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32화 (32/146)

32화

에녹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안 황태자는 암살자까지 보냈다. 만에 하나, 그가 정말 공을 세워 돌아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에녹은 암살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황자들 중 한 명이라는 건 눈치챘다. 하루가 멀게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의 숨통을 끊으며, 그는 반드시 살아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가장 먼저 버린 건 이름과 신분이었다.

그는 에녹이란 이름 대신 죽은 동료의 이름을 훔쳤다. 하루에도 몇백 명이 죽고 꼭 그만큼 채워지는 서쪽 국경에서, 신분을 감춘 자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에녹의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되자 그가 죽었다고 여긴 황태자는 그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이름을 버린 대가로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였다.

그다음 버린 건 자존심과 죄책감이었다.

악명이 높은 곳인 만큼, 서쪽 국경엔 인간쓰레기가 득시글거렸다. 부모를 살해하고 자식을 내다 판 자들 앞에서 그는 기꺼이 납작 엎드렸다.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전엔 생각도 못 했던 천박한 언행을 일삼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귀한 출신임이 분명한 그가 먼저 다가와 비위를 맞추면 대부분은 금방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들 중 몇과는 막역한 친우처럼 지내기도 했다. 그들은 그에게 비열함과 추악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는 배운 대로 그 친우들을 속이고 팔아넘기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적들을 만났을 땐 미끼로 던져주었다. 비로소 그는 서쪽 국경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버린 건 희망이었다. 그건 앞선 것들보다 훨씬 버리기 힘들었다. 황녀를 원망하면서도 그는 매일 밤 잠들기 전, 그녀에게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그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그가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힘이었다.

몹시 고통스러웠으나 결론적으로 그는 희망도 버렸다.

어느 날부터, 그는 황녀를 떠올리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황녀의 눈동자가 무슨 색이었는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했는지, 입술의 촉감이 어땠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쉽게 잊은 걸 보면 그가 황녀에게 품었던 마음은 사랑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그저 그녀의 어리석음에 잠시 동화되었던 것뿐이다. 이제는 어쩌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황녀의 이야기가 나와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가끔 황녀의 꿈을 꾸었다.

내용은 전부 달랐다. 어느 날은 그녀에게 저주하듯 원망을 쏟아붓고, 또 다른 날은 한 몸처럼 달라붙어 난잡하게 뒹굴기도 했다. 그러지 않을 땐 현실을 전부 잊고 예전처럼 다정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떤 꿈을 꾸어도 눈을 뜨면 전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쉽지는 않았지만, 꿈속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가 무슨 색이었는지는 궁금했다.

그렇게 2년이 흐르자, 그는 적과 아군 가릴 것 없이 두려워하는 악한이 되어있었다. 그가 죽인 사람의 피가 강을 이뤘다는 소문이 서쪽 국경 전체에 파다했다.

그러던 중, 일 때문에 국경 근처를 지나가던 귀족 한 명이 우연히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과거 로아크 대공가를 따랐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대공가의 마지막 후계자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그 귀족은, 아직 로아크 대공가에 충성하고 있는 자들을 모아 서쪽 국경으로 향했다. 그들은 괴물처럼 변한 옛 소주인의 모습에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강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는 옛 충신들의 입을 통해 로아크 대공가의 반역이 사실은 가문을 시기한 이들에 의해 씌워진 누명이었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전말을 알았을 땐 그보다 먼저 진실을 알게 된 선황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든 일을 묻어버린 후였고, 대공가의 외아들마저 자취를 감춘 후였다고.

매우 놀랄 거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는 담담했다. 그런 일에 분노하고 슬퍼하기엔 그의 마음은 너무 삭막하게 변한 후였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억울하게 빼앗긴 걸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어렵긴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선황이 죽고, 루아잔은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그는 빠르게 귀족들의 신임을 잃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만난 추종자들과 서쪽 국경에서 얻은 세력을 바탕으로 비밀스럽게 로아크 대공가의 옛 힘을 되찾았다. 벌써 루아잔의 폭정에 질린 몇몇 귀족 가문도 뜻을 함께할 것을 전했다.

다시 1년이 지나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황녀의 결혼식 날이 정해진 것이다. 남편감이 정해졌다는 말은 오래전에 들었는데, 이제 결혼식을 진행하는 건 아마도 얼마 전 죽은 선황 때문인 것 같았다.

결혼식이 치러질 곳은 수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성 에디트 성당이었다. 그는 다른 군사들과 함께 근위병으로 변장하고 황녀의 결혼식에 직접 잠입했다. 직계 황족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전부 다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황제는 물론이고 황녀와 그의 남편까지도.

