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25화 (25/146)

25화

아란은 비 때문에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떴다가 감아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보지 마십시오!”

뒤에서 에녹이 그녀의 눈을 가리려 했다. 아란은 그의 손을 피해 달아났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제 부모의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고삐가 풀려 날뛰는 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를 붙잡으려는 근위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그녀는 마침내 마차에 가까이 다가갔다. 안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황제의 목소리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딸을 알아본 황제가 정신이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손을 저었다.

“안 돼, 돌아가라, 아란……!”

그러나 이성을 잃은 그녀의 귀에 애타는 부황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아란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온 힘을 다해 마차 문을 열려 했으나 엉망으로 찌그러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커다란 말이 달려들었다.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아란은 그대로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누군가 그녀를 감싸고 옆으로 굴렀다. 흥분한 말이 그의 등을 걷어찼다. 아란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넋 나간 그녀에게 에녹이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란은 그대로 기절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

그날 일은 말 그대로 참사였다. 그 사고로 황후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황제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가장 사랑하던 딸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아란의 큰 오라비인 황태자 루아잔이 황제 대리가 되어 공백을 메웠다.

사고가 나기 전, 황제는 아란에게 제국 최대의 곡창지대인 세티아 지방과 커다란 금광 수십 개를 물려주었다.

욕심 많은 루아잔과 2황자 딜란은 누이의 부를 탐냈다. 지금까지는 황제가 버티고 있어 감히 가로챌 생각을 못 했지만,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평소 앙숙이나 다름없던 두 황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한뜻을 모았다.

황제가 제 아들들의 탐욕스러움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사후에 그들이 제 누이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걸 예상한 황제는 로아크 대공가와의 혼약을 통해 아란을 지키게 할 생각이었으나, 대공가의 반역으로 그 방법은 무산되고 말았다. 다가올 운명을 몰랐던 그는 미처 다른 대비책을 마련해두지 못했다.

아란은 황후의 관 위에 흰 꽃다발을 올려놓았다. 황제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황자들과 황녀가 장례를 주관했다.

아란은 전날 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장례식에 참석하긴 했으나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다시 탈진할 것 같았다. 위태롭게 서 있는 아란을 루아잔이 부축했다.

“이리 상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모후께서 어찌 편안히 눈을 감으시겠느냐, 아란흐로드.”

“오라버니…….”

아란이 조금 놀란 얼굴로 제 어깨를 감싼 루아잔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두 오라비와 그리 정다운 사이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황족으로서 혹독한 교육을 받아온 황자들은 아무 노력 없이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란을 고까워했고, 아란 역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제들이 어려웠다.

“그동안 우리가 네게 너무 무심했었지. 하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혈육끼리 의지해야 하는 법이다. 이제부터는 나와 딜란이 널 지켜주마.”

루아잔이 살가운 어조로 말했다. 딜란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슬픔은 여전했지만, 피 섞인 혈육의 위로는 아란에게 깊은 위안이 되었다. 어리고 순진한 그녀로서는 오라비들의 시커먼 속을 알 재간이 없었다.

두 형제는 한동안 제법 살뜰히 아란을 챙기는 척했다. 어느새 그녀는 황자들에게 완전히 의지하게 되었다.

황후의 장례 이후 아란의 일과는 아주 단순해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황제를 찾아가 문안을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그를 간호했다. 황제는 백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거의 움직이지 못했지만, 아란은 곧 괜찮아질 거라 믿고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가 잠이 들면 에녹을 보러 갔다.

그 역시 심한 부상을 입고 누워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충격이 급소를 빗겨났다고, 말발굽이 조금만 빗나갔어도 그대로 절명할 뻔했다며 그를 돌본 궁의는 말했다.

아란이 창백한 에녹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느낀 에녹이 눈을 떴다.

“왜 우십니까.”

그는 아란이 우는 게 싫었다. 그 눈물을 보면 기분이 아주 이상해졌다. 젖은 얼굴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아 바라보기만 했다.

“미안해서.”

“무엇이 미안하신가요.”

“내가 널 주, 죽일 뻔했으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에녹이 조금 복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그 순간 황녀를 감쌌을까.

며칠 동안 그는 그 이유를 이성적으로 찾으려 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지금껏 그가 목숨을 부지하고 그럭저럭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건 순전히 황녀의 호의 덕이었으니, 그녀가 잘못된다면 그의 처지 역시 위태로워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을 전부 설명하지 못했다.

황녀를 향해 달려드는 말을 보았을 때, 심장이 곤두박질치고, 머리가 차게 식었다. 부모의 반역이 들통났을 때도, 그들의 목이 잘리는 것을 보았을 때도 에녹은 그때처럼 절실한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말발굽에 차였을 때도 아픈 줄 몰랐다. 황녀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생채기 하나 없는 황녀의 얼굴과 고운 손을 보면 안도감이 들었다.

