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황녀가 아무 말이 없어 에녹은 그녀가 화가 났을 걸 짐작했다. 어쨌거나 노예로 팔리고 싶진 않았으므로, 그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려 했다.
그 때, 황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작았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었다.
“더 심하게 말해도 돼. 그래서 네 기분이 풀린다면 나도 좋아. 그럼 아주 조금은 내가 네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황녀는 웃었다. 이번엔 에녹이 말문이 막혔다. 감동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멍청함에 질식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아란의 작은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힘들고 화가 날 땐 남의 기분을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게 당연해. 게다가 나는 화가 나지도, 힘들지도 않은데 네 기분을 무시하고 있잖아. 나는 이미 전부터 네게 심한 짓을 해왔으니까, 너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누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건지. 너무 멍청하니 비웃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아란은 옷소매에 아무렇게나 눈물을 문질러 닦고는 그를 식탁으로 데려갔다. 작은 종을 들어 울리자 곧 하인들이 음식이 잔뜩 든 트레이를 가지고 나타났다.
“식사 안 했지? 나랑 같이 먹자.”
식탁 위가 기름지고 호화로운 음식으로 가득 찼다.
에녹은 뒤늦게 맹렬한 허기를 느꼈다. 황궁은 사용인들에게 결코 인색하게 굴지 않았지만 괴롭힘이 심해지면서 그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가 힘들었다. 한창나이인 에녹은 쓰레기와 돌이 섞인 식사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었다. 아직까진 타고난 체력으로 버텼지만 그마저도 점점 한계였다.
식탁 위의 음식들은 전부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인내심 강한 에녹이라도 유혹을 참기 어려웠다.
“어서 앉아.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아란이 멀뚱히 서 있는 에녹을 의자에 앉혔다. 그러다가 그녀의 손이 무심히 그의 배를 스쳤다.
“윽…….”
방심했던 터라 에녹은 저도 모르게 볼썽사나운 신음을 흘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급히 표정을 감췄으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어쩔 수 없었다. 아란은 대번에 그의 이상을 눈치챘다.
“어디 아픈 거야?”
“아닙니다.”
“잠깐만 볼게.”
에녹은 옷을 들추려는 아란의 손을 잡았다.
“황녀께서 대낮에 남자의 옷을 들추다니요. 폐하께서 아시면 제 목이 떨어질 겁니다.”
“너만 말 안 하면 문제없어. 이거 놔.”
아란이 그녀답지 않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에녹이 손을 놓지 않자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이런 표현, 정말 쓰고 싶진 않지만 명령이야.”
그 말에 에녹이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아란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상의를 벗겨냈다. 그리고 곧 드러난 상처에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
에녹의 몸은 보이는 곳마다 파랗고 검은 멍과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덜 아문 상처 위에 다시 새 상처가 덧씌워진 곳도 있었다.
“아니, 어떻게…….”
당연한 말이지만 아란은 폭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다.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누가, 누가 이랬어?”
“그게 중요한가요.”
“누가 그랬는지 말해. 다시는 이런 짓 못 하게 할 거야.”
아란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좋아한다고 매달리면서도 그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몰락한 대귀족의 처지가 어떤 건지, 그녀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의 멍청함이 분했다. 지켜주겠다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했을 때 그가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지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서 말해.”
“말하면, 그들을 죽이기라도 하시려고요?”
“……네가 원한다면.”
아란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대답했다.
에녹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애는 죽음이 뭔지 알기는 하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벌레 한 마리 잡아본 적 없는 게.
“절대 용서 안 해. 감히 네게…….”
아란이 비장하게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훌쩍이느라 그 다짐은 그냥 어린애 투정처럼 들릴 뿐이었다.
하기야, 그가 황녀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다.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그는 고작 말단 시종일 뿐이다. 그가 전력을 다해 덤벼도 시종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이었다.
반면, 어린애라도 아란은 황녀였다. 그녀의 투정 한마디가 가지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게 볼 게 아니었다. 반역자의 자식도 살려둔 그녀였다.
에녹은 고민에 빠졌다. 시종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지금껏 얌전히 지냈던 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순응일 뿐이었다.
언제까지 놈들이 날 괴롭힐까. 나는 언제까지 그걸 참아낼 수 있을까.
이를 갈던 제임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녹이 별관으로 돌아가면 그는 아까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려 들 것이다. 황녀에겐 그 모든 것을 막아줄 능력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에녹의 벗은 상체 위로 떨어졌다. 짜디짠 눈물이 상처에 스며들어 쓰라렸다. 황녀의 호의만큼이나 불쾌한 감각이었다.
황녀의 손을 빌린다면 그는 절대 평범한 시종으로서 살아갈 수 없을 터였다.
평범한 시종?
