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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16화 (16/146)

16화

아란은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다 씁쓸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나는 혁명가가 되는 게 나을뻔했구나. 적어도 다른 이의 거름이 될 수 있었을 테니.”

그녀의 말에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저 대단한 로아크 대공을 수족처럼 부리지 않으십니까. 대공의 충심이 굳건한 이상 폐하께서 이루지 못할 건 없으실 겁니다.”

황제는 지나치게 본인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공작이 보기엔 그녀는 상당히 판단력이 좋고 이성적인 편이었다. 지나치게 이상이 높은 건 문제였지만 말이다. 공사의 구분이 뚜렷하여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망치는 법도 없었다. 정상적으로 즉위했다면 분명 현군이 되었을 재목이었다.

한순간 황제가 비틀거렸다. 다행히도 공작이 단단히 그녀의 등을 받쳐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손바닥 아래로 마른 등과 허리가 고스란히 느껴져 공작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다시 중심을 잡은 아란이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의 권위가 내 권위는 아니지 않은가.”

대공과 관련된 일엔 늘 그랬듯 예민한 반응이었다.

“폐하께선, 대공이 껄끄러우십니까?”

공작은 슬쩍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는 황제가 대공을 국서로 맞이한다고 선언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대공이 전대 황제와 황자를 잔인하게 죽이긴 했지만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부모를 죽인 원수와도 한 이불을 덮는 일이 허다했다.

결과만 놓고 따진다면, 아란이 대공을 시켜 경쟁자를 제거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랐다 한들, 뼛속까지 황족인 그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물며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 하나뿐인 여동생을 늙은 맥스웰 후작에게 팔아버리려 했던 형제들이었다.

맥스웰 후작은 굉장히 부유했지만 네 번이나 아내를 갈아치웠던 호색한에 손버릇까지 안 좋았다. 그가 아란이었다면 대공이 나서기 전에 형제들을 암살해 버렸을 것이다.

황제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방금 질문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소.”

집무실에서 보았을 때처럼 짙은 피로가 작은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의 기분이 상했음을 깨달은 공작이 사과하려 했을 때, 아란이 그의 손을 놓았다. 동시에 음악이 끝났다. 공작은 한 번 더 그녀에게 춤을 신청했지만 아란이 세 번째 춤을 추는 일은 없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아란은 얼음을 넣은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그녀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공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적절치 못하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면, 아니, 그 이름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표정이 경직되고 몸이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잔을 내려놓은 아란은 조용히 일어나 인적 드문 정원으로 향했다.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대공은 아직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그녀가 자리를 비웠는지 돌아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눈치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정원을 선택한 건 그리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란보다 일찍 자리를 선점한 연인들이 나무와 꽃 사이에 숨어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가 늘어놓는 구애의 말과 여자의 신음이 뒤섞여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녀를 뒤따라온 시종장 역시 당황했다. 그는 황제가 왔다는 걸 알려 반쯤 벌거벗은 연인들을 쫓아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외면해야 할지 헷갈리고 있었다.

아란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어 시종장에게 조용히 하란 뜻을 내비치고, 그들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기 전에 서둘러 몸을 돌렸다. 흥분에 찬 여자의 교성을 듣는 것보단 연회장으로 돌아가 덩그러니 앉아있는 편이 백 배는 나을 것 같았다. 밤눈이 어두운 아란은 시종장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다.

연회장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팔이 뻗어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그녀의 입술 위를 뜨거운 것이 뒤덮었다.

“으읍……!!”

그것이 사내의 입술이라는 걸 깨달은 아란이 경악하며 발버둥 쳤다. 곧바로 시종장을 부르려 했지만, 입 안을 휘젓는 혀 때문에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구석진 곳으로 끌려갔다. 자유로운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얼굴을 할퀴려 들자 상대가 강하게 껴안아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가슴이 짓눌리며 숨이 막혔다. 아란이 본능적으로 입을 더 크게 벌리자 사내가 혀를 더 깊이 넣으며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다. 어느새 그녀는 풀밭 위에 누워있었다.

사내는 아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체중으로 그녀의 팔다리를 눌렀다. 드레스가 허리까지 말려 올라가 드러난 다리와 배에 서늘한 바람이 닿았다.

감히 어떤 자가 황제를……?

두려움보다도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분노로는 이 사내를 막을 수 없었다.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호위를 데려오지 않은 것이 뒤늦게 후회되었다.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서 이런 봉변을 당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지척에서 그녀를 찾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기척을 내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거리였다. 아란은 어떻게 해서든 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입술이 막혀 밀회를 즐기는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음만 나왔다. 그 소리를 오해한 시종장은 황망히 다리를 놀려 멀어졌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비로소 사내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란은 어둠에 가려진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사내의 얼굴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허벅지 사이로 사내의 손이 들어왔다. 아란은 이를 악물며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그를 꾸짖었다.

