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29화 (29/146)

29화

아란은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과거의 꿈은 늘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공유했던 대공을 보는 건 더한 괴로움이었다.

아란은 협탁 위로 힘겹게 팔을 뻗었다. 작은 종이 손안에 잡혔다. 종을 울리자 곧 시녀가 들어왔다.

“목이 마르구나.”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시녀가 다시 나갔다. 아란은 고치처럼 이불을 꽁꽁 둘러매고 눈을 감았다. 설핏 잠들었을 때, 침실 문이 열렸다. 시녀가 물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일으켜주렴.”

잠에 취한 아란이 눈도 뜨지 않고 물었다.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다행히 오늘은 오후에 자잘한 일정 몇 개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어 조금 늑장을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시녀가 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치곤 지나치게 무거운 발소리였지만 피로에 잠긴 아란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곧 익숙한 손길이 그녀의 목과 어깨를 받쳤다.

아란은 뒤늦게 그 손이 지나치게 크고 강건하다는 걸 깨달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대공의 얼굴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잠이 싹 달아났다.

피부가 조금 더 그을리고 턱선이 날카로워졌다는 걸 빼면 과거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의 모습에서 예민하고 조금은 위태롭던 소년 시종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었다. 떨어져 있던 3년간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란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위압적인 느낌에 아란은 잔뜩 긴장했다. 그녀의 반응을 못 본 것처럼 대공은 태연하게 그녀의 입술에 물이 든 잔을 대주었다. 아란은 잠시 고민했지만 목마름에 지고 말았다. 실은 실랑이할 기운도 없었다.

목을 축이고 나자, 대공이 다시 아란을 눕혀주었다. 그의 멀끔한 얼굴을 보니 어젯밤의 일들은 전부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욱신거리는 몸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공은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웃어보십시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요구에 당황한 아란은 되레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그런 요구를…….”

아란이 고개를 돌리자 그가 힘을 주어 다시 되돌렸다.

“어서.”

거듭된 재촉에 아란이 입꼬리를 조금 끌어당겼다. 잔뜩 굳은 채로 입술만 당긴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대공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가 식었는지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란의 얼굴이 수치로 달아올랐다.

함께 밤을 보낼 때도 그랬지만, 가끔은 지금처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늘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아란은 단 한 번도 그의 마음을 읽은 적 없었다.

“곧 국내 순행을 가신다고요.”

“응.”

즉위 1주년을 맞은 기념으로 제국 곳곳을 방문해 민심을 살필 예정이었다. 갑자기 대공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아란은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왜?”

아란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실 그녀는 황궁을 떠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 생활이 답답했기도 했지만, 그때만이 잠시나마 대공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보다도 더 공사다망한 그가 설마 순행까지 따라오려 할 줄은 몰랐다.

“위험합니다.”

대공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호위는 모자라지 않게 데려갈 거야.”

“호위를 침실과 욕실까지 들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뭐?”

“최근에 르베인 국왕이 본인 소유 별장 욕조에서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못 들으셨습니까?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물론 아란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르베인 국왕과 아란은 경우가 달랐다. 르베인 왕을 살해한 건 그의 친동생들이었고, 아란에겐 황위 계승을 놓고 다툴 혈족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전부 죽였다.

“훈련받은 시녀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지간한 사내들보다 실력이 좋아.”

물론 시녀들이라고 해서 욕실에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아란은 일단 둘러대었다. 아니, 대공과 함께 순행에 오르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 앞에 맨몸을 보이는 편이 나았다.

“제가 따라가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 혹시 제가 없는 사이 다른 남자를 끌어들일 생각이셨는데, 제가 눈치 없이 군 겁니까?”

억지스러운 말에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그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그녀는 천하의 둘도 없는 탕녀가 된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애초에 날 원하는 남자도 없고…….”

아란이 아직 황녀였을 땐 모든 남자가 그녀의 환심을 사려 애썼다. 그녀가 가장 원했던 한 명만 빼고.

