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24화 (24/146)

24화

“부모님께서 사흘 뒤에 연회를 열어주기로 하셨는데…….”

“그때쯤이면 화장으로 감출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

에녹은 아란의 입술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앙증맞던 입술이 갈라지고 부풀어 보기 안쓰러웠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황녀의 침실을 나선 에녹은 잠시 후 얼음이 든 컵을 가지고 나타났다.

“이걸로 문지르면 부기가 가라앉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야.”

아란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에녹이 얼음을 꺼내 그 위에 대고 살살 문질렀다.

“너무 차가워.”

아란이 작게 불평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평소와 달리 아란이 불평하고 에녹이 그녀를 달래는 형국이었지만 두 사람 다 그런 건 인식도 못 하고 있었다.

그리 날씨가 더운 것도 아닌데 얼음은 금방 녹아 사라졌다. 차가워진 입술 위에 에녹의 손끝이 스쳤다. 얼음 때문에 감각이 둔해진 아란은 몰랐지만 에녹은 놀라 손가락을 구부렸다.

차가운 입술을 제 체온으로 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예고도 없이 불쑥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녹은 하마터면 컵을 놓칠 뻔했다. 녹아 없어진 건 얼음이 아니라 그의 뇌인 것 같았다. 이래서는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클레어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아란을 외면하곤 컵을 내밀었다.

“이제 직접 하세요.”

“아, 응.”

아란이 묵묵히 컵을 받아들었다. 에녹은 힐끔거리며 얼음찜질을 하는 황녀를 바라보았다. 젖은 입술이 벌어진 걸 보니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는 결국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런 건 그에게나 황녀에게나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에겐 더더욱.

그는 이성적이지 못하거나 비합리적인 일을 아주 싫어했다. 그가 가장 경멸하는 인간상이 바로 감정에 휘둘려 일을 망쳐버리는 자들이었다.

에녹은 자신이 제법 똑똑하다 생각했고, 그건 어느 정도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이제 겨우 열여덟 해밖에 살지 못한 애송이였다. 그는 오만하게도 제 감정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

불행히도 에녹은, 한번 욕망을 자각하고 나면 절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란이 커다란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 심장이 뜨거워졌다.

에녹은 손가락으로 황녀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주었다. 부르텄던 입술은 이제 완전히 가라앉아 제 모양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그는 아란의 입술을 부르트게 하지 않고 키스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달간, 두 사람은 황궁의 높은 담장 아래서, 오래된 서고 한구석에서, 정원의 라벤더 군락 사이에서 몇 번이나 입을 맞추곤 했다.

손가락이 닿는 감촉이 간지러운지 아란이 입술을 오므렸다. 닦아준 것이 무색하게 에녹은 다시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유혹을 참지 않고 아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의도를 깨달은 아란이 착하게도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렸다. 다시 한번 서로의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음…….”

황녀가 가는 신음을 흘리며 목을 뒤로 젖히자 에녹이 자연스레 그녀의 목덜미를 단단히 받쳤다. 그의 등을 끌어안은 황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그의 셔츠 자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서늘한 손가락이 맨피부에 닿자 에녹이 숨을 크게 삼켰다. 황녀가 대담하게 셔츠 안으로 손을 완전히 넣어 그의 허리와 등을 매만졌다.

에녹은 계속 입술을 떼지 않으며 그녀가 제 몸을 만지기 쉽도록 셔츠를 벗었다. 성급함에 단추 몇 개가 뜯어져 바닥을 굴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 서늘한 손이 느리고 부드럽게 그의 피부를 스칠 때마다 열기가 끓어올랐다.

오랜 입맞춤에 힘이 부친 아란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에녹은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하아, 에녹…….”

아란이 한숨처럼 에녹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듣자 거짓말처럼 아래에 피가 몰렸다. 반쯤 일어섰던 성기가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부풀었다. 다리가 얽혀있던 탓에 아란도 그걸 느꼈다.

“저번부터 궁금했던 건데…….”

“말씀하십시오.”

“이건 왜 이러는 거야? 병이 난 건 아니지……?”

아란이 손가락으로 그의 성기 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엔 순수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에녹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평소엔 안 이러잖아.”

“이건 그냥……. 그러니까, 전하와 이런 짓을 하는 게 좋다는 증거예요.”

에녹은 민망함을 참으며 겨우 대답했다.

“정말?”

“……네.”

아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도 좋아. 너무 좋아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아란이 그의 허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맨 가슴에 그녀의 상체가 밀착되었다. 얇은 드레스 아래로 부드럽게 부푼 가슴이 뭉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에녹은 난폭하게 차오르는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둘 사이를 막은 괘씸한 천을 벗겨내고 그 아래 연약한 살을 한가득 깨물고 싶었다. 놀란 황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사이에 제 것을 마구 쑤셔 박고 싶었다.

