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국가의 모든 일이 짐의 일인데, 경중이 중요한가?”
단호한 황제의 말에 후작은 적잖이 당황했다. 허수아비라더니 생각보다 고집이 셌다. 적당히 기분을 맞춰주고 보석이나 선물할 생각이었던 그는 자신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선 이곳에 고작 며칠만 머무셨을 뿐이고, 저는 매해 여름을 이곳에서 보냈으니 제 경험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후작이 한층 공손해진 어조로 말했다.
“‘경험으로 따지자면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던 백작만큼 강을 잘 아는 이가 없을 텐데, 어째서 그대는 백작의 경험을 존중하지 않았지?”
“그건, 백작의 말이,”
“그만. 짐은 이미 결정을 내렸고, 거기에 그대의 사견은 필요치 않다. 당장 제방 보수에 관한 일을 백작과 상의해라. 그렇지 않으면 황명에 불복종한 죄를 물어 짐이 직접 그대를 처벌하겠다.”
허수아비 황제라도 황명은 무서운 것이었다. 결국 후작은 고집을 꺾었다.
불과 반나절 만에 백작과 후작이 무사히 제방 보수에 대해 합의를 마쳤다는 이야기에 아란은 크게 기뻐했다.
백작은 바로 다음 주부터 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백작령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일은 아니지만 조금 더 쓸모 있는 황제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런 게 그녀가 순행에서 바란 일이기도 했다. 황궁에서 아무리 공부를 하고 정책을 만들어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순행이 끝나면 영주들이 제 영지의 하천과 삼림 관리를 소홀히 하지 못하게 법으로 지정할 생각을 하며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아까 후작을 상대하며 홍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결국 아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 저택 뒤에 있는 정원을 한 바퀴 돌면 잠이 올 것 같기도 했다.
막 정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아란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정원 구석에서 대공과 코델리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앞선 대화 내용을 듣지는 못했지만 꽤 진지한 내용 같기에 아란은 기척을 죽였다.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란이 보기에 코델리아는 대공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았으니 더더욱 방해꾼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할 것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아직 아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란은 살금살금 등을 돌렸다.
그대로 왔던 길을 지나쳐 가려던 그녀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갑자기 코델리아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놀랍게도, 그 안엔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원피스 한 장뿐이었다. 아란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필이면 그때 대공이 아란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녀는 엉겁결에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자신과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가늠하며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지 궁리했다.
다시 두 사람 쪽을 힐끔 쳐다보니 코델리아가 대공의 품에 안겨 있었다. 대공이 인상을 쓰며 부드럽지만 완강하게 그녀를 밀쳐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제가 무례하게 굴고 있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언제 다시 전하를 만나 뵙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요.”
“무례한 줄 아신다면 그만두십시오.”
위태롭게 떨리는 코델리아의 목소리와 달리, 대공은 무심했다. 고의는 아니라도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란은 호시탐탐 돌아갈 기회를 노렸으나 그녀가 움직이려 할 때마다 자꾸 대공이 이쪽을 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엇을 보시나요? 저를 봐 주세요, 전하.”
코델리아가 그의 손을 잡고 제 가슴 위편에 갖다 댔다. 아란은 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걸 엿보는 건 너무 곤혹스러웠다. 산책이고 뭐고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들킬까 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제가 여자로서 명예를 지키게 해주세요.”
코델리아가 간청했다.
“부모의 명을 따라 남자를 유혹하는 게 레이디의 명예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명예와는 정의가 다른 것 같군요.”
“꼭 부모님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저도 전하가 좋아요. 전하께서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요. 만나시는 분이 없다면, 절 연인으로 삼아주시면 안 되나요?
귀를 막아도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라 계속 대화를 엿들을 수밖에 없었다.
“레이디껜 더 좋은 남자가 나타날 겁니다.”
대공이 코델리아의 고백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전하, 제발…….”
코델리아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애타는 사랑을 고백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그걸 전부 들은 아란은 혼자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코델리아는 체념하고 눈물을 흘리며 정원을 떠났다. 아란은 평생 그녀의 일을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코델리아가 돌아간 후에도, 대공은 무슨 일인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오십시오.”
그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던 아란의 몸이 굳었다.
한참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결국 대공이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아란은 다소 절망적인 기분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어. 정원에서 산책하려다 우연히 들은 거야.”
아란이 변명했다.
“그러십니까.”
