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30화 (30/146)

30화

“그래. 이젠 괜찮네. 걱정해주어 고마워.”

“모두가 폐하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얼른 건강해지셔야지요. 나중엔 로맨스가 아닌 전쟁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아란은 저의 말라빠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극일 뿐인데요. 만약 아무도 그런 내용을 쓰지 않는다면 제가 써드리겠습니다. 흠, 힘이 아주 장사셔서, 대공보다 커다란 대검을 휘두르는 설정은 어떠십니까?”

“뭐?”

아무리 연극이라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대공의 검은 거의 아란만했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유심히 듣지 않으면 모를 아주 작은 소리였다.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저만치 멀리 서 있던 대공이 그 순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란은 황급히 표정을 지웠다. 거리가 꽤 먼데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분명 듣지 못했을 것이다. 또다시 그가 다른 사내에게 새살거린다는 둥, 이상한 말을 할까 봐 괜히 걱정되었다.

다행히 그의 시선은 아란이 아닌 사일러스 공작을 향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공작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사일러스 공.”

“요즘 들어 자주 뵙는 것 같군요.”

공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공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대공의 크고 남자다운 손이 그의 손을 억센 힘으로 누르자 미소가 사라졌다. 강한 악력에 공작이 미미하게 눈매를 찌푸리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반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착각인가?

그러나 희게 드러난 뼈마디가 이 상황이 결코 착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대공의 붉은 두 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번뜩였다. 공작은 한순간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매우 불쾌해졌다.

대공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진 못해도, 그 역시 일국의 왕자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공작이었다. 불쾌해진 사일러스 공작은 지지 않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간혹 귀족들 중엔 이런 식으로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자들이 있었는데, 공작이 아는 대공은 그런 유치한 방식으로 기 싸움을 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기 싸움이 필요 없는 극장이었다.

공작은 혹시라도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일이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몇 가지 사건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복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다.

손이 떨어졌을 땐 두 사람 모두 손에 빨갛게 자국이 나 있었다.

공작은 반대쪽 손으로 대공의 흔적을 가렸다. 황제의 앞이라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모욕감에 저절로 표정이 굳었다. 유들유들해 보여도 그 역시 귀족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사내였다. 공작이 뭐라 입을 열려 했을 때, 연극이 곧 시작된다는 안내와 함께 관객석 쪽의 조명이 꺼지기 시작했다.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지정된 자리로 향했다.

“즐거운 관람 되길 바라오, 사일러스공.”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오갔는지 모르는 황제가 공작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사일러스 공작이 뒤늦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부디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작은 그 말만을 내뱉고 돌아섰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대공이 대놓고 시비를 걸어온 게 아니니 따지기도 뭣했고, 현실적으로도 대공과 충돌하여 이득이 될 게 없었다. 공작은 안 되는 일에 미련 두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대공은 예의 정중한 태도로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황제는 늘 그렇듯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만 응시했다. 빈말로도 두 사람이 결코 친밀해 보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그들 사이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이 감돌았다.

공작은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연극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 * *

무대 위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가발임이 분명한 긴 백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상당히 인기 있는 배우인 모양이었다. 그런 쪽으론 영 문외한인 아란은 그저 흥미로운 눈으로만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배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전혀 폐하를 닮지 않았군요.”

대공이 중얼거렸다. 아란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내심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비쩍 마른 아란과 달리 배우의 몸은 굴곡이 뚜렷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듯 무대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실제 황족들처럼 우아하진 않았으나 온몸에서 생기가 흘러넘쳤다. 겉모습만 따지면 아란이 아니라 배우 쪽이 훨씬 더 황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뒤이어 귀족들로 분한 조연들이 나타나 아란 역을 맡은 배우의 아름다움을 몇 번이나 찬양했다. 그러나 가짜 아란은 짐짓 슬픈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넓은 황궁 안에, 진정으로 내 외로움을 알아주는 이는 없구나.