에녹은 황녀를 향한 감정이 언제부턴가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아직 그 감정을 명확히 정의 내리지는 못했다.

“전하께서 무사하시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궁의가 그러는데, 저는 아주 운이 좋다고 합니다.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회복력도 좋아서 곧 일어날 수 있을 거래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궁의와 간병인들 모두 하루가 다르게 낫는 그를 보고 괴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에녹은 더더욱 제가 다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약한 아란은 부상의 충격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 날 살려줘서. 그렇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

“종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너는 종이 아니야.”

아란이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맞붙였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눈을 두고 핏빛 같다며 꺼림칙하게 여겼지만, 아란에겐 아주 특별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내 연인이지.”

연인…….

에녹은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사탕처럼 달콤한 어감이었다.

아란이 까칠한 입술 위에 부드러운 제 입술을 겹쳤다. 눈물이 섞여 짭짤했지만 그것 역시 녹아내릴 듯 달기만 했다.

“넌 날 떠나면 안 돼.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가셨는데 너까지 없으면 난 정말로…….”

슬픔이 북받치는지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조금 멎었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울음을 참느라 꽉 말아쥔 손등에 하얗게 뼈가 도드라졌다.

“두 분 폐하의 일은 유감입니다.”

“이렇게 인사도 못 하고 보내드릴 줄은 몰랐어.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께서 그렇게 되실 줄은……. 아버지께서도 날 몰라보시고, 요즘은 갑자기 고아가 된 것만 같아…….”

에녹도 그 기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졸지에 고아로 만든 게 바로 아란의 부모였다.

아무리 애정 없는 부모라 해도 세상에 단 두 명뿐인 혈육을 죽이고 그의 처지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자들에게 연민이나 안타까움 같은 걸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증오보다도 아란의 슬픔이 더 크고 깊게 와닿았다. 자신의 마음속 어디에 이리 무른 부분이 숨어있었는지 에녹은 놀랍기만 했다.

아란이 눈물을 닦으며 부은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도 내가 오래 실의에 빠져있는 건 원치 않으실 거야. 내가 힘을 내야 아버지께서도 다시 건강해지실 거고.”

뻔뻔스럽게도 그의 앞에서 제 부모의 불행을 애도하는 이기적인 행태에도 미운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선 반드시 건강을 되찾으실 겁니다.”

“응. 요즘은 매일 곁에서 책을 읽어드리고 있어. 나를 기억하진 못하시지만 내 목소리는 아주 좋아하시거든.”

에녹도 황녀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가냘프지만 발음이 또렷하고 높낮이가 일정해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 목소리로 애정을 속삭일 때면 대공가의 후계자로서 가졌던 긍지나 부모의 원한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녹이 그녀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란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에녹은 겨우 그 입술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그러시군요. 다행입니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서로 눈치만 보던 중, 문밖에서 아란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에녹이 굳게 닫힌 문을 일별했다. 그 뒤에는 아란을 따르는 시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예전에 에녹에게 한 소리를 들은 후로 아란은 꼬박꼬박 시녀나 호위를 대동했다.

“더 늦기 전에 얼른 가십시오.”

“아직 더 시간이 있는데…….”

“어서.”

에녹이 다시 한번 재촉했다. 아란이 마지못해 느릿느릿 일어났다.

“내일 또 올게.”

가볍게 뺨에 키스한 그녀가 아쉽게 돌아섰다. 에녹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다정한 온기가 사라지고 나면 참기 힘든 쓸쓸함이 찾아왔다.

문이 닫히고 아란이 있던 곳엔 어둠만이 깔렸다. 에녹은 다시 잠을 청하며 어서 다음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

아란이 아직도 에녹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걸 안 황자들은 아란에게서 그를 떼어놓기로 했다. 이제는 별 볼 일 없는 시종이 되었다지만 눈치 빠른 그가 아란과 가까이 있어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아란을 더 비싸게 팔아넘기려면 사소한 추문이라도 일어날 가능성을 열어두어선 안 됐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황녀인 아란흐로드를 대놓고 핍박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일단 그녀를 회유하기로 했다.

루아잔은 저녁 식사에 누이를 초대하여 은근히 마음을 떠보았다.

“요즘 로아크 대공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아란흐로드.”

갑자기 루아잔이 에녹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아란은 하마터면 수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게다가 에녹을 대공자라 칭하기까지 했다. 그게 무슨 의도인지 그녀로선 알 길이 없었다. 슬쩍 오라비의 얼굴을 살피니 그는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이었다.

아란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워낙 부상이 심했던 터라 계속 치료 중이에요.”

“안타까운 일이구나. 그래도 목숨엔 지장이 없다니 다행이다.”

“예…….”

“따지고 보면 그가 네 목숨을 구한 은인이니, 오라비로서 마땅한 보답을 하는 게 도리겠지.”

그 말에 아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두 눈동자는 은근한 기대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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