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35화 (35/146)

35화

어디까지나 둘의 거래에서 우위에 선 쪽은 대공이었다. 시작도 끝도, 전부 그가 정했다. 그에겐 아란이 없어도 상관없었지만 아란에겐 그가 필요했다. 결국 늘 그렇듯 먼저 숙인 쪽은 아란이었다.

“그냥, 이곳은 너무 불편해……. 곧 사람들도 깰 거고 시트라도 더럽히면…….”

제 변명이 구차하다는 건 아란도 알고 있었지만, 무슨 말이라도 꺼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가 빨리 원하는 것을 취하도록 내버려 둘 걸 그랬다.

그냥 지금이라도 허락하면…….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만은 나오지 않았다. 아란은 결국 눈물만 줄줄 흘렸다. 막무가내인 그도 싫었지만, 황궁을 떠나서도 그의 존재감에 짓눌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버거웠다. 세상 어디에도 그녀가 숨을 곳이 없는 것 같아 두려웠다.

“왜 또 우십니까.”

아란은 대답도 못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화가 나면 더 괴롭힐 텐데…….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시녀들에게, 백작에게 들키면…….

자꾸 최악의 상황만 떠올랐다. 제국의 모든 이가 자신이 대공에게 기생하여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될 것 같았다.

대공이 혀를 찼다.

사실 아란이 생각한 것과 달리, 그는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거절당한 게 썩 유쾌한 건 아니지만, 그도 요사이 그녀를 너무 몰아붙였다는 자각은 있었다. 안 그래도 툭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이 약한 심성을 가진 황제이니 너무 괴롭혀서는 안 됐다.

귀찮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당분간은 다정히 대해주자고 마음먹었다. 지난 1년간 그럭저럭 말을 잘 들은 그녀에 대한 상이기도 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아란에게서 떨어졌다. 의외였는지, 아란이 울다 말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 얼굴이 제법 귀여웠다. 대공은 충동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황제가 움찔거렸다.

역시 하고 싶었다. 남자를 몰랐던 몸이 그가 주는 쾌락을 알고 반응하는 걸 떠올리면 만족스러웠다. 그는 계속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오랜 침묵이 불안했는지 황제의 입매가 굳었다. 늘 그렇듯 희미하게라도 웃는 일은 없었다.

그놈 앞에선 잘만 웃더니.

뜬금없이 사일러스 공작을 향해 미소짓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괘씸했다.

한편으론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 얼굴을 본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웃음이나 씁쓸한 미소가 아니라, 환히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지금은 어떻게 웃을까.

다른 여자들이 흔히 하듯 은근한 유혹이 섞인 웃음을 지을지, 아니면 어릴 때처럼 마냥 해사하기만 할지 떠올려 보았으나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 해주면 웃을지도 몰랐다.

대공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럼 입을 맞추는 건 괜찮습니까?”

“응? 으응.”

아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건 몸을 섞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그가 아닌 아란의 취향이었다. 대공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 그리했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황제는 여전히 시종 에녹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대공은 정중하게 허락을 구하듯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화답하듯 입술을 벌렸다. 그 틈으로 대공의 혀가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느낌에 아란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가 왜 갑자기 다정하게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나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운 입맞춤이 마음 한편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살짝 뺨과 귀를 어루만지는 손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공이 입술을 떼고 품 안에 그녀를 안아주었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매달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어느덧 눈물이 그쳤다.

그가 싫어서 울기까지 했으면서, 입맞춤 하나에 풀어져 이리 맥없이 안겨 있는 걸 보면 자신은 정말 천하의 둘도 없는 천치였다. 그렇지만 다른 이의 체온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녀에겐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었다. 이렇게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대공뿐이라는 사실이 아란을 괴롭게 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서늘한 체취도, 그녀를 감싸 안은 온기도 더없이 익숙했다. 이러고 있으니 무자비한 대공이 아니라, 그녀가 알던 에녹에게 안겨 있는 것 같았다.

아란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에녹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그를 눈치챈 대공이 물었다.

“제게서 옛 연인의 그림자라도 찾으십니까?”

“…….”

아란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정말 그녀가 사랑했던 소년은 없어졌다.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매번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등을 토닥여주던 손길이 갑자기 멈췄다. 다시 얼굴을 드니 대공은 흥이 식은 얼굴이었다.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이 깨기 전에 나가보겠습니다.”

그는 그녀를 놔두고 침실을 나가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났으니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안아주던 체온이 사라진 건 아쉽기도 했다. 아란은 한동안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대공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깼는지 벽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란은 서둘러 덜 마른 눈물을 닦고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에녹은 사라졌어도 그녀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살아가야 했다.