그녀의 탄식이 극장 안을 울렸다. 그때, 뒤에서 한 잘생긴 사내가 나타났다.

―제가 알아드리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그는 오래전부터 황제를 연모해온 기사였다. 황제는 첫눈에 그 기사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했다. 두 사람은 그날부로 연인이 되었다.

아란은 무심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뛰어났고, 대사는 애틋했다. 그러나 그 애틋함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아무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표정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대공이 불쑥 물었다.

“아까는 왜 웃으셨습니까?”

“응?”

아란은 조금 당황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다시 웃어보세요.”

이어진 요구가 아란을 더 당황하게 했다. 저번부터 왜 자꾸만 웃음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대공이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울게 되실 겁니다.”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란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순한 눈매가 곱게 접혔다. 우습기만 했던 저번과 달리, 이번엔 제법 진짜 웃음 같았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 됐지?”

아란이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대공이 고개를 젓자, 그녀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당겼다. 그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개를 떨구었던 아란은 입술을 다물고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틀렸다. 시도가 거듭될수록 아란은 당황했고,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기만 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왜 못하십니까.”

“했잖아.”

“그게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겠어.”

“상관없습니다. 웃지 못하시겠다면, 우시면 됩니다.”

아란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커프스 버튼을 푸는 대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셔츠 소매를 걷은 그가 아란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다. 갑자기 허벅지가 공기 중에 드러나는 바람에 아란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지만 이미 허벅지 사이로 손이 들어온 뒤였다. 그는 아란을 비웃듯 느긋하게 속옷 위를 더듬었다.

“흣…….”

아란은 입술을 깨물며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이 앉은 곳은 다른 자리보다 난간이 높아 그가 하는 짓이 밖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싫어……. 어떻게 이런 곳에서……!”

대공은 아란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수상하게 보일까 봐 엉덩이를 들썩이는 게 다였다.

손가락이 숨어있던 돌기를 문지르자 저절로 몸이 튀어 올랐다.

“벌이니, 너무 좋아하진 마십시오.”

손장난 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심지어 그는 연극에 집중하기라도 한 양,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란도 태연하게 굴고 싶었으나 손가락이 몸 안을 파고든 이후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자 속옷 안을 파고든 대공의 손이 보였다. 얇은 천 아래로 그 손이 움직이는 모습이 생생했다. 중지로는 그녀의 구멍을 쑤시고, 검지로는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하기야 어느 마음씨 좋은 사람이 그녀를 도와주겠다 나선다 한들, 지금 대공이 내 아래를 헤집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울음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는데,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

“으응……!”

참지 못하고 흘린 신음은 배우들의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아란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대공이 원하던 대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흑, 아…….”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다 삼키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대공의 손이 빨라졌다. 벌어진 속옷 틈으로 안쪽이 보였다. 색이 연한 음모가 애액으로 젖어 피부 위에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드레스 자락만 꽉 움켜쥐고 있는 아란의 손을 대공이 반대쪽 손으로 잡아 끌어당겼다.

갑자기 손에 단단한 것이 닿자 아란은 놀라 대공을 돌아보았다. 그의 성기는 반쯤 서 있었는데,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기만 했다.

아란이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고 제 것을 문질렀다. 희고 가느다란 손이 스칠 때마다 그것은 점점 크기를 키우며 단단해졌다. 옷 너머로도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아, 응…….”

아래를 헤집는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나 있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깊이 찔러올 때마다 그녀는 아래에 힘을 주고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이미 속옷은 완전히 젖어 축축했다. 손가락이 그녀가 좋아하는 곳을 긁어댈 때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란은 대공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땀이 배어 나오는 이마를 비볐다. 대공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벌이 아닌 것 같은데.”

흥분한 와중에도 그 말이 가슴에 쿡 박혔다. 아란은 자세를 바르게 하려고 애썼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는 대공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