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네가 드디어 남자에 미쳐 보이는 게 없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네가 황녀라는 자각은 있고? 황실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
“죄송해요, 오라버니. 절대 황실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그놈이 널 꼬드겼느냐? 자신을 사면시켜 달라고?”
아란이 펄쩍 뛰어올랐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제가 결정한 거예요!”
“부황께서 지금 네 말을 들으시면 퍽 기뻐하시겠구나. 부모님께서 그리 되셨다고 제멋대로 구는 거냐?”
“오라버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충격받은 아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해서, 그녀는 곧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사이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루아잔이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 말이 심했다. 하지만 네 요구는 들어줄 수 없어. 나뿐만 아니라 딜란 역시 같은 생각일 거다. 아니, 너를 아는 모두가 반대할 거야. 결국엔 상처만 입고 포기하게 될 거다. 널 아끼는 오라비로서,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그의 말은 진심으로 동생을 아끼는 오라비의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아란은 더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루아잔은 야비한 눈으로 고개를 숙인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 일을 통해 누이가 보기보다 고집스럽다는 걸 잘 알았다. 당장은 황제를 핑계로 아란을 막을 수 있겠지만, 그가 죽고 난 이후엔 그나마도 불가능해질 게 분명했다. 이러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깊어져 정말 선이라도 넘게 되면 곤란했다. 그는 누이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완벽한 상태로 팔아넘길 생각이었다. 루아잔은 조금 더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아란은 에녹과 결혼하겠다는 뜻을 꺾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라 일단 한발 물러선 것뿐이라는 걸 모를 황태자가 아니었다.
황태자는 선심 쓰듯 아란의 재산을 절반 이상 받아 챙기는 대가로 에녹에게 급이 낮은 귀족 작위를 내려주기로 약속했다.
*
요 며칠 에녹은 조금 난감했다. 황녀가 시도 때도 없이 그와 붙어있으려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 안절부절못하는 그와 달리 그녀는 거침없었다. 지금도 아란이 지나치게 몸을 밀착시키는 바람에 에녹은 붉어진 귀를 다른 시종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어느 날, 둘만 남게 되었을 때 그는 조용히 아란을 타일렀다.
“보는 눈이 있을 땐 부디 행동을 자중하세요. 이러다 전하의 명예에 흠이라도 날까 걱정됩니다.”
“상관없어.”
태연한 어조에 에녹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란이 그의 목을 껴안았다.
“키스해 줘.”
“싫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제 전하의 어리광을 다 들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란은 자신의 행동을 어리광으로만 치부하는 에녹이 조금 야속했다.
아직 에녹은 제게 작위가 내려질 거라는 걸 몰랐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그에게 말하기가 꺼려졌다.
작위를 받으면 에녹은 한동안 수도를 떠나 있어야 했다. 그게 황태자가 내건 조건이었다. 그가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지 않은 말이 돌 테니 관심이 사그라들 때까지 피해 있으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은 그를 멀리 보내 버리고 황녀의 남편감을 찾으려는 수작이었다.
그 음흉한 속내를 모르는 아란은 순진하게도 ‘에녹이 제 곁을 벗어나게 되는 걸 기뻐하면 어떡하지’ 같은 사소한 것들만 겁냈다.
망설이는 아란을 에녹이 빤히 바라보았다.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거죠?”
“…….”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면 아란은 속내를 숨길 수가 없었다. 에녹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느긋한 자세로 턱을 괴었다.
마침내 아란이 입을 열었다.
“조만간 황궁을 떠나게 될 거야.”
“전하께서요?”
“아니. 네가.”
에녹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죠?”
“……네게 다른 신분이 내려질 거야. 이제 천민으로, 시종으로 지내지 않아도 돼. 완전히 신분을 회복할 수는 없었지만…….”
“예?”
에녹은 한순간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놀란 얼굴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같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황녀는 조금 바보 같긴 해도 허튼소리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가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의연한 목소리와 달리, 황녀의 두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에녹은 그녀를 달래 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 뒤늦게 물었다.
“무슨 신분을 받게 되는 겁니까?”
“이름도 처음 들어본 시골 어딘가의 남작위. 그렇지만 세습은 되지 않을 거래. 그리고 한동안 수도로 돌아올 수도 없고.”
아란이 힘없이 웃었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보잘것없는 시골 남작위가 전부였다.
그러나 에녹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라고 말았다. 평생 천민으로 살다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위까지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제아무리 황녀라도 그런 일을 쉽게 벌일 수는 없다. 그녀가 그만큼 대가를 치렀다는 걸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제게 작위를 내려주시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으셨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쉽게 허락하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한동안은 수도를 떠나 있으라는 명이야.”
