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33화 (33/146)

33화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란은 질린 눈으로 줄줄이 늘어선 기사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몸이 조금 나아지자마자 그녀는 미뤄두었던 순행을 서둘렀다. 한시도 황궁에 있고 싶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게 싫어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일 것을 명령했지만, 대공은 안전을 이유로 제 휘하의 기사단까지 동원해 호위대를 꾸렸다. 그 외에도 시녀, 시종, 또 잡일을 도맡아 할 사용인들, 그 사람들이 쓸 물자를 옮길 짐꾼들까지, 누가 보아도 황제의 행렬인 걸 모를 수 없을 만큼 대인원이 뒤따랐다.

아란은 기사들의 망토에 선명히 수놓아진 로아크 대공가의 문장을 못 본 척하고 마차에 올랐다. 함께 탄 시녀들은 대공가의 기사들이 늠름하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란은 그들의 말에 동조하는 대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창문을 열었다. 새벽까지 비가 내려 걱정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날씨가 맑게 개어 있었다.

비록 상상했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황궁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설레기 시작했다. 간밤 내린 비로 바람이 찬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기도 했다. 체통 없는 짓이라는 건 알지만 그만큼 들떴다. 오랜만에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바람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평소와 달리, 오늘 그녀는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황제의 행렬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손수 창문을 열어 모습을 드러낸 황제를 보며 환호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백금발이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자 더욱 함성이 커졌다.

그들에게 황가에 연이어 일어난 비극이나 황제의 개인사 같은 건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냥 당장 눈이 즐겁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아란은 기꺼이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바람이 찹니다.”

시녀 중 한 명이 걱정스럽게 말하며 아란의 어깨에 긴 숄을 둘러주었다.

“괜찮다. 시원해서 좋아.”

오랜만에 보는 황제의 웃음에 시녀도 더는 만류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시녀가 불쑥 말했다.

“그리 계시니 제 나이처럼 보이시네요, 폐하. 자주 웃으시면 좋겠어요.”

“응?”

아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늘 낯빛이 엄숙하셔서, 본래 연세보다 서너 살은 많게 느껴졌거든요.”

“아니, 이 아이가……. 죄송합니다, 폐하. 엄히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이가 많은 축인 시녀 한 명이 당황한 얼굴로 아란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다. 황제가 지나치게 어려 보이면 위엄이 살지 않지.”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어린 나이를 약점이라 생각하여 귀족들 앞에 나설 때면 늘 어울리지 않는 고루한 모양의 옷을 입었고, 노인처럼 딱딱한 표정을 고수했다.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마지막으로 웃었던 게 언제더라.

즐거운 기억은 생각나지 않고, 대공의 요구에 억지로 웃었던 일만이 떠올라 아란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하필이면 말을 탄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때맞춰 고개를 돌렸다. 아란은 얼른 손을 거두고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커튼까지 내렸다.

“더 구경하지 않으시고요?”

“이제 되었다.”

대공을 보면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다시 창문을 열지 않았다.

황제와 대공 일행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수도에 인접한 르벨 백작령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부유하고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 높았으며, 특히 백작저가 위치한 곳은 바로 근처에 제국의 젖줄인 시로프 강의 지류가 흘러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노백작이 뛰쳐나와 아란과 대공을 맞았다. 정확히는 아란이 아닌 대공을 더 반겼다.

“오랜만이오, 백작. 건강은 어떠한가.”

아란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넸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아직 정정합니다.”

“미리 일러두었듯이, 당분간 신세를 좀 지겠네.”

“신세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부디 원하시는 만큼 머무십시오.”

적당한 가식이 섞인 대화가 오가고, 백작이 두 사람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백작저는 크진 않았지만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게 설계되어 있었다. 특히, 아란이 머물 침실에선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한눈에 보여 그녀를 흡족하게 했다.

가지고 온 짐을 푼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이 두 사람을 만찬에 초대했다. 아란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만찬장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그녀는 대공을 마주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란은 선뜻 그의 에스코트를 수락했다. 별 것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굴어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의지와 달리 몸은 뻣뻣하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이 아란의 귀에 속삭였다.

“누가 보면 제가 폐하의 신하가 아니라 처형장의 사형집행인이라 오해하겠습니다.”

“마, 마차를 너무 오래 탔더니 피곤해서 그래.”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이러다간 식사를 하기도 전에 체할 것 같았다. 다행히 만찬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란은 만찬장에 도착하자마자 대공에게서 떨어졌다.