* * *

아란은 말을 타고 강을 따라 쭉 올라갔다. 의외로 그녀는 말을 곧잘 탔다.

승마를 알려준 건 황후였다. 겁에 질려 엉엉 우는 딸을 매섭게 다그쳐가며 황후는 끝내 아란을 말 위에 올렸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과잉보호하려고만 드는 황제와 달리 황후는 조금 더 현실적이었다.

몸이 너무 약하니 무예를 가르칠 수는 없지만, 황후는 딸에게 말 타는 법만큼은 꼭 알려주고 싶었다. 위급 상황이 닥쳤을 때, 말을 탈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생존 확률이 달랐다. 무엇보다 여자는 사내보다 체력이 떨어지니 반드시 승마를 배워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뛰어난 기수였던 황후를 닮아 아란도 말 타는데 소질이 있었다. 황후는 그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비밀스러운 승마수업은 결국 황제에게 들키고 말았으나, 아란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본 황제는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다.

백작보다 먼저 강변에 도착한 아란이 말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가 네를린 후작의 땅인가?”

“예.”

백작이 대답했다.

“확실히 제방 전체를 보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구나. 잘 모르는 내 눈에도 몹시 위험해 보이는데, 후작은 어째서 보수를 반대하는 거지?”

“제방을 허물고 강변을 새로 꾸밀 계획이랍니다.”

“뭐? 그는 수해를 걱정하지 않는 건가? 저쪽 땅에도 사람이 사는 것 같은데.”

“경치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피해는 감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아란은 할 말을 잊었다. 이름만 몇 번 들어본 네를린 후작이지만, 심보가 고약한 자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해결할 수 있게 하겠네.”

백작을 위로한 아란은 곧장 백작저로 돌아가 네를린 후작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날 저녁이 되기도 전에, 황제의 서신을 받은 네를린 후작이 부리나케 백작저를 방문했다. 후작은 풍채 좋은 중년 남자였다. 그는 아란을 보자마자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얼마 전 폐하의 즉위 1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었는데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황궁 밖에서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제 영지로 오셨으면 더 융숭하게 모셨을 텐데요, 폐하.”

후작이 얼굴 한가득 사람 좋은 척하는 웃음을 지었다.

“그랬나.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렇게 불러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언젠가 부름을 받아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늘 대비를 해두었으니 뭐든 하명하십시오.”

그의 말에 아란이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사적인 일로 부른 게 아닌데, 후작은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다른 뜻을 품고 이 자리에 온 게 분명했다. 아란은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의 말을 끊고 본론을 꺼냈다.

“짐이 보니 제방을 두고 문제가 있는 것 같더구나. 제방을 쌓으면 그대 영지에도 도움이 될 텐데 왜 보수하지 않는 거지?”

“제방이 왜 필요한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홍수가 나면 넘칠 때가 있긴 하지만, 비가 오면 물이 넘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것치곤 매년 사고가 난다던데.”

“그래 봐야 천한 소작농 몇 명이 죽거나 다치는 정도입니다. 그것마저 수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작의 태연한 태도에 아란은 놀랐다. 길을 가다 벌레를 밟아 죽여도 저렇게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황제를 대면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한껏 고양된 후작은 언짢아진 그녀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세금 낼 자들이 줄어드는 건 아쉽긴 하지만 강의 경관을 보면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할 만합니다. 그것을 위해 큰돈을 주고 땅을 구입한 것이니까요. 폐하께서도 시로프 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셨으니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다시 방문하셨을 땐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경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후작의 말엔 은근한 과시가 섞여 있었다.

그에게 소작농은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재산에 불과한 것 같았다. 아란은 분노보다도 서글픔을 느꼈다. 후작의 말도 안 되는 고집 때문에 죽어갔을 사람들이 떠올라서였다.

“사람이 다치고 죽는데 경치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대는 고작 소작농 몇 명이라고 말했지만, 짐이 알아보니 제방이 붕괴된 지난 5년간 그대와 백작의 영지에서 도합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장마로 실종되고 사망했다. 그대가 이런 식으로 버티면 다음 5년도 마찬가지겠지.”

“폐하.”

후작이 공손한 웃음을 지으며 아란을 불렀다. 그러나 아란은 그 아래 은근히 깔린 멸시를 읽었다. 그는 어린 황제를 내심 무시하고 있었다.

“폐하의 인자한 성품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폐하께서 마음 쓰시기엔 지나치게 자질구레한 일입니다. 저번 장마로 백작이 사소한 손해를 좀 입은 모양인데, 속상한 마음에 괜한 말을 꺼낸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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