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27화 (27/146)

27화

에녹에게 황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해진 아란은 얼른 말을 돌렸다.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줘.”

“조금 전에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야. 현실이 아니라, 그냥 네 마음을 이야기하라고. 다시 신분이 회복되길 바라?”

그녀의 재촉에 에녹은 별수 없이 생각에 잠겼다.

“예.”

“그렇게 되면 나랑 결혼할 거야?”

에녹은 헛웃음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아란은 너무 좋아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에녹은 황당함을 감추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차분히 대답했다.

“이 세상에 전하를 마다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겁니다. 고귀하시고, 성품도 온유하시고 또……, 아름답기도 하시니까요.”

“내가 아름다워?”

아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번에 에녹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흐음.”

한 번도 에녹에게 그런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아란은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머리카락을 꼬았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괜히 툴툴거렸다.

“만약 내가 황녀가 아니고, 성격도 나쁘고, 못생기면 나랑 혼인하지 않겠네? 더 지체 높고 아름다운 여자를 찾아갈 거야?”

“음…….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닐 것 같아요. 예전부터 전하와 함께해서 그런지, 다른 여자는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진심이었다. 에녹은 이제 제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걸 생각할 수 없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상상하지 마.”

뭐가 그리 좋은지 아란이 헤실거리며 그의 목을 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에녹의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다.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저렇게 좋아해 놓고 다른 사람과 혼인하게 될 쪽은 결국 황녀였다. 그녀의 마음이 변한다면 그는 언제고 버려질 신세였다.

다행히 황녀는 자비로우니 맨몸으로 그를 내쫓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황녀가 베푼 것만 해도 충분히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황녀는 그에게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하사했고 여유로운 생활을 허락했다. 그의 목숨을 살리고 애틋한 감정을 알려주었다. 여기서 더 바라는 건 몰염치한 짓이라는 걸 에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게 입 맞추는 황녀의 얼굴을 떼어냈다. 커다란 손에 턱과 뺨이 눌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마냥 예뻤다.

“왜 그래?”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이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황녀의 남편이 될 사내를 상상했다. 훤칠하고, 지체 높고, 믿음직스러운 자일 것이다. 이런 음습한 마음 같은 건 평생 품을 일 없고, 아란에게 아무 상처도 주지 않으며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사내.

황녀의 턱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아파.”

아란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를 밀쳐내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떤 남자에게도 주기 싫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에녹은 화들짝 놀랐다. 그와 동시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침대 위로 추락하려는 손을 아란이 잡았다. 부드럽고 다정한 온기가 그의 손을 감쌌다. 그녀는 에녹의 손에 얼굴을 묻고는 조용히 말했다.

“네가 시종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네가 다시 내 곁에 설 수 있게 할게.”

에녹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물정 모르는 황녀의 말에 희망을 품기엔 그는 지나치게 현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헛된 망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껏 황녀에게 의지했던 것처럼, 그도 황녀에게 의지가 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함부로 휘두를 수 없게 지켜주고 싶었다.

그는 손자국 남은 황녀의 턱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

말뿐일 거라는 에녹의 생각과 달리, 아란은 다음 날부터 에녹의 신분을 회복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그럴수록 침착하게 굴었다. 제가 하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반역자의 핏줄이 다시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그게 귀족 사회에 몰고 올 파장은 결코 대수롭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알아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아란은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선례가 있었는지 찾고, 에녹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 믿을 만한 이의 자문을 구했다. 극히 드문 사례 가운데 괜찮아 보이는 게 있으면 줄줄 외우다시피 했다.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루아잔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슬쩍 말을 흘려볼 생각이었다.

아란은 두 황자에게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진작 아란에게 사람을 붙여 두었던 루아잔과 딜란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형님. 괜히 쓸데없는 말을 흘린 게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아직 로아크 가문을 따르는 잔당들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아란흐로드가 일을 벌였다가는 괜히 상황이 난처해지는 게 아닙니까?”

딜란이 툴툴거렸다.

“호들갑 떨지 마라, 딜란. 내가 그걸 생각 못 했을 것 같으냐? 그 애가 작정하고 로아크의 아들놈을 감싸면 아직은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다. 그러니 스스로 버리게 만들어야지.”

황태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마음이 조급한 건 마찬가지였다. 금방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황제가 의외로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는 바람에 그가 황위를 물려받는 건 당분간 요원해 보였다.

황제의 대리로 군림하며 맛본 권력은 너무나 달콤했다. 실권 없는 황태자로 있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는 어서 누이의 부를 손에 넣어 더 강력한 권위를 휘두르고 싶었다.

