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23화 (23/146)

23화

황녀가 준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에녹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궁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낼 생각인가 보네.

그래도 맞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고 에녹은 애써 위안 삼았다.

예상대로 황녀는 툭하면 그를 불러내 먹이고 입히고, 쉬게 하려 들었다. 에녹은 그것들을 적당히 받아주면서도 아란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빠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아란의 애정은 양날의 검이었다. 황녀가 혼기가 차도록 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면 황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녹을 죽일 것이다. 그래서 에녹은 때때로 황녀에게 상처를 주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그러다 보면 아란도 언젠간 정신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둔한 황녀는 지칠 줄도 모르고 애정을 퍼주었다. 그건 마치 마르지 않는 강물 같았다. 에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애정에 조금씩 젖어 들었다.

시간은 흘러 아란은 이제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마냥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목과 팔다리는 사슴처럼 길어졌고, 마르기만 했던 몸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차올랐다.

에녹은 그녀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황녀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 까닭 모를 우수가 투명한 눈동자에 깃들 때, 이따금 그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몸이 자라나도 황녀는 한결같이 철없고 바보 같았다.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도 코웃음만 쳤다.

“오늘 클레어드가 온대.”

정원을 산책하던 아란이 들뜬 어조로 말했다. 클레어드 변경백의 아들은 아란보다 두 살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는 그는 제 아비를 따라 궁에 들어올 때마다 꼭 아란을 만나러 왔다.

“그러십니까.”

에녹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에녹은 클레어드가 달갑지 않았다. 그는 아란이 보지 않는 곳에서 곧잘 에녹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었다. 가끔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에녹이 거부하면 맞아도 티가 나지 않는 곳만 골라 때렸다.

꽤 뛰어난 검사인 그의 주먹은 맷집 좋은 에녹에게도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에녹은 자신이 그에게 실력으로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귀족인 이상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놈이 아란 앞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한 척하는 게 몹시 눈꼴시렸다. 황녀와 담소를 나눌 때만 사람 좋게 웃는 낯이 가증스러웠다.

그러나 가장 기분 나쁜 건 아란을 바라보는 놈의 시선이었다. 순수한 친구로서 그를 대하는 아란과 달리 놈은 발정 난 개새끼처럼 그녀를 쳐다봤다. 마냥 한심한 놈이라고 치부하기엔 날이 갈수록 그 시선이 거슬렸다. 할 수만 있다면 놈의 두 눈알을 찔러버리고 싶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나빠 보여.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없습니다.”

“거짓말. 엄청 언짢은 일이 있다고 네 얼굴에 쓰여 있어.”

“…….”

에녹은 차마 클레어드가 제게 저지른 짓을 말하지 못했다. 아란이 충격받고 질질 짜는 꼴을 보느니 그냥 몇 대 맞는 게 나았다.

아란이 에녹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언젠간 네가 먼저 네 속내를 말해주는 날이 오겠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에녹은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언제나 네 편이라는 것만 기억해 줘. 그게 네게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몇 년을 보아도 변함없이 미련한 모습이 이제는 안쓰러워질 정도였다. 가끔은 그 작은 머리통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나는 호시탐탐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 제발 그 어리석은 사랑인지 뭔지 좀 그만두라고.

에녹은 차갑게 아란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도 뭐가 좋은지 그녀는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클레어드 영식께서는 언제쯤 도착한다고 하십니까?”

“응,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로 했어.”

인상을 찡그리던 에녹은 갑자기 심술이 나 충동적으로 말했다.

“만나지 마세요.”

“으응……? 왜?”

아란이 조금 당황스럽게 되물었다. 그것도 짜증스럽게만 보였다.

“대신 제가 종일 놀아드리겠습니다.”

“정말? 정말이야?”

아란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네.”

“음……. 그런데 클레어드한텐 뭐라고 이야기하지? 한 달 전부터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는데.”

“싫으면 마시고요.”

에녹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란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좋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니까…….”

사실 에녹도 그 이유를 몰랐다. 어째서 황녀가 클레어드의 애송이를 만나는 게 싫은지. 클레어드가 마음에 안 들면 그가 황궁에 머물 동안 자리를 피해 있으면 그만일 텐데도.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곧 적당한 핑계를 찾아냈다.

“전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구나. 고마워.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아란이 웃었다. 그동안 보아온 것 중 가장 환한 웃음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누군가 심장 한편을 간질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소하면서 불편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에녹이 그 묘한 감각이 무엇인지 자세히 생각하기 전에, 아란이 서둘러 몸을 돌려 궁 안으로 향했다.

