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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26화 (26/146)

26화

루아잔은 고작 시종 따위에게 마음을 뺏긴 누이를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계속 인자한 오라비를 연기했다.

“그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꽤 깊은 것으로 안다. 비록 지금은 반역자의 자식이지만, 그는 원래 황가 다음으로 고귀한 핏줄이었지.”

아란은 오라비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왜인지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부황과 모후께선 늘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셨으니 나 역시 두 분의 뜻을 잇고 싶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그에게 신분과 영지를 되돌려 준 후, 다시 너와의 혼인을 추진할 생각이다. 물론 반대가 만만치 않을 테지만 말이야.”

“그게 정말이신가요?”

그녀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물들었다.

“하지만 단순히 네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는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는데, 그를 서쪽 국경으로 보내 군공을 세우게 하는 게 어떠냐?”

“서쪽 국경이라니요?”

은 식기가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서쪽 국경은 밤낮으로 마물이 들끓고 기후가 척박해 전쟁 포로나 큰 죄를 지은 자들을 보내는 곳 아닌가요?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

아란이 날카롭게 되물으며 루아잔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무지한 그녀라도 서쪽 국경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춥고 척박한 땅. 거기다 마물과 야만인들이 빈번히 출몰하여 생존이 곧 투쟁인 곳이었다.

그곳에 간 사람 중 무사히 귀환한 이들은 백 명 중 두세 명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마물과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고, 운 좋게 살아남아도 마물과 야만인의 손에 살해됐다.

결국 제정신인 자는 아무도 그곳에 가길 자원하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사형수나 그에 준하는 중죄인들, 포로들을 보내 지키게 하는 곳이 바로 서쪽 국경이었다.

그런 곳에 에녹을 보낸다고……?

상상만 해도 두렵고 무서워 몸이 떨렸다. 입맛이 완전히 떨어져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아란.”

“게다가 그는 아직 몸도 낫지 않았어요. 신경 써 주신 건 감사하지만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날카로운 그녀의 반응에 루아잔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를 아끼는 마음이 내 생각보다 각별한가 보구나. 허나, 그리 걱정할 것 없다. 설마 내가 누이의 남편 될 자를 사지로 보낼까.”

“…….”

“네 말대로 서쪽 국경은 위험하긴 하지만 네가 아는 건 어디까지나 오래전 이야기야. 이제 마물은 거의 토벌 되었고, 야만인들도 예전만큼 기세를 떨치지 못하지. 그리고 만약 그가 이 제안을 수락한다면 내가 직접 그의 안전을 보장해주마.”

루아잔은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했지만 아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에 에녹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떠올려보렴. 그곳에서 돌아온 자들은 과거 신분과 관련 없이 전부 영웅으로 추앙받지 않았느냐. 로아크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그곳이 어디라도, 전쟁터에 그를 보낼 수는 없어요.”

예상보다 완강한 반대에 성질 급한 딜란이 쏘아붙였다.

“철이 없구나, 아란흐로드. 그럼 반역자의 핏줄이 아무 대가 없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고작 명예 때문에 목숨을 담보로 잡히란 말인가요?”

아란도 지지 않았다. 평소엔 마냥 순하던 누이라, 두 형제는 내심 놀랐다.

“못할 게 뭐 있겠느냐. 지금처럼 한심하게 살 바엔 차라리,”

“딜란.”

루아잔이 싸늘하게 딜란의 말을 잘랐다.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딜란이 무안한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일을 망쳐버릴 뻔한 둘째를 슬쩍 노려본 루아잔은 아란을 향해 한층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물론 네가 끝까지 반대한다면 강요할 마음은 없다만, 한번 생각은 해보렴. 누구보다 고결한 귀족이던 그가 이대로 시종으로 생을 마감하길 원할지 말이다. 너도 황족이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란은 입을 다물었다. 루아잔의 말이 맞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에녹은 때때로 비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못했다.

음흉한 루아잔은 어린 누이의 동요를 눈치챘다.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덧붙였다.

“흐음, 내가 괜한 말을 꺼내 네 마음을 어지럽게 했구나. 전부 없는 일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아라.”

그 말에 아란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은 에녹의 신분을 복권하겠다는 말을 철회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아니에요. 너무 급작스러워서 그랬어요.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랬느냐? 하긴 내가 너무 두서없이 말을 꺼내긴 했지. 그러면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려무나.”

루아잔은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를 건 없었다. 어차피 어리석은 누이는 그의 뜻을 따르게 될 터였다.