황녀의 남편은 맥스웰 후작이라고 했다. 그도 익히 악명을 들어 아는 자였다. 나이가 많은 건 차치하고서도, 지금껏 맞이했던 아내가 여러 명인 데다 그중 두 명은 그가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시간이 되자, 맥스웰 후작이 거들먹거리며 여신상 앞에 섰다. 무수히 많은 사내의 구애를 받았던 황녀의 남편이 될 자라기엔 놀랍도록 볼품없는 사내였다. 그는 후작의 기름 낀 배를 그대로 갈라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황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실행에 옮겼을지도 몰랐다.

황녀는 새 황제의 팔짱을 낀 채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면사포를 뒤집어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흰 장갑을 껴 몸의 어느 곳도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으나, 맥스웰 후작은 음탕한 눈빛으로 황녀를 샅샅이 훑었다.

황녀는 자신의 전 연인이 결혼식장에 숨어든 줄도 모르고, 그대로 그의 앞을 스쳐 지났다. 익숙한 향기에 일순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묻어두었던 기억 몇 개가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황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후작이 황제에게 황녀를 넘겨받았다. 후작은 과시하듯 황녀를 세게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우악스러운 힘에 그녀는 잠시 휘청였으나 곧 우아하게 중심을 잡았다.

후작이 신부에게 키스하기 위해 면사포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다. 신부의 면사포가 벗겨지면 함께 잠입한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황녀의 눈동자는 무슨 색이지?

면사포가 벗겨지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후작이 단숨에 면사포를 벗겨냈다. 달처럼 창백한 낯이 드러났다. 짙게 화장한 얼굴이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아쉽게도 눈을 내리깔고 있어 그는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면사포가 벗겨졌는데도 신호가 없자 당황한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사이 후작은 황녀의 턱을 잡고 입을 맞추려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서둘러 검을 꺼내 위로 쳐들었다.

“지금!”

그것을 시작으로, 기사들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입구가 막혀 있었다. 성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는 가장 먼저 2황자 딜란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딜란은 무슨 상황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절명했다. 그다음 목표는 황제 루아잔이었다.

제 앞을 막아서는 황제의 호위들을 간단히 처치하고는 황제 앞에 섰다. 제식용 투구 아래 붉은 눈동자를 본 황제가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녹 로아크?”

그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곧 황제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었다.

루아잔이 죽자, 다른 이들은 전부 투지를 잃었다. 후작만 뭐라 소리를 꽥꽥 질러 대고 있었다. 그는 마음먹었던 대로 후작의 배를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그의 피가 신부의 드레스를 적셨다.

황제가 죽은 후에도 살육은 계속되었다. 재빨리 분위기를 파악한 귀족들은 앞으로 황가가 아닌 로아크 대공가에 충성하기를 맹세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전부 살해당했다. 항복한 이들은 그의 수하들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느새 성당 안에는 그와 황녀 둘만 남았다. 황녀는 성당 구석에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은 채 떨었다.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할 만큼 겁에 질려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그가 다가서자 발소리를 들은 그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는 검을 높이 쳐들었다. 죽음을 직감한 황녀가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두 눈은 꽉 감겨 있었다.

죽이기 전, 그 눈동자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란흐로드.”

떠올릴 틈도 없이 저절로 입술이 벌어져 황녀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황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봄날 새순처럼 옅은 녹색이었다.

“에녹……?”

황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격정이었다. 지금 여기서 저 여자를 죽이면 결코 그 분노를 해갈할 수 없음을 그는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황녀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왔다.

“정말 에녹이야? 이게 도대체…….”

떨리는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그 손을 거칠게 밀쳤다. 안 그래도 위태롭던 황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서슴지 않고 그녀의 목을 짓밟았다. 황녀가 고통스럽게 캑캑거렸다.

“살고 싶으십니까?”

그가 차갑게 물었다.

* * *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아란은 연극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대공은 멀쩡한데 혼자 울고 있으면 분명 이상해 보일 것이다. 당황한 그녀가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미적거리자, 대공이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께서만 우는 게 아니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 말에 고개를 들자 정말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연극은 비극으로 끝났던 것 같다. 아란처럼 펑펑 운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상상일지라도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었으니 몰입을 과하게 한 모양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아란의 얼굴을 본 극작가는 특히 뿌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이 연극은 황제를 울렸다는 입소문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표를 팔아 치우게 될 것이다.

“그만 가자.”

아란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대 위의 연극도, 그녀의 연극도 끝났으니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공이 자연스레 에스코트했다. 옷 위로 느껴지는 체온이 뜨거웠다. 아란은 오늘도 밤새 시달릴 거라는 걸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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