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얼굴 쪽으로 손을 뻗기에 본능적으로 잡아채자 축축하고 서늘한 것이 얼굴 옆으로 툭 떨어졌다. 물수건이었다.
“어, 어, 깼어?”
황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에녹은 피곤함을 숨기지 않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아프다고 들어서……. 걱정돼서 왔어.”
“깨우지 않으시고요.”
“곤히 자기에.”
낮엔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도둑처럼 밤에 온 게 틀림없었다. 에녹은 겨우 몸을 일으켜 등잔에 불을 밝혔다.
“일어나지 마. 내가 할게.”
에녹은 그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참, 저녁 못 먹었을 것 같아서 조금 가져왔어.”
아란이 꼼지락거리더니 고기가 듬뿍 든 수프와 부드러운 빵, 과일을 꺼냈다. 조금 전에 왔다는 말과 달리 수프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란 역시 그걸 알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빨리 식었지? 다른 거로 가지고 올게.”
등잔불 아래서도 얼굴이 붉어진 게 확연히 보였다.
“됐습니다. 거기 두시면 나중에 먹겠습니다.”
“약도 가지고 왔으니까 식사 후에 먹어.”
“전하.”
“응?”
마냥 천진하기만 한 얼굴을 보자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얼마 안 있으면 열다섯 살 생일을 맞을 텐데, 경계심이 너무 없었다. 그녀가 못마땅한 것과 별개로 이런 건 지적해줄 필요가 있었다.
“밤에 남자 혼자 있는 방에 몰래 들어오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해.”
“그럼 다른 사람을 시켜 보내셨어야죠.”
“누가 봤을까 봐 그래?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몰래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이래 봬도 창문 잘 넘거든. 사실 널 처음 봤을 때도 몰래 창문으로 빠져나온 거야.”
아란이 걱정하지 말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녹은 어디서부터 알려줘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황녀의 개인 교사와 시녀들은 이런 것도 말해주지 않고 뭘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전하께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최소한 호위나 시녀는 데리고 오셨어야죠.”
“응? 무슨 짓?”
아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번 말하는 게 빠를 것 같다는 생각에 에녹은 아란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 끌어당겼다. 아란은 아무 반항 없이 순순히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왔다.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이 가까워지자 안 그래도 빨갛던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사내들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전하. 이 세상엔 혼기가 가까워진 황녀를 꾀어내기 위해 안달이 난 사내들이 아주 많단 말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에녹은 뒷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유혹할 생각은 없지만 어쨌거나 황녀를 이용해 먹으려는 심보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그의 말뜻을 이해한 아란이 어찌할 줄 모르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 나도 방 안으로 들어올 생각까지는 없었어. 상태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네게도 예의가 아니니까. 그냥 문만 아주 살짝 열고 음식이랑 약을 두고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네가 계속 끙끙거리길래 들어와 본 거야.”
“제가 끙끙거렸다고요?”
에녹이 인상을 썼다. 잠결에 앓는 소리를 황녀가 들은 모양이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거짓말 아니야. 처음부터 몰래 들어올 생각은 없었어. 진심이야.”
그리고 난 네가 날 꾀어내도 상관없어…….
에녹은 아란이 작게 중얼거린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그녀는 아마 꾀어낸다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예전에 내가 아팠을 때 너도 날 간호해줬잖아. 물론 넌 몰래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 생각을 하니까 두고 갈 수가 없었어.”
“알겠습니다. 대신 다음부턴 절대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아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을 마친 에녹이 어깨에서 손을 떼고 부드럽게 그녀를 밀어냈다.
“신경 써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아란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문질렀다.
“식사하는 것만 보고 갈게. 어…… 바구니랑 식기도 다시 챙겨가야 하니까.”
아란은 조금이라도 오래 에녹을 보고 싶어 핑계를 댔다. 자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깨어나 대화를 나누니 도저히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다.
입안이 까끌했지만 황녀가 고집을 피우는 통에 에녹은 별수 없이 빵을 삼켰다.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에 넣으니 잘 들어갔다. 빵을 다 먹고 식은 수프와 과일까지 모조리 먹어치우자 아란이 둥근 알약과 미리 따라둔 물을 건네주었다. 에녹은 그것도 받아 삼켰다.
“잘했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입술에 뭔가 닿았다. 얼떨결에 입을 벌리자 사탕이 쏙 들어왔다.
어린애도 아니고.
에녹은 조금 황당한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란이 배시시 웃었다. 에녹은 마주 웃는 대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가문이 몰락하기 전엔 만남이 제한적이었으니 이런 유치한 행동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처지도, 사는 곳도 변했다. 황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그의 일상을 침입하려 들 것이다. 황녀를 이용하려면 그 장단에 어느 정도 맞춰 줘야 할 텐데,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 나는 이만 갈게.”