*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에녹이 물었다. 평소와 달리 그를 앞에 둔 채 내내 다른 생각에 잠긴 아란 때문에 그는 내심 심기가 불편했다. 황녀는 그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하.”

에녹은 불편한 팔을 움직여 아란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그제야 흐릿하던 녹색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에녹을 향했다.

“응……? 방금 나한테 말 걸었어?”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건,”

“아니.”

지나치게 빨리 대답이 튀어나왔다.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에녹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며 아란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있잖아.”

“말씀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녀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답답해진 에녹이 재촉하려던 때, 아란이 불쑥 말했다.

“만약에 신분을 회복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기껏 오래 고민하고 꺼내놓는 말이 너무 뜬금없어 에녹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제국 역사상 반역자나 그의 가족이 원래 신분을 되찾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반역자의 핏줄이라면 아흔 살 노인부터 뱃속 아이까지 전부 처형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운이 좋아 목숨을 부지해도 평생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

지금 그가 이렇게 황녀와 마주 볼 수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어느 황제가 자신과 제 핏줄을 살해하려던 죄인을 용서한단 말인가. 황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괜한 구설에 오를 수 있으니까요.”

황태자는 황제처럼 아란에게 무르지 않았다. 용케 본성을 숨기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탐욕스럽고 잔인한 성정이라,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의 기분을 거스르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대상이 같은 피를 나눈 남매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아란에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특히 황태자 전하 앞이나 그분의 측근들 앞에서는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잖아. 정말, 정말로 만약에 루아잔 오라버니께서 널 사면해 주신다고 하면?”

“황태자 전하께서요?”

에녹이 얼굴을 찌푸렸다. 황태자가 그를 사면해 주길 바라느니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멀쩡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로아크 대공가를 복권시키는 게 차라리 더 현실성 있었다.

에녹은 굳이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가망이 없는 데다 남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날 이야기를 함부로 늘어놓는 아란이 답답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누구나 탐낼 아름다운 외모와 부를 가졌지만, 그걸 지킬 만큼 냉철하거나 교활하지 못했다.

커다란 눈을 깜박이던 아란이 갑자기 그의 손을 꼭 잡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랑 겨, 결혼할래……?”

“예?”

에녹은 이번에야말로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도대체 저 조그만 머릿속엔 무엇이 들은 건지.

아란은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응? 어서 말해줘, 에녹.”

“……시종이 어떻게 황녀 전하와의 결혼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시종이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말이야. 만약 내가 그 방법을 찾는다면 어떻게 할 거야?”

아란은 에녹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루아잔이 제안한 것처럼 그를 서쪽 국경으로 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의 처지에서 해방해주고 싶었다.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아란은 자책했다. 지금까지 그의 몸을 편하게 해줄 생각만 했지, 크게 상처받았을 그의 명예나 긍지 같은 건 돌아보지 못했다.

에녹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전 불확실한 가정은 하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공상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고요. 혹 다른 자가 그런 허황된 말로 전하를 현혹하려 하거든, 즉시 그자를 내치십시오. 전하의 인생에 하등 도움 되지 않을 작자니까요.”

그 작자가 황태자인 줄 꿈에도 모르는 에녹이 싸늘하게 말했다.

오라비를 비난하는 말에 아란은 흠칫 놀랐다. 예전부터 에녹은 이상할 정도로 두 황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고가 나기 전까진 아란도 황자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최근엔 가끔씩 마음이 불편했다.

“참,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께선 전하께 별다른 말이 없으십니까?”

“응? 으응…….”

에녹이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로요?”

“응. 애초에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아란이 더듬더듬 변명했다. 에녹이 워낙 황자들을 싫어하는 바람에 그녀는 아직도 그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피붙이의 정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황제의 상태도 점점 악화되고 있는 데다 에녹도 환자인 터라 불안했던 그녀는 더더욱 황자들에게 기대게 되었다.

아란도 지금 상황이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에녹이 황자들을 싫어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한다면 어떻게든 이해해보겠지만, 그는 늘 모호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에녹이 특유의 날카로운 어조로 가족들을 비난할까 두려웠던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대신 그가 몸을 회복하면 꼭 오라버니들과 에녹의 만남을 주선해 오해를 풀 거라고 다짐했다.

“황자 전하들께서 이상한 말을 하시거든 곧바로 제게 와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알겠어. 그렇게 할게.”

아란의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너무 다그쳤다는 생각에 에녹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전하를 못 믿는 게 아니고, 세상 사람들을 못 믿는 겁니다. 가장 가까운 이도 늘 의심하셔야 합니다.”

“응. 늘 그러고 있어.”

에녹과 오라버니들만 빼고. 아란은 속으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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