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9화 (19/146)

19화

버클 푸는 소리가 나며 예고도 없이 대공의 것이 들어왔다. 아란이 반사적으로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대공은 늘어진 팔도 잡아 그의 목을 껴안게 했다. 아란이 완전히 제 몸에 밀착된 걸 확인하곤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내키는 대로 깊은 곳을 찌르며 가슴을 주무르고 입술을 빨았다. 두 팔로는 가는 등과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꽉 껴안았다.

“하읏……! 아아앙!”

아란은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렸다. 거세게 추켜올리는 아래도, 온몸을 감싼 뜨거움도 모조 성기를 넣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감각이었다. 그의 난폭함조차 쾌락이 되었다.

아란이 두 번째로 절정에 오르려 하자 대공이 그때까지 눈을 가렸던 천을 벗겨냈다. 눈물에 짓무르고 천에 쓸린 눈가가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대공이 그 위를 핥자 쓰라림에 아란이 인상을 썼다.

“흐으…….”

쾌락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눈물이 계속 솟았다.

눈에 고인 눈물은 흘러내릴 새도 없이 대공이 전부 마셔버렸다. 다정한 척하는 입술과 달리 아래는 마음껏 제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아…….”

아란이 더 세게 매달리며 목을 뒤로 젖혔다.

대공은 움직임을 멈추고 젖은 녹색 눈동자에 황홀경이 번지는 것을 감상했다. 아란은 자신이 절정에 달할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결코 모를 것이다.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아는 그녀의 비밀이었다. 그는 홀린 듯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동시에 사정했다.

그러고도 대공은 아란을 놓아주지 않고 모로 누워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완전히 탈진한 아란은 그에게 안겨 숨만 몰아쉬었다.

지친 그녀의 눈에 유백색의 막대가 보였다. 남자의 성기를 닮은 막대 표면엔 끈적한 액체가 가득 묻어있었다. 대공이 아무렇지도 않게 막대를 침대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올려 그녀의 목 끝까지 꼼꼼히 덮어주었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머리 아래로 그의 팔이 들어왔다.

“늘 오늘처럼만 귀엽게 굴어주신다면 좋을 텐데.”

조금 전까지 화를 내며 몰아붙인 건 전부 거짓말인 것처럼 그가 한껏 다정하게 굴었다. 그래 봤자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격한 정사는 역시 화풀이가 맞았나 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너무 피곤해 비참함을 느낄 새도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공이 아란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아란은 쏟아지는 잠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힘겨운 현실을 뒤로하고 꿈으로 도피하는 건 더없이 달콤한 일이었다. 부디 꿈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기를, 그녀는 간절히 바랐다.

*

침대 아래에 숨겨두었던 목검과 교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시녀를 추궁하지 않아도 누가 없앴는지 알 수 있었다. 아란은 일부러 발을 쿵쿵 울리며 부황의 집무실로 향했다. 두 황자들은 황제를 알현하려면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아란만은 예외였다.

잔뜩 심통이 난 황녀가 나타나자 집무실 문 앞을 지키던 시종들이 바짝 긴장했다. 황궁의 실세는 황제도 황후도 아니라 저 작은 소녀였다.

“열어.”

최근 황제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시종들이 머뭇거렸다. 그러나 황녀가 집무실 문 앞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걸 알면 분명 황제는 크게 화를 낼 것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아란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부황을 보았다. 철없는 그녀는 그 종이 한 장 한 장의 무게를 몰랐다.

피로에 잠겼던 황제의 얼굴이 아란을 보는 순간 환해졌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아비를 보러와 주었느냐, 딸아.”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려 아란을 반겼다. 그러나 아란은 그의 품에 안기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제 목검, 아버지께서 숨기셨죠?”

딸의 질문에 황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타고난 군주인 그는 능청스럽게 표정을 숨기며 되물었다.

“목검? 무슨 목검 말이냐? 네게 목검이 있었느냐?”

“잡아떼지 마세요. 그제 제 방에 오셨을 때 가져가신 거 다 알아요. 제가 잠든 사이에!”

아란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황제는 난감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무릎 위에 올리고 달래주었다.

“울지 마라. 네 생일에 정식으로 검을 가르쳐주기로 하였잖느냐.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제 생일이 되면 또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미루실 거잖아요.”

아란이 황제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왜 저는 아무것도 못 배우게 하세요? 오라버니들은 검도 공부도 다 열심히 배우는데 왜 저만……. 이 황궁에서 제가 제일 바보예요.”

“하하, 이 세상에 너처럼 황제를 쥐락펴락하는 바보가 또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하여라.”

“그건 아버지께서 절 사랑하시기 때문이잖아요. 사랑받는 것과 바보가 아닌 건 전혀 다른 말이에요.”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딸은 철이 없을 뿐, 멍청하지는 않았다.