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란은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세요. 침실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순순히 대공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 장면이 생각보다 충격적이라 산책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별생각 없이 그를 따라가던 아란은, 그가 가는 곳이 올 때 왔던 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여긴 아란이 그의 팔을 슬쩍 잡아당겼다.
“내 침실은 저쪽이야.”
“압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불안해졌다.
“난 돌아갈래.”
대공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 왔습니다.”
“다 왔다니? 어딜?”
아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농담으로도 다 왔다고 표현하긴 어려운 곳이었다.
“여기가 어딘데?”
대공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뒤늦게 아란은 어둠 속에서 자신과 대공의 마차를 발견했다.
이 밤중에 다른 곳이라도 가려고 하나?
그러나 보이는 건 마차뿐으로, 말들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말들은 전부 마구간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마차 앞으로 그녀를 데려간 대공이 거침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여긴 왜 온 거야?”
“폐하와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남자가 밤에, 빈 마차 안에서 여자와 하고 싶은 것.
불안함은 확신이 되었다. 뒤늦게 대공의 의도를 이해한 아란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등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대공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마차 안에 태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있었다. 엉덩이 아래로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장소가 많이 협소하긴 하지만, 더러워진 시트를 백작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보단 이쪽이 나으실 테죠.”
그의 마차는 아란의 것만큼이나 넓어 협소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가 입술을 맞댔다.
아란은 체념하고 입술을 내주었다. 저번엔 대공이 양보했으니 이번엔 그녀의 차례였다. 그의 말대로, 백작가 사람들에게 젖은 시트를 내보이는 것보단 마차 안이 차라리 나았다. 급하게 마차에 태운 것과 달리 대공은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한참 키스에 몰두했던 대공이 입술을 뗐다.
“저번에 폐하께 거절당한 이후로 생각해보았는데.”
트집을 잡으려는 건가 싶어 아란은 잔뜩 긴장했다.
“앞으로는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방법?”
“가령, 폐하와 제가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상상한다던가. 제가 폐하의 시종이었을 때 말입니다”
아란이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이 웃으며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에녹이라고 불러보세요. 예전처럼.”
그렇게 말한 대공은 굳은 아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살짝 겹치고 애태우듯 입술을 핥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아란이 몸을 움찔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공이 아란의 어깨를 감싼 숄을 벗겨 의자 위에 깔고는 그녀를 그 위에 눕혔다. 드레스 위로 가슴이 잡혔다. 전에 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까 전 코델리아가 그의 손을 그녀의 가슴에 갖다 대던 장면이 떠올라 민망했다.
아란은 그가 왜 코델리아를 거절했는지 궁금했다. 여자인 그녀가 보기에도 코델리아는 외모가 아름답고 성격도 발랄해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아란은 망설이다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여자관계를 물을 정도로 그와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에녹이라고 부를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고.
그러나 그가 에녹이라는 이름을 말한 순간부터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대공이 입술을 내려 목에 입을 맞추고 쇄골 위 움푹 파인 곳에 혀를 넣었다. 그 사이 드레스 매듭이 풀리고, 그녀의 맨몸을 뜨거운 손이 매만졌다. 손이 지나간 곳엔 다시 입술이 내려앉았다. 곳곳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애태우듯 피부 위를 유영하던 입술이 가슴을 감싼 속옷에 닿았다. 그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입으로 벗겨냈다. 드러난 가슴이 부드러운 푸딩처럼 흔들렸다. 그 장면을 본 아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유두는 단단히 서 있었다.
“기대하셨습니까?”
대공이 짧게 실소를 흘리곤, 그것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비볐다. 그것만으로도 아란은 숨이 거칠어지는 걸 느꼈다.
당장 저번 달에도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란을 괴롭혔던 그였다. 그 때문에 순행도 미뤄진 것이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잔뜩 비벼 예민해진 유두를 그가 입에 물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아흣…….”
저절로 비음이 튀어나왔다.
그 이후에도 그는 집요하게 유두만 괴롭혔다. 아란은 이제 그만 그가 다른 곳을 만져주길 원했다. 한쪽 유두가 지나치게 예민해지기도 했고, 그가 그것보다 더 큰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상했다. 대공과의 관계는 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격렬하고 거칠어 오히려 이런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제로 쾌감이 끌어올려지던 이전 관계들보다 훨씬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진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의 다정한 몸짓은 아란을 예전으로 돌아갔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별다른 자극이 없어도 저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