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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34화 (34/146)

34화

보기와 달리 강바람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숄을 두르고 나와 다행이었다.

저택을 나올 땐 어스름하던 하늘이 몇 걸음 걸으니 금세 밝아졌다. 햇빛을 받은 수면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란은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걸었다.

강 저편으로 마을이 하나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지은 집들이 고즈넉해 보였다.

“황궁에서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란이 진심으로 말했다.

“황궁은 이곳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가.”

아란은 쓰게 웃으며 마을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너진 제방과 흙더미, 망가진 집터 따위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여기저기 물에 잠겼던 흔적이 보였다. 장마철이 지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을 정도면 꽤 크게 범람했던 게 분명했다.

“제방 공사를 다시 해야겠구나.”

“그렇지요.”

그녀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가?”

“사소한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 말하니 더 궁금한데.”

가만히 재촉하자 백작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실은, 제방을 다시 쌓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왜지?”

백작이 손가락으로 강 아래쪽을 가리켰다.

“제방이 무너진 건 지은 지 오래되어 많이 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아예 새로 쌓으려 했는데, 강 일부가 네를린 후작 소유의 땅을 지나가고 있어 몇 년째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공사비용은 전부 제가 대겠다고 후작에게 말을 꺼내도 도통 허락을 해주지 않으니……. 그렇다고 그곳만 빼고 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럼 분명 그쪽으로 물이 넘칠 테니까요. 손해도 손해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라도 들리면 마음이 영 편치 않아, 그를 설득시키느라 시간이 걸리고 있습니다.”

백작의 말을 들어보니 네를린 후작이라는 자가 별장을 지을 용도로 강 주변 땅을 일부 사들이고는, 제 소유지에 제방을 쌓는 걸 반대하여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사정을 털어놓는 내내 백작은 한숨만 쉬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그 역시 속에 구렁이를 몇 마리나 품고 있었지만 악덕 영주는 아니었다. 그의 고심이 오롯이 전해져 아란도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매년 수해로 고통받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짐이 도울 수 있다면 좋겠구나.”

아란이 안타깝게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후작이 별장에 머물고 있긴 합니다만…….”

비로소 아란은 백작이 산책에 동행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아란이 네를린 후작을 설득해 주길 원하고 있었다. 노골적일 만큼 의도가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아란은 흔쾌히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내가 한 번 중재를 해 보지.”

“감사합니다, 폐하.”

아란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실은 대공에게 중재를 부탁하려 했으나, 그는 백작령의 사정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손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허수아비에다 몸이 약해 자주 정무를 소홀히 하는 황제를 대단히 믿지는 않았지만, 제법 진지한 태도에 조금은 믿음이 생겼다.

조금 더 강변을 거닐고 나서 아란과 백작이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돌렸을 때였다. 저 멀리 대공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역시 산책을 나온 듯했다. 대공 옆에 코델리아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따금 코델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공은 다소 지루한 표정으로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 저녁때보다는 훨씬 친근한 태도였다.

대공 역시 아란을 발견했다.

아란의 걸음은 느려졌고, 반대로 대공의 보폭은 넓어졌다. 덩달아 코델리아의 걸음 역시 빨라졌다. 그러나 긴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대공의 속도에 맞추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대공 전하, 왜 갑자기 서두르세요? 앞에 뭐라도 있나요?”

코델리아는 내내 대공만 쳐다보느라 아란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여기 계셨군요, 폐하.”

대공은 그녀를 무시하곤 아란에게 인사를 올렸다. 뒤늦게 아란과 조부의 존재를 깨달은 코델리아가 허겁지겁 대공을 따라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괜찮네. 인사야 조금 늦게 받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산책 중이셨나요?”

코델리아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었다. 원래 성격이 그리 쾌활한 것 같았다.

“그래. 돌아가던 중이었지만.”

“산책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대공이 물었다. 얼굴에 닿는 시선이 오늘따라 묘하게 부담스러웠다. 귀찮은 일을 시켰다고 짜증을 내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코델리아는 어젯밤 대공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 황궁보다 바람이 상쾌해.”

아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도 오셨으니 산책을 더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폐하.”

백작이 눈치 없이 물었다.

“아니야. 이만하면 됐네. 강바람이 은근히 차구나. 짐은 먼저 들어갈 테니 담소 나누어라.”

서둘러 대답한 아란이 대공 곁을 막 지나치려 했을 때, 갑자기 그가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제 춥지 않으실 겁니다.”