황위에 오르지 못했으면서 뛰어난 재주를 가진 황족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아는 그는 일부러 황녀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아비의 속을 모르는 황녀는 늘 들어줄 수 없는 것만 바랐다. 차라리 드레스와 보석, 화려한 별장을 원했다면 넘치도록 안겨주었을 것인데.

“네 오라비들은 공부도 검도 배우기 싫어서 늘 꾀를 쓰는데, 너는 반대로 아비의 속을 썩이는구나.”

“속 썩이지 마시고 들어주시면 되잖아요.”

“학문과 검술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 아마 며칠도 못가서 학을 떼고 말 거다.”

“그건 시작하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요. 저도 제 몫을 하고 싶다고요.”

황제가 아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너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네 몫을 충분히 해냈단다. 너의 아비에게, 어미에게, 모든 제국민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았느냐. 네 오라비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참, 그 이야기 들었느냐? 요즘은 집마다 네 초상화를 걸어두는 게 유행이라는구나.”

“……기쁨을 주지 못한다면, 저는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말씀이시네요. 그렇다면 광대와 다를 게 뭐죠?”

이제 궤변으로 황녀를 설득할 수 없는 시기가 왔다는 걸 깨달은 황제는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아란흐로드,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속을 열어 보여주고 싶구나. 내가 네게 권리를 주지 않는 건, 그 뒤에 너무 많은 의무가 따르기 때문이다. 너는 너무 약하고 여려서 그것들을 감당할 수가 없어.”

“…….”

아란은 부황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권리도, 의무도 없이 그저 행복하게만 살아주면 안 되겠느냐?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혹, 나중에 천지가 개벽하여 네가 황제가 된다면, 그때는 아비가 잘못했음을 시인하마.”

훗날, 천지는 개벽하였고 아란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잘못을 시인할 부황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

아란은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광대로 남고 싶었다.

작게 흐느끼는 그녀를 누군가 빈틈없이 안아주었다. 커다란 손이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눈물이 더 났다. 아란은 넓고 아늑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다시 잠에 빠졌고, 꿈은 계속 이어졌다.

*

서툴게 자수를 놓는 아란 앞에 시종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아란이 시종의 얼굴을 보고 낯을 굳혔다.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했잖아, 에녹.”

“시종이 시종의 일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

아름다운 소년이 무감정하게 물었다.

“너는 시종이 아니야. 내 약혼자이지. 누가 감히 너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단 말이야? 누구인지 말하면 호되게 벌을 내릴게.”

“약혼은 이미 깨졌습니다. 제 부모가 저지른 죄 때문이었죠.”

“그런 말 하지 마. 아버지께 부탁드리면 곧 복권될 수 있을 거야.”

대답하는 아란의 목소리는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반역자의 자식을 복권시키실 수는 없습니다. 저를 살려두신 것만으로도 황제 폐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신 겁니다.”

“아버지께선 내 부탁은 다 들어주셔.”

“전하의 부탁이 도를 넘는 순간 폐하께서는 저를 노예로 만들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내치실 겁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더 시키실 일이 없다면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야! 가지 마.”

아란이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고 옆에 있는 의자로 끌어당겼다.

“나가면 또 일해야 하잖아. 힘들 텐데 여기 앉아서 쉬어.”

에녹은 의자에 앉는 대신 황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란이 애써 웃었다. 호의가 그를 더 괴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황녀만 몰랐다.

황궁 사용인들이 에녹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대공가의 후계로서 지녔던 기품과 아름다운 외모는 시종이 된 이후 질시와 더러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동료 시종들은 주인에게 받은 울분을 전부 에녹에게 풀었다. 이제는 그의 신분도 천민이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심지어는 평민 출신 하인들조차 그를 무시했다. 자다가 이유 없이 주먹세례를 받거나, 음식에 쓰레기가 섞여 있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에녹은 충분히 그들을 저지할 힘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 덕에 시종이 된 이후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가끔은 귀부인들이나 급이 높은 시녀들이 그를 유혹하려고도 들었다. 정중하게 거절할 때마다 욕설과 날 선 비난이 날아왔다. 그건 때때로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겼다.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에녹은 빠르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살아남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멍청한 황녀는 공공연히 에녹을 특별대우했고, 그 때문에 에녹이 아무리 노력해도 괴롭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이 굳건해도 에녹 역시 사람이고 어린 나이인지라, 때때로 황녀에게 화가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전하의 약혼자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를 조롱하고 싶으신 겁니까?”

“조롱이라니…….”

그다지 심한 말도 아니지만 한 번도 비난을 들어본 적 없는 아란은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았다. 황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에녹은 비뚤어진 희열을 느꼈다. 그를 괴롭히는 시종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런 뜻이 아니야, 나는 그냥 널 생각해서…….”

“진심으로 저를 생각하신다면 평범한 시종처럼 대해주십시오.”

“에녹.”

“이름으로도 부르지 마십시오. 말단 시종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는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기어이 황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에녹은 그것을 모른 척하며 인사도 하지 않고 황녀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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