“클레어드에게 못 만난다고 편지를 써야겠어. 아프다고 하면 이해해 줄 거야.”

클레어드가 예고도 없이 바람맞는 모습을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꽉 막힌 아란의 성격을 아는 에녹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들떠있던 것과 달리 아란이 에녹과 한 일이라곤 죄다 사소한 것밖엔 없었다. 식사하고, 차를 마시고, 주사위 놀이를 했다가 도서관에서 읽을 책을 고르니 하루가 거의 다 가버렸다. 오늘은 황녀가 어떤 요구를 해도 전부 맞춰줄 각오를 했던 에녹은 내심 김이 샜다.

어느덧 밤이 되어 이제 에녹이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란이 아쉬운 표정으로 에녹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별다른 수식어는 없었지만 에녹은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그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이상한 감각이 점점 짙어졌다. 당황스러워진 에녹은 일부러 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따로 선물을 챙기지 못해 죄송합니다.”

작년에도, 올해도 에녹은 아란에게 선물을 줄 수 없었다. 황궁 소속의 시종이지만 최하급 천민인 그는 재산을 소유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걸친 옷도, 사용하는 필기구도 전부 황실의 재산이었다.

“그런 건 없어도 돼. 정말이야.”

아란이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이 에녹의 턱을 간질였다.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아란이 중얼거렸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아란의 보드라운 뺨을 감쌌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에녹이 홀린 듯 그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손바닥 아래 뺨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저기…….”

아란이 난처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는 뒤늦게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하고 서둘러 황녀에게서 손을 뗐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에녹이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려 했을 때, 아란이 그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한껏 발돋움을 하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키스라고 하기도 민망한 접촉이었지만 경험이 전무한 소녀와 소년에겐 전율처럼 강렬했다. 꾹 다문 입술을 서툴게 비비던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더 달콤한 감각을 찾아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입술 안쪽 점막이 맞닿고 혀가 얽혔다. 질척이는 소리가 야릇했다. 서툴고 성급하여 아프게 깨물고 깨물릴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황홀했다. 입술뿐만 아니라 맞닿은 모든 곳에서 정염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입술을 탐하던 두 사람은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먼저 이성을 되찾은 건 에녹이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입술을 뗐다. 아란 역시 당혹과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가라앉지 않은 열기와 거친 숨은 조금 전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죄송합니다.”

에녹이 아까 하지 못한 사과를 꺼냈다. 그가 한 모든 일에 대한 사과였다.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던 아란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과하지 마. 사실, 음, 난 너무 좋았어.”

늘 거침 없는 말로 아란을 상처 입히던 에녹이지만 지금만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결국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에녹은 앞으로 어떻게 황녀를 대해야 할지 생각했지만, 식지 않은 열기가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했다. 입술에 아직도 황녀의 감촉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판단을 보류하고 잠으로 도피하는 걸 선택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열기는 꿈속까지 따라붙어 그를 괴롭혔다.

*

다음날, 에녹은 아란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무리의 시녀들이 황녀가 아프다면서 궁의도, 시녀도 방에 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의 곁을 지나쳤다.

아프다고?

어제 분명 무리가 되는 활동도 하지 않았고,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주 멀쩡했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에녹이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아란이 아픈 이유의 절반은 그에게 있는 셈이다. 가책을 느낀 그는 일과가 끝나고 아란을 찾아가 보았다.

무슨 일인지 시녀들은 보이지 않고,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전하, 접니다.”

대답이 없었다. 잠이 들었나 살펴보니 조금씩 꼼지락거리는 게 분명 깨어있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아니.”

다시 한번 질문하자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여전히 이불을 내리지 않은 채였다.

“오늘 계속 침대에 누워 계셨다면서요. 많이 아프신 것 아닙니까?”

“그게…….”

아란이 이불 밖으로 눈만 빼꼼히 내밀었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에녹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더 묻지 않고 황녀의 얼굴을 가린 이불을 잡아 내렸다.

“앗!”

아란이 뒤늦게 가리려 했지만 이미 에녹은 엉망으로 부르튼 입술을 보고 말았다. 그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에녹은 괜찮았지만 상대적으로 피부가 약했던 아란의 입술엔 어젯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저러니 시녀에게도 보이지 못하고 종일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금……방 괜찮아 질 겁니다.”

에녹이 확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아란이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그가 평소답지 않게 허둥대고 있다는 걸 알아보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녀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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