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20화 (20/146)

20화

그가 어제 시종장이 맡긴 책의 필사를 마저 끝내기 위해 시종들이 쓰는 별관으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이 쏟아졌다.

“이야, 반반한 얼굴 하나로 목숨을 부지하신 황녀 전하의 전 약혼자께서 등장하셨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잘생기게 태어나는 건데.”

“아무리 잘생겨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얼굴 하나로는 부족하지 않겠어? 듣자 하니 대단한 특기가 있는 모양이던데.”

또래 시종들이 음탕한 손짓을 하며 킬킬거렸다. 에녹은 그를 무시했다. 저 정도 비아냥은 이제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꼿꼿한 자세로 걷는 에녹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들이 손짓했다.

“야, 너 이리 와 봐.”

에녹은 한심함을 숨기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공손한 척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에 언뜻 스친 경멸을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황궁에서 시종으로 일하려면 그 정도 눈치는 필수였다.

“이 건방진 새끼가……. 네가 아직도 대공가의 후계자인 줄 알아?”

그들 중 한 명이 주먹에 힘을 담아 어깨를 툭툭 쳤다. 제임스라는 이름의 그 시종은 에녹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키는 반 뼘이나 작았다. 그는 제일 악랄하게 에녹을 괴롭히는 무리 중 한 명으로, 외모도 체격도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돈이 많아 무리 중에선 꽤 입김이 센 편이었다.

제법 아프게 때렸는데도 에녹이 겁먹은 기색이 없자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제임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어쭈. 이게……!”

“그쯤 해둬. 네가 그 새끼라면 그딴 옹졸한 주먹에 겁을 내겠냐?”

곁에 선 다른 시종이 제임스를 비웃었다. 친구의 비웃음까지 들은 제임스의 얼굴은 이제 터질 것 같았다.

그 말대로 에녹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이제는 과거가 되었지만, 그는 굉장히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정식 기사 작위를 받길 기다리고 있던 이였다. 이런 위협쯤은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 정도면 겁을 내려나?”

제임스가 친구에게 말하는 척하며 에녹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쳤다. 에녹의 몸이 크게 비틀거리고 나서야 그가 흡족하게 웃었다.

“어때, 이 새끼야. 이제 좀 겁이 나냐?”

에녹이 무심하게 터진 입가를 슥 문질러 닦았다.

“다른 곳은 괜찮지만 얼굴은 손대지 말아 주십시오.”

“뭐? 하, 밑천은 건드리지 말라 이거야?”

“황녀 전하께서 보시면 화를 내실지도 모르니까요.”

황녀가 거론되자 제임스가 멈칫했다.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전부 이 녀석이 때린 거라고.”

제임스의 동료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재빨리 발을 뺐다. 멍청한 동료를 편들어주다 황녀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제임스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멍청하게 선 그에게 에녹이 말했다.

“용건 없으시면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일이 밀려서.”

“가긴 어딜 가. 좋아, 얼굴만 안 때리면 된다 이거지?”

제임스가 에녹의 배를 발로 찼다.

처음엔 잘 버티던 에녹이었지만 몇 번이나 얻어맞자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위로 가차 없는 발길질이 쏟아졌다. 주변을 지나가던 시종들이 보였지만 전부 웃으면서 지켜볼 뿐,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에녹이 얻어맞는 장면을 보는 건 별관의 시종들이라면 이미 익숙했다. 그중 몇 명은 재미 삼아 끼어들기도 했다.

한참이나 에녹을 구타하던 제임스가 마침내 발길질을 멈추었다. 분이 풀려서가 아니라 지쳐서였다.

“앞으로, 처신 잘해.”

숨을 헐떡이며 말한 그는 에녹의 얼굴에 침을 뱉고 돌아갔다.

에녹은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누구보다 자긍심 강하던 그였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고작 저런 놈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침을 닦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목과 허리를 곧게 펴고, 맡은 일을 하기 위해 걸어갔다.

*

충격이 컸는지 한동안 아란은 그를 찾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황녀 앞에 불려가 동정에 가득 찬 눈을 마주하느니 끈 떨어진 거 아니냐는 조롱을 듣는 게 나았다. 맞아서 부어오른 뺨도 보여주기 싫었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조금씩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좋아한다고 매달리더니 고작 이 정도였나.

어쩌면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은 비위를 맞춰주는 건데. 어차피 약혼했을 때부터 쭉 해왔던 일이 아니었나.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 뺨의 상처가 거의 나았을 즈음, 황녀가 에녹을 버렸다는 소문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다. 가장 기뻐한 건 단연 제임스였다. 점심때가 되어 식당으로 들어선 에녹의 앞을 제임스와 그의 무리가 가로막았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 들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임스가 씩 웃었다.