아란이 미적거리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가기 싫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에녹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달도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응?”
예상치 못한 호의에 아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황녀궁까지는 꽤 멀잖아요. 이 밤중에 어떻게 혼자 가시려고 하십니까.”
“아픈데 그럴 필요 없어. 올 때도 혼자 왔는데, 뭐. 사람들 안 다니는 지름길도 잘 알아.”
아란은 얼른 에녹을 말렸다. 그렇게 말해준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래도 에녹은 꾸역꾸역 침대에서 일어났다. 굉장히 성가셨지만 어두운 밤길에 어린 여자애를 혼자 돌려보내는 건 정말 내키지 않았다. 일어서는 순간 크게 현기증이 난 것 말고는 참을 만했다.
“정말 괜찮아.”
“앞장서세요.”
아란의 말을 무시한 에녹이 짧게 턱짓했다. 묘하게 고압적인 태도에 아란은 눈치를 보다 걸음을 옮겼다. 에녹이 그 뒤를 따랐다.
깊은 밤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보초를 서는 경비대가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란은 귀신처럼 그들과 마주치지 않는 길을 찾아냈다. 아주 능숙한 게 밤마다 빠져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음……. 이제 이 길을 지날 거야.”
아란이 가리킨 것은 성인 여자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아주 좁은 길이었다. 체구가 작은 아란은 상관없었지만, 에녹은 게처럼 옆으로 걸어야 그 길을 지나갈 수 있었다.
길과 에녹의 어깨 폭을 비교하듯 바라보던 아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가야겠네. 그래도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정말 고마웠어.”
“괜찮습니다.”
“엄청 좁아서 힘들 텐데? 난 정말 상관없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으응…….”
길은 생각보다 더 좁았다. 아마 오래전 하녀들이 이용하던 통로 같은데, 이제는 완전히 버려졌는지 전혀 관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미줄까지 드문드문 쳐있는 흉물스러운 길을 황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걸었다.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가도 좋아.”
통로를 지나는 내내 아란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를 너랑 같이 걷게 될 줄은 몰랐어. 사실 여긴 아주 오랫동안 나만 아는 비밀 통로였거든.”
나름대로 자신을 신경 쓴답시고 끝없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자 에녹은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말 걸지 마세요. 밤이라 작은 소리도 멀리까지 들립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아, 응……. 미안.”
황녀가 입을 다물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두 사람은 아란의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안전하게 잘 왔어. 아픈데 너무 먼 길을 걷게 해서 미안해.”
아란이 작게 속삭였다.
“아시면 다음부턴 밤에 찾아오지 마세요.”
“응.”
아란이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침실 창문 사이로 길게 늘어진 끈을 잡았다. 어설프게 비단을 이어 만든 끈은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였다. 에녹이 인상을 썼다.
“그걸 타고 올라갈 생각이세요?”
“응. 왜?”
“하아, 진짜…….”
이제는 짜증 낼 의욕도 없었다. 그 교활한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자식이 나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란은 에녹이 깊게 한숨 쉬는 이유를 몰라 눈만 깜박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에녹이 다소 거칠게 끈을 잡은 손을 떼어내고 아란을 높이 안아 들었다. 갑자기 발이 들리자 놀란 아란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에녹은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를 처형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소리 지르지 마세요.”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진정된 걸 확인한 에녹이 입술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아란을 안은 팔을 더 높게 들어 올렸다.
“팔을 뻗어 창틀을 잡으시고 제 어깨를 밟으세요.”
“응……? 어, 어떻게 그래?”
“그냥 밟으세요. 괜히 망설이다 균형을 잃으면 둘 다 다칩니다.”
“뭐? 다친다고……?”
아란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아무래도 뒷말은 괜히 한 것 같았다.
“웬만하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다칠 일 없게 꽉 잡고 있을 테니까 얼른 밟으세요.”
에녹의 재촉에 아란이 마지못해 창틀을 잡고 그의 어깨에 살짝 발을 올렸다.
“체중을 실으셔야죠. 이러다 날 밝겠습니다.”
결국 짜증을 내고 나서야 아란은 눈을 질끈 감고 발에 힘을 주었다. 시간은 조금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그녀는 무사히 침실에 올라갈 수 있었다.
황녀가 몸이 가벼워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보다 6파운드만 더 무거웠어도 그는 벌써 여러 번 골절상을 입었을 것이다.
“고마워.”
아란이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에녹은 건성으로 목례를 하곤 등을 돌렸다.
아픈 와중에 무리했더니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 좁아터진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도 짜증 나긴 마찬가지였다. 황녀를 상대하는 건 너무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