그의 눈에 아란흐로드는 피를 나눈 동생이 아니라 귀하고 값비싼 보화로만 보였다. 그리고 에녹은 그 보석에 꼬여 흠을 내려 드는 쇠파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지만 아직 그에겐 황제가 내린 결정을 번복할 권한이 없었다.

황태자는 한 번 혀를 차고는 또 다른 동생에게 시선을 돌렸다. 딜란은 세 남매 중 가장 탐욕스러웠지만 아둔했다. 영리함으로만 따지면 아란흐로드가 그보다 몇 수 위라, 그녀가 교욱만 제대로 받고 심지가 굳은 성정이었다면 그는 감히 그녀의 부를 탐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태자는 한심함을 숨기지 않으며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너는 그 입을 함부로 놀려 일을 망칠 생각 말고 얌전히 내 말이나 따르도록 해라.”

경멸이 묻어나는 말투에서 모멸감을 느낀 딜란이 형을 노려보았다. 잘난 척하는 루아잔의 모습이 아니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루아잔은 황제의 권한을 대부분 위임받은 실질적인 황제였고, 딜란은 아무것도 아닌 황자에 불과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비굴하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황태자의 목을 치는 상상을 했다. 누이의 재산을 차지해 세력을 불리고 나면 다음 목표는 형이었다. 그는 곧 그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형제들의 동맹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황자들은 그리 오래 시간을 끌지 않았다. 에녹의 몸이 거의 회복되고, 아란이 어떻게 황태자를 설득해야 할지 고심하던 어느 날, 루아잔이 은밀히 아란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황태자가 본론을 꺼냈다.

“이제 에녹도 다 나았으니 슬슬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눠야지.”

그 말에 아란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꼭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니 마음이 조마조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번에 한 말, 생각해보았느냐?”

그녀의 긴장을 눈치챈 루아잔이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에 조금 용기를 얻은 아란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 아무래도 전 그를 전장으로 보낼 수 없어요.”

“흠, 유감이구나.”

“대신, 제가 생각한 방법이 있어요. 한번 들어주세요.”

“말해보렴.”

루아잔이 의자 깊이 등을 묻으며 다리를 포갰다.

“현실적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지 않고 다시 예전 신분을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이미 그를 전쟁터에 보낼 수 없다고 말씀드렸고요.”

“다 아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오라버니, 전 그가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니어도 돼요. 그렇지만 천민인 건 너무 가슴이 아프니까, 그냥 그 짐을 벗겨주고 싶어요.”

아란은 드레스 소매 아래로 떨리는 손을 감췄다.

“……제가 그의 신분을 사고 싶어요. 제국 귀족이 안 된다면 외국도 상관없어요.”

“아란흐로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는 시시한 절도범 따위가 아니다. 그 정도 죄를 감면하려면 네가 가진 부의 절반을 넘게 내놓아야 한다.”

“상관없어요.”

“네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름답다만, 오라비로서 네 제안을 들어줄 수는 없구나. 너는 어리고, 감정은 변덕스럽다. 고작 시종 한 명을 위해 그 정도 재산을 내놓겠다는 건 너무 무모한 일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아잔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누이가 이렇게 순순히 재산을 내놓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는 남자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 그녀를 비웃었다. 에녹에게 하찮은 작위를 주어 저 멀리 시골이나 외국으로 보내 버릴 계획을 짜면서, 겉으로는 인자한 오라비의 가면을 쓰고 아란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이어진 그녀의 말에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오라버니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그와 결혼할 생각이에요.”

그 말에 루아잔은 한순간 평정을 잃고 큰소리를 냈다.

“뭐라고? 지금 네가 뭐라고 했느냐?”

격렬한 반응에 아란은 움찔거렸지만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결연한 눈으로 루아잔을 바라보았다.

“허락해주시면 그 후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오라버니께서 원하시는 건 다 따를게요.”

아란은 떨면서도 끝내 제 의사를 밝혔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루아잔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가 네 도움을 받아 다시 귀족이 된다 한들, 혼인은 불가능하다. 황녀가 돈으로 작위를 산 사내와 혼인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현실적으로도, 법적으로도 그건 불가능하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을 알아들은 루아잔의 눈이 커졌다.

“황족의 신분을 포기하겠습니다.”

어리석은……!

루아잔은 하마터면 누이의 뺨을 때릴 뻔했다. 권력은 없지만 아란은 엄연히 황위계승권을 가진 황녀였다. 그녀의 정치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황녀를 한낱 시종 따위에게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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