“지금 네가 도도한 척할 때가 아닌데. 네 처지가 달랑달랑하다는 소문이 파다해. 마치 네 부모 목처럼.”

에녹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패거리들과 시시덕거리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제임스가 자신만만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뭐? 얼굴은 손대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어쩌냐. 이제 그 반반한 얼굴 봐줄 사람이 없어진 것 같은데.”

제임스의 패거리들이 실실 웃으며 에녹을 둘러싸더니 순식간에 달려들어 사지를 결박했다. 그 틈에 제임스가 에녹의 배를 걷어찼다.

얼굴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심하게 얻어맞았던 몸은 아직 다 낫지 않았던 터라 에녹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제임스가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이번엔 얼굴을 노렸다.

“이제 턱뼈를 으스러뜨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

에녹이 이를 악물었다. 제게 매달린 시종들을 뿌리친 그가 팔을 들어 제임스의 주먹을 막았다. 그 때, 갑자기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뭐 하는 짓들이냐?”

머리가 희끗희끗한 황녀궁의 시종장이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임스도, 에녹도 동작을 멈췄다. 두 사람을 본 시종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황녀 전하께서 찾으신다, 에녹.”

에녹이 제임스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제임스는 분한 듯 이를 갈았지만 황녀의 시종장 앞에서 난동을 피울 수는 없었다.

“나중에 보자.”

제임스가 속삭였다.

에녹은 그 말을 무시하고 시종장을 따라 황녀궁으로 향했다.

황녀는 실로 적절한 때에 시종장을 보냈다. 죽은 부모에게 그리 큰 애정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제임스 같은 쓰레기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는 것까지 두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임스에게 손을 댔다면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들이 전부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황녀가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창밖을 보고 있던 황녀가 등을 돌렸다. 햇빛에 백금발이 하얗게 빛났다.

“왔어?”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그런데 꼭 할 말이 있어서……. 괜찮다면 들어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전하께선 저의 주인이시니까요.”

아란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저를 비꼬는지 아닌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에녹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게 아닌가 궁금해한 시간이 아까울 만큼 여전히 멍청했다.

그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보는 데다 제법 고마운 짓을 했으니 조금은 상냥하게 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저번엔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지요. 사과드립니다.”

“응? 아,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아란이 미끄러지듯 에녹 앞으로 다가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녀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고민해봤어.”

“무엇을 고민하셨습니까?”

“어떻게 하면 너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가까이 둘 수 있는지.”

제법 기특한 생각이었다.

“어떤 결론을 얻으셨나요.”

“부끄럽지만, 결론은 얻지 못했어. 네가 불편해하는 건 그냥 나 자체인 것 같아서.”

에녹은 황녀가 멍청하다는 생각을 조금 정정했다. 이제 보니 제법 머리가 돌아갔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란이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해. 그냥 널 곁에 두기로 했어. 나는,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하.”

애초에 황녀가 그럴듯한 묘책을 내놓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뻔뻔한 대답을 들으니 기가 막혔다.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좋아하는 척할 필요도 없어. 그냥 내가 널 지켜줄 수 있게 해줘.”

아란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직 어린 황녀의 외모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연두색에 가까운 초록 눈동자는 확실히 묘한 느낌을 주었다.

에녹은 비웃음을 숨기며 물었다.

“어떻게 지켜주려고 하십니까?”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짜증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대답이었다.

에녹은 상냥하게 대하기로 한 마음을 집어치웠다. 그녀는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둘 사이는 파국을 맞은 지 오래이며 황녀와 시종, 그것도 반역자의 아들은 결코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이 멍청한 황녀에게 똑똑히 가르쳐 주기로 했다.

“행복이라. 제가 그걸 느낄 수 있을까요. 하물며 제 부모를 죽인 자의 딸에게서.”

아란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그에게 들었던 모든 말이 낭만적인 밀어라고 생각될 정도로 차가운 어조였다. 약혼자였을 때 에녹은 늘 다정해서, 그녀는 그가 이렇게 신랄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건 그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굳은 아란을 보며 에녹이 피식 웃었다.

“죄책감 가지실 것 없습니다. 제 부모의 반역이 성공했다면 목이 떨어진 쪽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되셨을 테니까요. 전하의 목숨 역시 장담할 수 없겠죠. 물론 저는 전하를 구하기 위해 식사를 거르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거고요. 애초에 그 방식이 먹히지도 않았겠지만.”

“…….”

아란은 입술을 달싹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가는 눈썹과 사랑스러운 입매가 일그러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노예로 팔려도 할 말이 없네.

그 얼굴을 보며 에녹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꾸만 삐딱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황녀에게만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같은 말을 해도 더 아프게, 더 모질게 하고 싶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