아란의 의도와 달리, 누가 들어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는 황태자가 무슨 의도로 이것을 수락했는지 추측해 보았으나, 결국 말단 시종에 불과한 그가 황태자와 황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부 알아내는 건 무리였다. 아란이 작정하고 함구했기에 더더욱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어서 말씀해주세요.”
“싫어. 묻지 마. 어차피 이제 와 물릴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건 정당한 거래였어.”
아란이 그녀답지 않게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몇 번이나 물었지만 번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에녹이 지고 말았다. 사실, 이미 대가를 치른 후라 그가 반대한들 번복할 수 없는 문제라는 말에 마음이 기울기도 했다.
분명 기쁜 일인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상실감과 두려움이 가슴을 꽉 틀어 눌렀다.
“다시 수도로 돌아올 수 있는 건가요?”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그게 언제입니까?”
아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황태자가 언제 그의 귀환을 허락할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황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냥 이대로 시종으로 남으면 안 되겠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란의 곁이 아니라면 작위도, 영지도, 전부 의미 없게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이전엔 결코 몰랐을 감정이었다. 황녀의 곁에 너무 오래 있어 덩달아 바보가 된 게 분명했다. 이전이라면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홀가분하게 떠났을 것이다.
어쩌면 이 감정이,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란이 쉽게 사랑을 말하는 건 그 마음이 깊어서가 아니라, 이 관계가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젠가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어도 그녀는 비난받을 일도, 책임질 일도 없었다.
그러나 에녹은 아니었다. 아란은 몰랐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황녀를 홀린 남창이라며 그를 손가락질하곤 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놀이처럼 쉽게 에녹을 조롱하고, 하루빨리 그가 황녀에게 버림받아 비참한 신세가 되기를 기다렸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반응들이 이제 와 신경 쓰이는 이유를 에녹은 알 수 없었다. 이 관계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인데.
어쩌면 그보다 아란이 더 현명할지도 몰랐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건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모든 게 잘 될 거니까.”
그의 마음을 모르는 황녀가 천진하게 말했다. 에녹은 조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지나지 않아 황태자는 에녹에게 작위를 하사하였다.
아란이 직접 그에게 임명장을 내렸다.
“제국 서남쪽 끝에 있는 카스터라는 지방의 영주가 되는 거래. 이제는 카스터 남작이라고 불러야겠다.”
그녀가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했다. 밝게 웃고 있지만 밤새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에녹은 그를 못 본 척하며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감사합니다.”
“자주 놀러 갈게.”
퉁퉁 부어 우스워진 얼굴을 에녹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잘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심부름을 보내는 것처럼, 아란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에녹도 늘 그랬듯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전하,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재촉했다. 죄인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나보내야 하는 걸 아란은 못내 마음 아파했다.
“늘 네 행복을 기도할게. 사랑해.”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고백에 에녹은 꾹꾹 눌러 두었던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아직은 제가 전하께 품은 이 마음의 이름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이 마음이 여전하다면, 그때는 제가 전하를 사랑한다고 인정하겠습니다.”
그 말에 아란이 활짝 웃었다.
“오래 걸려도 좋으니까 기다릴게.”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별의 키스를 나누지도, 손을 잡지도 못했다.
그때 에녹을 보낸 걸, 아란은 두고두고 후회했다. 에녹이 제 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태자가 그를 서쪽 국경으로 보내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몇 달이 지난 후였다. 뒤늦게 에녹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아란은 루아잔에게 강력히 항의했으나, 그는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응수했다.
“내가 지키지 않은 약속이 뭐가 있느냐? 나는 네 뜻대로 그를 면천해 주었고 작위까지 내렸다. 천민으로 사느니 귀족으로 죽는 게 그에게도 더 잘된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뻔뻔스럽게도 아란을 맥스웰 후작과 혼인시키기로 한 사실을 통보했다. 맥스웰 후작이 황제보다 나이가 많고, 전처가 여섯 명이었다는 건 그에게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러 후보 중 그가 가장 많은 지참금을 낼 사람이라는 게 중요했다.
완전히 고립된 아란이 할 수 있는 건 황제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비는 것뿐이었다. 황태자는 선뜻 그 청을 들어주었다. 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란의 아름다움에 더 물이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많은 지참금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사고가 난 지 3년 만에 죽었다. 아란에겐 희망도, 황태자의 뜻을 거스를 의지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오라비가 원하는 대로 후작의 청혼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