그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대신 조심스럽게 황녀를 마주 안았다. 탐스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고 거칠어지는 숨을 눌러 참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아란은 숨이 막힌다며 몸을 비틀고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과 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게 얼마나 그를 부추기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가 아란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에녹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침대 위에 눌러 고정했다.

“왜 그래?”

아란이 무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드레스를 벗긴다면 아란은 당황할 테지만 곧 얌전히 그의 앞에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면 그녀는 고통도, 무서움도 참고 다리를 벌려 그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에녹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제 욕심껏 여린 살을 깨물어 상처를 낼 수 없었다.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비부를 파헤쳐 피를 볼 수 없었다. 신뢰로 가득 찬 눈동자가 고통으로 얼룩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황녀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아팠겠다.”

아란이 안타깝게 속삭였다. 그녀는 그의 상체 곳곳에 있는 흉터를 보고 있었다.

그의 몸엔 자잘한 흉터가 많았다. 반은 기사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을 때 생겼고, 나머지 반은 시종들에게 맞은 후 치료를 받지 못해 생겼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아란이 그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옆구리에 난 그 상처는 가장 최근에 생겨 아직 붉었다.

“내가 지켜줬어야 했는데…….”

아란이 상체를 일으켰다. 이번엔 에녹이 그녀 아래에 누웠다.

아란이 그의 흉터에 키스하고 부드럽게 핥았다. 관능 대신 애틋함만이 느껴지는 키스였다. 그 위로 떨어진 눈물이 에녹의 심장으로 스며들어 가장 깊은 곳에 고였다.

가슴 위로 늘어진 백금발을 보며 그는 죽은 부모를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를 몹시 사랑했다. 사랑이 너무 지극하여 자식에게 줄 애정 한 톨조차 남겨두지 않고 서로에게 주었다.

자식이 에녹 한 명뿐인 건 대공의 뜻이었다. 그는 대공비의 몸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에녹이 태어나자마자 그를 후계로 내세우곤 두 번 다시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 에녹은 자식이 아니라 후계자였다. 언제부터 두 사람이 역모를 계획했는지는 모르지만, 늘 원하던 대로 한날한시에 죽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행복했을 거라고 에녹은 생각했다.

“전하.”

“응?”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눈물에 젖어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에녹은 아란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 그 마음이 단지 어린 날의 치기인지, 아니면 제 부모가 그랬듯 끝없고 맹목적인 애정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멍청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네가 좋아. 사랑해.”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란이 머뭇거리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에녹은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아란이 들을까 불안해졌다. 그러나 가장 불안한 건, 그 말을 믿고 싶은 자신이었다.

*

“비가 많이 오네…….”

아란이 마차의 창밖을 내다보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더위를 피해 황실 일가가 다 같이 여름 별장으로 피서를 떠나는 길이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예고도 없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 그칠 겁니다.”

에녹이 대답했다. 원래 그는 황녀와 함께 마차에 오를 처지가 못 되었지만, 빗줄기가 굵어지자 걱정된 아란이 고집을 피워 별수 없이 마차 안으로 몸을 들였다. 거절하고 싶어도 실랑이를 벌이면 더 시선을 끈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곱게 차려입은 황녀와 시녀들 사이에서 비 맞은 생쥐 꼴로 앉아있는 건 꽤 민망한 일이었다. 황녀와 에녹의 사이를 진작 눈치챈 시녀들이 야릇한 시선으로 에녹과 황녀를 번갈아 보며 웃었다. 대공가에 벌어진 비극이나 그 후계자의 처지 같은 건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어린 연인의 모습이 재미있으면서도 사랑스러울 따름이었다.

“오늘 내로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여름에 소나기는 흔히 있는 일이잖아요.”

시녀 한 명이 살갑게 대답했다.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을 감싼 대기의 느낌이 달라졌다.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이 환해지더니, 근처에 있던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다.

“뭐야?”

시녀 중 한 명이 외쳤다. 그리고 몇 초 후, 하늘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렸다. 말들이 놀랐는지 갑자기 마차가 세차게 흔들렸다. 시녀 중 몇 명은 의자에서 떨어져 마차 바닥을 뒹굴기까지 했다. 마부가 말들에게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란은 이대로 마차가 뒤집힐까 덜컥 겁을 먹었다. 위태롭게 휘청이는 그녀를 에녹이 단단히 당겨 안았다.

다행히 곧 흔들림은 가라앉았다. 아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뒤이어 바깥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과 고함이 연달아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난 걸까?”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에녹이 마차 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왜 그래?”

아란이 물었을 때, 비명처럼 누군가 외쳤다.

“폐하……!”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란은 곧장 에녹을 밀치고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맞닥뜨렸다. 황제와 황후가 탄 마차가 뒤집혀 있었고, 그 안에서 빗물과 함께 피가 새어 나왔다. 황제의 마차를 몰던 마부는 저만치 나가떨어져 축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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