“어둠을 틈타 여자를 억압하려 들다니, 그대는 명예도 모르는 자인가?”

협박이 통했는지 연한 피부를 더듬던 손이 멈추었다. 아란은 속으로 안도하며 그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비웃듯 더 깊은 곳을 파고들며 속옷을 옆으로 젖히곤 갈라진 틈을 매만졌다. 아란이 날카롭게 숨을 삼키며 그의 손을 잡았다.

“뭐 하는……!”

남자가 그녀의 반항을 무시하고 손가락을 뻗어 클리토리스를 건드렸다. 느리고 기계적인 손길이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러는 것이냐? 멈추지 않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될 거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님을 안 아란이 힘껏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 순간 다시 입술이 막히며 질 안으로 손가락이 쑥 들어왔다.

“읏……!”

메마른 곳에 갑자기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사내는 다소 거칠게 구멍을 들쑤셨다. 아픔과 수치로 눈물이 흘렀다.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여 사내에게 즐거움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저절로 몸이 말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파하는 걸 눈치챘는지 사내가 클리토리스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거칠던 손길 역시 부드러워졌다. 공교롭게도 그는 아란이 느끼는 곳만 골라 건드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가 좋아하는 지점을 찔렀을 때, 아란은 하마터면 달뜬 신음을 흘릴 뻔했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지자 덜컥 겁이 났다. 억지로 쾌락을 끌어내는 사내의 손과 착실히 반응하는 제 몸이 끔찍했다.

아주 잠시 사내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란이 뒤늦게 신분을 밝혔다.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네가 제정신이라면 감히, 읏, 황제를 욕보일 생각은, 못할 것이다.”

“저는 제정신이 아니기에 늘 폐하를 욕보이고 싶습니다.”

묵묵부답이던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란은 단박에 그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대공?”

잔뜩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안도와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모르는 이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그에겐 그녀의 권위가 통하지 않았기에 두려웠다.

“다른 사내이길 바라셨습니까?”

질 안에 박힌 손가락이 예민한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무슨, 흣, 이러지 마…….”

모르는 사내를 꾸짖을 때와 다른, 솔직한 두려움이 담긴 애원이 튀어나왔다.

“이런 걸 기대하고 여기까지 나오신 게 아닙니까? 부끄러움도 모르고 밤을 장막 삼아 야합하는 저 무리처럼 말입니다.”

“절대, 아니야. 그냥 산책하고, 앗, 싶었을 뿐이었어.”

“공작을 기다리셨던 게 아니고요?”

누구를 기다린다고? 아란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

“살금살금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꼭 그와의 야합이라도 기대하시는 듯하시기에.”

“뭐?”

아란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동안 들었던 어떤 음탕한 말보다도 충격적이었다.

“안타깝게도 공작은 바쁜 듯하여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레이디를 홀로 두는 건 남자의 예의가 아니니.”

대공이 다시 한번 거칠게 아란의 입술을 물었다. 드레스 안에 갇힌 가슴이 아프게 잡혔다.

“그, 만……!”

“황제와 야합하는 건 색다른 기분일 테죠.”

“그, 그러지 마.”

애원하는 입술과 달리 아란의 아래는 착실히 젖어 대공의 손가락을 반겼다.

“아흐…….”

대공의 어깨를 밀어내던 손은 어느새 그의 옷깃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대공은 서두르지 않고 아란의 허벅지 위로 단단하게 일어선 것을 문질렀다.

정말로 여기서 할 생각인 걸까?

아까 들었던 밀애의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나무와 어둠에 가렸어도 그들이 짐승처럼 접붙는 중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말처럼 그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공은 그녀를 그들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이 흙바닥 위에서.

갑자기 속이 거북해졌다. 아까 몇 모금 마신 술에 텅 빈 위벽이 녹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몸이 식었다. 아란은 힘껏 대공을 밀어내며 그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대공이 아래에서 손을 빼고 얽힌 혀를 풀어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겨우 얼굴만 옆으로 돌려 속에 든 것을 토해냈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와인이 섞인 위액이 흘러나왔다. 상황을 눈치챈 대공이 서둘러 그녀를 엎드려 세웠다. 위액을 다 토하고도 아란은 몇 번이나 헛구역질했다.

마침내 구역질이 잦아들자 대공이 얼굴과 입술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안아 들고 걸음을 욺겼다. 토하고 나자 속은 금방 진정되었으나 힘이 빠진 바람에 아란은 그의 품에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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