훈훈한 온기에 아란은 자신이 정말로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조금 무안해졌다. 대공 옆에 선 코델리아의 옷차림이 신경 쓰인 탓이다. 적어도 자신은 꽤 두툼한 숄을 두르고 있었다. 반면 코델리아의 드레스는 얇았다. 그녀 역시 추웠는지 가끔 몸을 떨었다. 아란은 그의 옷을 다시 돌려주려 했다.

“아니, 짐은 어차피 돌아가는 길이라 필요 없어. 짐보다는 차라리,”

“그럼 함께 돌아가시지요, 폐하.”

그의 말에 아란은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대공이 아란을 함부로 대하기는 하지만, 예의를 모르는 남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다른 여자들에겐 친절한 편이었다. 아란이 아는 한 그가 함께 산책하던 상대를 내버려 두고 가는 일은 없었다.

아란이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그녀를 자연스레 저택 쪽으로 이끌었다.

“방금 나오셨는데 벌써 돌아가십니까?”

백작이 애써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물었다.

“폐하를 혼자 가시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레이디 르벨도 이해해 주시겠지요.”

대공이 그렇게 말하자 코델리아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먼 거리도 아니고, 혼자 갈 수 있다. 호위도 있고.”

그러나 대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와 함께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그는 말이 없었다. 그것이 불편해 아란은 평소보다 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 금방 침실에 도착했다. 시녀들은 아직 자고 있는지 옆 방은 아까처럼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바로 문을 열고 침실에 들어가려던 아란은 아직 자신이 대공의 옷을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옷을 벗어 그에게 내미는 순간, 옷과 함께 함께 허리까지 끌어당겨졌다.

그가 성급히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레 균형을 잃은 아란이 놀라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 틈에 대공이 침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계속 입을 맞추면서, 그가 아란을 침실 안으로 한 발짝 더 몰아넣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꽉 잡아 누르고, 굳은 혀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잡아 먹힐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게 보였다. 동시에 그는 더 난폭해졌다. 아란은 속수무책으로 떠밀렸다. 뒷걸음질 치던 그녀가 발을 헛디디자 그가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고 방을 가로질렀다. 숨이 막힌 아란이 입을 벌리자 혀가 더 깊이 얽혔다.

“으응…….”

등 뒤에 푹신한 시트가 닿았다. 그제야 입술이 떨어졌다. 아란은 숨을 몰아쉬며 곧장 그녀 위에 올라타려는 대공의 어깨를 밀어냈다. 방해받은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공이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하려는 건 아니지?”

옆 방에 소리가 들릴 것을 걱정한 아란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어깨를 미는 손을 잡아 내린 대공이 장난스럽게 아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할 겁니다.”

“뭐? 앗……!”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내려 하체를 붙였다. 조금 전 말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듯, 그의 성기는 아주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아란이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이제 완전히 밝아져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사람들이 깨어날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저택에서 시트를 더럽히는 건 결코 사양하고 싶었다.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대공이 입술을 내렸다. 아란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는 미약한 반항을 비웃으며 그녀의 턱과 목이 연결되는 곳을 한껏 물고 빨아들였다. 날카로운 치아가 연한 살을 꿰뚫을 것만 같아 아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 아파.”

“그럼 피하지 마세요.”

대공이 입술을 떼고 그녀의 턱을 잡아 강제로 정면을 향하게 했다. 아란이 가장 두려워하는 붉은 눈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맞추며 드레스의 매듭에 손을 가져가려 했다. 기겁한 아란이 몸부림쳤다.

“하지 마!”

늘 그렇듯 대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러는 건 늘 있던 일인데 갑자기 숨이 턱, 세게 막히는 것 같았다.

“나 정말 못 하겠어.”

“폐하께선 늘 그렇게 말씀하시죠.”

“이번엔 진짜야.”

그는 코웃음만 쳤다. 아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만두라니까!”

그녀는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팔을 힘껏 할퀴고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질식할 것 같았다. 평소보다 완강한 저항에 대공이 동작을 멈췄다.

황제는 그와의 관계를 늘 두려워했지만, 정말로 심하게 장난을 칠 때가 아니면 전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희롱하도록 허락하고, 대신 대공은 그녀를 황제로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불공평하게 보여도 그건 둘만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뭡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아란이 뒤늦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공은 늘 그렇듯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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