그 단어를 곱씹던 에녹이 이내 혀를 찼다. 황녀와 붙어있다 보니 그 역시 아둔해진 모양이다. 처음부터 그는 평범한 시종이 될 수 없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에겐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결정은 빠르게 내려졌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열네 살짜리 여자애에게 기대야 하는 처지가 한심스럽긴 하지만, 그녀만이 그의 유일한 방패가 되어줄 사람이었다. 에녹은 아란을 향해 웃어 보였다.
“예. 용서하지 마십시오. 어서 저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세요.”
아란은 멍하니 에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공가가 몰락한 이후 그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그 미소를 보자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어졌다.
“좋아. 그게 누구든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벌을 줄게. 그러니까 먼저 식사부터 하자.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감사합니다.”
에녹은 다시 옷을 갖춰 입고 식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는 기름진 음식들은 시종의 식사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아주 흡족한 식사였다.
에녹을 괴롭힌 게 같은 시종들이라는 걸 안 아란은 크게 분노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마음이 약하다는 걸 잘 아는 에녹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 구타와 괴롭힘이 좀 줄어들기를 기대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생각보다 아란이 추진력 있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황녀와 식사를 한 후, 남은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그를 누군가 은밀히 불러냈다. 낯익은 얼굴의 여자는 오래전부터 황녀를 모시던 시녀였다. 그녀는 에녹을 넓고 어두운 방으로 안내했다.
의아한 눈으로 그 안을 살피던 에녹은 곧 제임스와 그의 패거리들을 발견했다. 하나같이 손과 발이 묶인 채였다. 그리고 그 앞엔 아란이 앉아있었다.
“전하?”
에녹이 부르는 소리에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침통한 표정이었다. 에녹은 제임스와 다른 시종들을 지나쳐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원래는 내가 직접 벌을 내리려고 했어. 네가 당한 것의 딱 곱절로.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나는 네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모르고 있더라고.”
아란이 시종들을 노려보았다.
“저들에게 물어도 용서해 달라는 말만 하고.”
“그래서 제게 물어보려고 하신 거군요.”
“아니.”
고개를 저은 그녀가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시녀가 긴 나무 상자를 들고 와 에녹에게 건넸다. 상자 안에는 채찍, 회초리, 단검 따위가 들어있었다.
“네가 직접 돌려줘.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에녹이 대답하지 않자 그 뜻을 오해한 아란이 얼른 덧붙였다.
“못하겠으면 내 호위를 시켜도 돼.”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줄은 몰라 놀랐을 뿐입니다.”
“그동안 너무 무심했으니까……. 이걸로 네가 받은 고통을 전부 대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렸으면 해.”
아무리 시종이라도 황족의 수족답게 그들 중 대다수는 귀족이었다. 아란은 에녹을 위해 모든 대가를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그녀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황녀의 손을 빌릴 거라면 어중간하게 처리하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눌러버리는 편이 나았다.
에녹은 개중 가장 얌전해 보이는 회초리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돌아가야겠어. 혹시 모르니까 호위를 남겨둘게.”
에녹은 고개를 숙여 아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란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는 이내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가 자리를 뜬 건 폭력적인 장면을 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 놓고 그들을 징벌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원한다면 죽여주겠다고 호언장담한 걸 잊지 않았는지 징벌의 수위도 정해두지 않았다.
에녹은 서두르지 않고 제임스에게 다가갔다. 그가 겁에 질린 얼굴로 에녹을 올려보았다.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에녹은 회초리를 꺾어 던져버리곤 그를 풀어주었다.
“뭐, 뭐야……?”
제임스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 에녹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반항 못 하는 상대는 재미없으니까.”
그 뜻을 이해한 제임스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이내 비열하게 웃었다.
“꼴에 자존심은 남았다는 거냐? 곧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될걸!”
달려드는 그를 에녹이 가차 없이 후려쳤다. 곧 일방적인 폭력이 시작되었다.
*
시종 몇 명이 황녀에게 불려갔다가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후, 에녹에게 시비를 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녀가 지나치게 부담을 지는 걸 염려한 에녹은 시종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다. 아란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감시하는 황제 때문이었다. 황제는 아란이 아직 옛 약혼자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녹은 자신이 황제가 황녀에게 준 장난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직은 아란이 어리고 에녹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내버려 두고는 있지만, 기회만 생긴다면 황제는 곧바로 그를 제거하려 들 터였다. 어차피 이번 일은 본보기만 보여주는 정도면 충분했으니 에녹도 불만이 남지는 않았다.
우습게도, 괴롭힘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호되게 앓아눕고 말았다. 매일 같이 맞아도 끄떡없기에 건강은 괜찮은 줄 알았더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다.
에녹은 혼자 침대에 누워 어지럽게 흔들리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사건 이후 그는 혼자 방을 쓰게 되었다. 말단 시종, 그것도 천민으로서는 누리기 힘든 호사였다.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 찾아와 간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딱히 그런 것에 상처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가시게 구는 자가 없어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하며 그는 침대에 누워 종일 잠만 잤다.
그러다 에녹은 한밤중에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고 설핏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