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억지라는 걸 그도 알았다. 황제는 목숨의 위협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제 의지로 야합 따위를 할 성격이 결코 못 되었다. 꽉 막히기도 했고, 겁도 많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쉽사리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공작을 올려다보던 아란의 얼굴만 생생히 기억났다. 아니, 다시 떠올려보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황제가 다른 사람 앞에서 표정을 드러냈다는 사실 외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비정상적인 분노지만 이유 같은 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독점욕과 집착, 혹은 그사이의 어느 감정이겠거니 여겼다.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아주 귀한 노리개였고, 남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눈곱만치도 없었다. 연인은 물론 국서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국서라니, 허수아비 황제에게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았다.
대공은 손가락으로 질구를 쓱 문질렀다. 아무리 귀하다 해도 결국 장난감은 장난감일 뿐이다. 내키는 대로 다루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그냥, 그곳에서 하기 싫었을 뿐이야. 그런 건 정말 싫어.”
아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폐하께서 내키는 방식을 말씀해주십시오. 매번 싫다고 하시면서 아래로는 물을 줄줄 흘려대니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
아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방적인 교접만 해보았던 그녀는 자신이 어떤 방식의 관계를 원하는지 몰랐다. 다만 대공처럼 강압적인 방식은 아닌 게 분명했다.
대공이 캐노피를 묶었던 천을 풀어 아란의 눈을 가렸다. 아란이 놀라 천을 풀려 했으나 대공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양팔을 뒤로 잡아챘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은 어떠십니까?”
“뭐, 뭘 하려고……. 얼른 풀어줘.”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렸다. 눈을 가린 천은 꽤 두꺼워서, 아무리 등불을 밝게 켜뒀다 한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눈만 가린 것뿐이니 그렇게 떨지 않아도 됩니다. 들새보다도 겁이 많아서야, 쯧.”
대공이 혀를 차며 그녀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다. 잔뜩 곤두선 신경 때문에 숨결이 솜털을 간질이는 느낌마저 세세하게 느껴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아란은 최대한 숨을 크게 내쉬며 진정하려 했지만, 대공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이 없는 건 늘 마찬가지였지만 눈을 가리니 숨을 쉬는 것 말고는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란은 온 신경을 대공에게 집중했다. 그가 아란의 팔을 구속한 채로 한쪽 팔을 길게 뻗는 게 느껴졌다. 협탁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뭘 꺼내려는 거지?
그게 무엇이든 아란에게 그리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있자 대공이 그녀 위로 몸을 겹쳤다. 무게를 싣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가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눈치채셨겠지요.”
아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신음하고 우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습니다. 참거나 억누르지 마세요.”
“그, 그건…….”
몇 번이나 몸을 섞어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미련하게 버티지만 않으시면 되는걸요.”
그래도 아란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왜, 제게 안겨 신음하시는 게 그렇게 수치스러우십니까?”
“남들이 들으면…….”
“그래 봤자 고작 시녀들이 아닙니까.”
대공의 말대로 아란은 수치스러웠다. 대공에게 안기는 것도, 그의 손길에 쾌락을 느끼는 것도, 결국 그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도.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눈을 가려드렸으니 제가 아니라 공작에게 안기고 있다고 상상하셔도 좋겠군요. 아니, 아예 그를 이 자리에 초대하여 함께 즐기는 건 어떻습니까? 타인의 손을 탄 물건은 질색이지만, 폐하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돼, 그러지 마. 시키는 대로 할게…….”
정말로 그가 공작을 부르겠다고 통보한 것처럼 아란이 울먹였다. 그라면 정말로 공작을 부를지도 몰랐다.
“착하십니다.”
대공이 칭찬하듯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아래로 손을 뻗어 부풀어 오른 음핵을 만졌다.
“아…….”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려던 아란이 뒤늦게 몸을 잘게 떨며 신음했다. 절정 직전까지 갔던 터라 다시 달아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흐응, 앗……!”
눈을 가려서일까, 아니면 신음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몸이 더 뜨거웠다. 이제 음핵을 문지르는 손길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더 큰 자극이 필요했다. 흥건히 젖은 아래부터 시작된 간지러움이 온몸에 번졌다.
“아……. 이제 그만…….”
아란은 뜻 모를 애원을 중얼거리며 헐떡였다. 그러나 대공은 못 알아들었는지 손가락 하나 넣지 않고 클리토리스만 문질러댔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절정에 이를 것 같으면 애무를 멈추고, 식을 것 같으면 다시 건드리는 식이었다.
결국 아란이 참지 못하고 뒷머리를 그의 어깨에 비볐다. 분명히 그 역시 단단히 일어선 것이 느껴지는데도 여유롭기만 했다.
“제 걸 넣고 싶다고 말씀해 보세요.”
