔 굶는 게 낫다는 생각에 거절하려는데 불쑥 대공이 끼어들었다.
“다나르의 음식은 맛이 있기로 유명하던데, 어떨지 기대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그런 것도 같고.”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달갑지 않은 두 남자와 함께 저녁을 들게 되었다.
아란은 음식을 먹는 둥 둥 마는 둥 하며 시선을 내리깔고 접시만 바라보았다.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르벨 백작가에서의 첫 만찬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때까지 아란도, 대공도, 공작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공작이 형식적으로 음식이 입에 맞느냐 물어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트집 잡힐 일은 만들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폐하께선 다나르에 오신 게 처음이시지요.”
“그래.”
“다나르 내의 명소 중에 가보고 싶으신 곳은 없습니까?”
“어디가 좋은지 아는 게 없어서.”
“그러면,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란은 대답보다 먼저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본 사일러스 공작이 흔쾌히 덧붙였다.
“대공께서도 함께 가시지요.”
“그것도 좋겠군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일정을 보아 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다나르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두 분께서도, 저도 피곤하니 나갈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럼 내일 낮에는 바다와 항구를 구경하고, 밤에는 야시장에 가는 것으로 할까요?”
공작이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란에게 물었다.
“짐은 아는 게 없으니 그대들의 의견을 따르겠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공이 찬성하자 그것으로 행선지가 정해졌다.
다음날, 아란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정갈하게 했다.
대도시인 만큼, 다나르에서의 일과는 다소 바빴다. 아침엔 신전에 들렀다가 정오가 지나면 다나르의 첫 방문을 기념하며 시가지에서 행진할 생각이었다. 원래 행진은 공작이 돌아오는 날 하려 했는데, 그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앞당겨졌다.
고작 두 개 일정일 뿐이지만 준비하는 과정까지 고려하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예정보다도 일찍, 새벽부터 신전을 방문하여 신께 기도를 올리고 제례에 참석해야 했다.
그리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는 행진을 준비했다. 다나르 사람들에게 그녀가 가진 부와 권위를 보여주는 행사였으므로 최대한 화려하게 치장했다.
아란은 뚜껑이 없는 마차에 앉아 다나르 시가지를 달렸다. 마차 바로 뒤를 대공과 공작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다나르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주인 사일러스 공작의 외모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아크 대공이 아무리 잘생겼기로 소문이 났어도 내심 사일러스 공작이 더 미남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대공을 보는 순간 그 자부심에 금이 갔다.
대공이 황제의 지극한 충신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선황의 통치 기간이 왜 그렇게 짧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와 대공을 두고 낭만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행진이 끝났을 때, 아란은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고작 3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건 꽤 많은 정신력을 소모했다. 그런 그녀를 위로해 주겠다며 사일러스 공작은 아란과 대공을 데리고 곧바로 바다로 향했다.
그녀는 너무 지쳐 그냥 쉬고 싶었지만, 바다를 보는 순간 그 마음은 싹 사라졌다. 아란은 예전에도 한 번 바다를 본 적 있었지만, 다나르의 바다처럼 투명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공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란은 신발을 벗고 바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공작의 소유인 해변엔 아란과 대공, 그리고 시중을 들 시종 몇 명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도 시종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공밖에 없으니 그녀는 맨발을 보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와 그녀의 발과 종아리를 적셨다. 황금빛 모래가 발등과 발목에 달라붙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아란은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바다가 신기하십니까, 폐하?”
뒤에서 대공이 말을 걸었다.
“응. 좋아.”
제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아란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공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의 눈이 아란의 입술로 향했다. 늘 우울하게 맞물려 있던 그녀의 입술이 선명한 호선을 그리고, 그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뒤늦게 그녀의 눈빛도 궁금해졌다. 그는 서둘러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얼굴에선 웃음이 빠져나간 뒤였다. 어느새 그녀는 다시 평소의 쓸쓸한 낯으로 돌아왔다.
신기루처럼 허망했다.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궁금증만 더해졌다. 그는 황제가 다시 한번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밀려 나가는 파도만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황제에게 웃어보라는 요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가짜 웃음으로는 진짜의 잔상마저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그가 아란을 불렀을 때, 공작이 다시 돌아왔다. 뜬금없게도, 그의 손엔 책이 들려 있었다. 그가 아란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아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양 아래 누워 파도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으면 독서가 잘됩니다.”
공작이 손으로 허공 어딘가를 가리켰다. 푸른색 차양 아래엔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바다까지 와서 독서를?”
아란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바닷가에서 책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두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수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선뜻 책을 받아들었다.
제목을 확인한 아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책은 정복 군주로 유명했던 바실레이아 2세의 전기였다.
바실레이아 2세는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제국을 다스렸던 황제였다. 당시 라인스터 제국은 제국이 아니라 왕국이었는데, 그걸 제국으로 키워 놓은 게 바로 그녀였다.
“나중에 폐하를 주인공으로 극을 쓴다면 배경은 바실레이아 폐하의 치세 당시를 참고하려 합니다. 지금도 좋지만 아무래도 전쟁 영웅이 탄생하기엔 너무 평화로우니까요.”
위대한 선조가 듣는다면 저승에서도 원통하다고 할법한 말이었다. 같은 황제라도 그녀와 아란은 급이 달랐다. 당시 즉위했던 황제가 자신이었다면, 제국은 진작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아란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공작이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지금의 평화는 전부 로아크 대공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지요. 오랜 골칫거리였던 서부를 그렇게 빨리 정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공에게도 책을 내밀었다. 슬쩍 확인하니 대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가 아직 시종이었을 때, 아란과 그는 곧잘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그 덕에 그녀는 대공의 독서 취향도 알게 되었다. 사랑을 주제로 한 통속 소설은 절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 점을 지적하려 했을 때, 그가 별말 없이 책을 건네받았다. 자신은 통속 소설도 좋아하니 제 것과 바꿔줄까 하다가, 바실레이아 황제의 이야기도 궁금해 그만두었다.
아란은 바다에서 나와 차양으로 향했다. 햇볕에 따뜻하게 달궈진 모래가 부드럽게 밟히며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누군가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대공일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예상과 달리 사일러스 공작이었다. 그는 그녀의 드러난 맨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빛이 그의 눈에서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