그곳엔 백작과 그의 딸 부부, 그리고 백작의 외손녀가 먼저 와 있었다. 아란이 상석에 앉자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곧 음식이 날라졌다. 신경을 많이 썼는지, 하나같이 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자 백작이 물었다. 아란은 의례적인 칭찬을 담아 대답했다.

“그대만 허락해 준다면 요리사를 황궁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야.”

“요리사가 지금 폐하의 말씀을 들었다면 너무 좋아 심장마비가 왔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요리사를 황궁으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지만, 요리사가 꽤 준수한 실력을 갖춘 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아란은 억지로나마 음식을 몇 술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식사하는 내내, 백작은 아란을 신경 쓰는 척하면서 계속 대공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딸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외손녀만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드문드문 고개를 들어 대공을 훔쳐보았다.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공은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맞장구를 쳤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백작의 화술 덕에 그럭저럭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런 쪽으로는 둔한 아란이라도,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란은 슬쩍 대공을 살폈다. 그 역시 백작의 뜻을 모르지 않을 텐데, 손녀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럴수록 백작은 더 애를 태웠다. 종래엔 직접 손녀에게 재주를 선보일 것을 명했다.

“제 손녀는 어릴 때부터 노래에 소질이 있었답니다. 아, 말로만 이럴 게 아니고 귀하신 분들이 오셨으니 오랜만에 네 솜씨를 뽐내 보아라, 코델리아.”

“황궁의 가수들에 비교할 바는 아니에요.”

손녀, 코델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거절했다. 아란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그녀는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은 듯했다. 백작이 몇 번 더 재촉했지만, 코델리아는 번번이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제 손녀가 수줍음이 많아서.”

백작이 민망하게 웃었다. 이제 코델리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갰다.

백작이 저렇게까지 말한 걸 보면 그녀는 분명 빼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자리에선 곧잘 그 실력을 뽐낸 듯했다. 아마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건 황제와 대공의 앞이라 그렇겠지. 저렇게 곤란한 얼굴을 보니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아란은 다정한 목소리로 코델리아를 격려했다.

“때로는 황궁 가수들의 흠 잡을 곳 없는 완벽한 노래가 아니라 조금 서툴러도 즐거운 노래가 듣고 싶을 때가 있지. 그대라면 짐이 원하는 노래를 들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대공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란은 못 본 척했다. 어차피 그녀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대공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코델리아의 역할이었고, 그녀를 선택하는 것 역시 대공의 몫이었다.

용기를 얻은 코델리아가 머뭇거리며 일어났다. 장밋빛으로 물든 뺨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곧, 애절한 사랑 노래가 만찬장 안에 울려 퍼졌다.

아란은 가만히 그녀의 노래에 귀 기울였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간혹 실수하긴 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실력이었다. 백작이 자랑할 만했다.

노래가 끝나자 아란은 진심으로 손뼉을 쳤다.

“역시, 짐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구나.”

칭찬을 받은 코델리아의 눈이 뿌듯함으로 빛났다.

“잘 들었습니다, 레이디 르벨.”

대공이 거들자 백작과 딸 부부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이 번졌다. 코델리아는 신이 났는지 곧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대공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아란은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만 자리를 지키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코델리아가 아까부터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데다, 종일 마차를 탔더니 피곤하기도 했다.

간단히 몸을 씻은 아란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낯선 침실이 불편할 거란 예상과 달리 금방 눈이 감겼다. 그만큼 피곤했다. 그녀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란은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눈을 떴다. 전날 무겁게 몸을 짓눌렀던 피로는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황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부담감도 없었다.

아란은 혼자 입고 벗을 수 있는 간편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골라 손수 옷을 갈아입었다. 옆 방에 시녀들이 있었지만 자는 것 같아 깨우지 않았다. 머리도 하나로 묶었다.

정돈한 그녀는 아침 산책이라도 할 마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시간이 일러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실엔 르벨 백작이 먼저 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폐하, 일찍 기침하셨군요.”

“그대야말로 부지런해.”

“나이가 드니 아침잠이 없어졌지 뭡니까.”

백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제보다 오늘이 훨씬 소탈해 보였다.

강을 따라 산책을 할 거라는 아란의 말을 들은 그가 함께할 것을 청했다.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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