모순되게도,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그 어느 남자도 아란을 원하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대공만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비록 애정이 아닌 경멸과 굴종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긴, 그녀가 사내라도 삭정이처럼 바싹 말라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혹 눈먼 사내가 나타나 그녀에게 마음을 품는다 한들, 지금으로선 그 마음을 되돌려 줄 여유가 없었다. 생각에 잠긴 아란은 대공의 눈매가 사나워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맞습니다. 누구도 폐하를 원하지 않습니다. 폐하 곁엔 언제나 저뿐입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아란의 귀를 조금 세게 깨물었다. 아란은 반사적으로 짧은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대공은 그녀의 반응은 아랑곳없이 계속 귓불과 뺨을 핥고 깨물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되었던 입맞춤이 점차 농염해졌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 아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만해. 나 정말 못하겠어…….”

자존심도 버리고 애원했다.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 만난 대공은 그녀가 알던 에녹이 아니었다. 대공이 하는 생각, 행동, 말 중에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란은 늘 에녹이 어디로 가버린 건지 궁금했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옛날 꿈을 꾸어서인지,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의외로, 대공은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무심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준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폐하를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선 황궁 밖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 모르십니다.”

단정 짓는 듯한 말에 조금은 반발심이 생겼다. 아란도 본인이 물정 모르고 멍청하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평생 살아온 황궁 역시 안식처가 되지는 못했다.

“알겠어.”

더 언쟁하고 싶지 않아서 아란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마음먹었다면 말릴 수도 없었다. 아란은 몸을 둥글게 말고는 눈을 감았다.

* * *

그러나 아란이 또다시 앓아눕는 바람에, 순행 일정은 뒤로 미뤄지고 말았다. 몸보다는 정신적인 문제였다. 그날의 기억은 그녀의 마음에 상당한 충격을 남겼다.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던 그녀가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황궁의 극장에서였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지만 수척한 모습을 다 가릴 수는 없었다. 그 옆엔 늘 그렇듯 로아크 대공이 함께였다.

먼저 와있던 귀족들이 황제와 대공을 알아보고 인사를 올렸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그중 나이가 지긋한 귀부인 한 명이 대공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긴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흘려들을 수도 없는, 중요한 사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공이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공연이 시작할 때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대공이 아란을 돌아보았다. 아란은 자리를 비워도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실상 황제의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는 그는 이런 자리에서도 단순히 연극만 관람할 수는 없는 신세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대공이 떠나고, 혼자 남은 아란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볼 공연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극작가가 그녀에게 헌정한 것으로, 아름다운 황제가 가상의 인물인 한 충직한 기사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선 평판이 바닥을 기는 그녀였지만, 젊은 나이와 그럴듯한 외모로 예술가들과 일반 국민들 사이에선 꽤 인기가 높았다.

귀족들은 그 점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귀족은 제가 후원하는 예술가들을 시켜 황제의 아름다움이나 그녀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 따위를 다룬 작품을 만들게 시키기도 하였다.

그 작품들 속에서 아란은 아름답고 연약한 여자로만 묘사될 뿐, 군주로서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 덕에 많은 사람이 아란을 황제보다는 어리고 마음 약한 공주님 정도로 인식했다. 그건 귀족들이 그녀의 명에 불복하는데 명분을 실어주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미 그녀는 오늘 연극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활자로, 노래로, 그림으로 지겹도록 보고 들었다.

그래도 아란은 이야기 속 자신을 좋아했다. 현실의 자신은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권력 없는 황제의 삶이란 하루하루가 빙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폐하께선 이런 진부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사일러스 공작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잘못이 없었지만, 대공이 자꾸만 그를 들먹이며 몰아붙였던 것이 떠올라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불편했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러나 그 속내를 모르는 공작은 꼭 그녀가 멀어진 만큼 다가왔다.

“제 생각이 맞습니까? 별로 기대하는 표정은 아니시네요.”

“글쎄. 내용은 상관없어. 행복한 결말이면 뭐든 좋아. 부디 오늘 공연도 그렇길 바라.”

아란이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현실이 고되니 극 중 인물들이라도 행복했으면 했다.

“분명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응.”

“그간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괜찮아지신 겁니까?”

공작의 말은 얼핏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란은 한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렇게 남에게서 걱정 어린 말을 듣는 건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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