아란은 차마 긍정하지 못했다. 직접 표현하기에는 아직 한 가닥 자존심이 남아있었다. 곧 꺾일 걸 알면서도 자존심이라는 건 쉽게 놓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대공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손뿐만 아니라 등을 감싼 온기 역시 사라졌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눈을 가린 천이 조금씩 흘러나온 눈물에 젖고 있었다. 아란은 떨리는 손을 들어 천을 벗어버리려 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으실 텐데.”
대공의 목소리에서 아란은 그가 꽤 먼 거리에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보지 말라고 가린 겁니다.”
그 후로도 대공이 움직이는 기척은 없었다. 아란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엉거주춤 다가갔다. 이 상황을 끝내는 건 오로지 대공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손으로 바닥을 짚다 보니 거의 기어 다니는 것과 다름없는 자세였다. 자존심을 세운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후엔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번번이 같은 실수를 했다.
아무리 가도 그를 찾지 못하자 마음이 급해진 아란이 크게 팔을 뻗었다. 그녀는 자신이 침대 끝에 다다랐다는 걸 몰랐다.
“어……?”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바닥을 구르기 전, 서둘러 다가온 대공이 아란을 붙잡았다. 아란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단단히 받쳤다. 그의 손길이 이토록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그가 안전하게 그녀를 침대 위로 되돌려 놓았다.
“나의 주군께서는 워낙 수줍음이 많으시니 이쯤에서 봐 드리도록 하지요.”
다행이다. 이제 이 해갈되지 못한 쾌락도, 이 난처한 상황도 곧 끝이 날 것이다.
“솔직히, 폐하께서 이렇게 저를 애타게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비 맞은 강아지 같은 꼴이 제법 귀엽더군요. 아란의 다리를 벌리며 대공이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곧 굵고 뭉툭한 것이 입구를 느리게 문질렀다. 낯선 감촉에 아란이 몸을 굳혔다. 내부를 빠듯하게 채울 듯한 크기는 익숙했지만, 생물이라면 당연하게 품고 있어야 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대공의 성기가 아니라는 건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하으읏!”
경악한 아란이 거부하려 했을 때 그것이 안으로 천천히 밀려들었다. 재질을 알 수는 없지만 내부가 뜨거워서인지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그게 억지로 살을 여는 느낌에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힘을 빼세요. 다치실까 염려됩니다.”
달래듯 상냥한 어조였지만 그게 더 아란을 겁먹게 했다.
“이건, 대체……! 아, 그만둬……. 제발!”
“거의 다 들어갔습니다.”
거부하는 아란의 다리를 벌린 그가 그것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핫, 아앗!”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와 감촉이 주는 이질감에 저절로 높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제 것을 원치 않으시는 듯하기에 색다른 것으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분명 침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빈손이었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협탁에 있었던 물건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협탁 어디에 이런 것이 들어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때그때 달라지긴 하지만 그녀가 협탁에 넣어두는 것은 몇 가지 상비약과 일기장, 간단한 필기구 정도가 다였다. 그나마 정무가 끝나 침실로 돌아오면 대공에게 안기느라, 혹은 잠옷으로 갈아입기 무섭게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요사이엔 협탁을 여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런 물건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 열어 내다 버릴 것을……!
“하, 아앗……! 안 돼…….”
대공에게 처음 범해졌을 때만큼 충격적이었다. 아란은 한 번도 제 아래에 사람이 아닌 것이 박힐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길을 들이듯 처음엔 느리게 쑤시던 것이 갑자기 속도를 내며 푹푹 깊이 처박혔다. 연약한 살을 가르고 박혀오는 느낌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아란은 희미하게 느껴지던 둔통조차 잊고 참을 수 없는 교성을 내질렀다.
“아흑, 흐으으응……!”
울음과 신음이 뒤섞여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참으라 해도 도저히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잔뜩 달아올랐던 터라 그것이 몇 번 내부를 출입한 것만으로도 가버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오래 참아서인지 절정의 여파도 길었다. 내벽이 힘껏 수축했다가 이완되기를 반복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몸이 덜덜 떨렸다. 대공은 오래도록 잘게 떨리는 몸을 바라보다 상아로 만든 모조 성기를 뽑아냈다.
“흐읏.”
그새 제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달궈진 모조 성기가 뽑히는 느낌마저도 자극적이었다. 아란은 모로 누워 얼굴을 가렸다. 대공이 이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대로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아로 만든 좆 따위에 그리 발정하시는 걸 보니 약간 질투가 나려고 하는데.”
“상아……?”
어렴풋이 짐작은 했으나 대공의 입으로 들으니 더 충격적이었다. 쾌락의 여운이 전부 끝나자 찾아온 건 고작 모조 성기에 쑤셔지며 쾌락을 느꼈다는 자괴감이었다.
“저 외에 다른 좆에 뚫리신 건 처음이셨을 테니 더욱 각별하셨겠지요.”
“그건……!”
“제 것과 비교해 보시고 감상을 말씀해주십시오.”
대공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