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연주가 재개되고, 홀에서는 젊은 연인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들 몇 명이 대공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개중엔 아란보다 어린 소녀도 있었다.
“대공께서는 더 춤을 추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 한 명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술이 과해 춤을 추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가 빈 와인잔을 내보이며 여자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지만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으신걸요.”
“황제 폐하 앞에서 취한 기색을 내보일 수야 없지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엔 제가 먼저 춤을 신청하겠습니다.”
그들은 아쉬워했지만 대공의 정중한 태도 덕분에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아란은 그에게 거절당할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의 아름답고 정중한 겉모습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들을 빤히 응시하는 아란을 보고 대공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란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대공이 다시 한번 물었다.
“제가 저들과 춤을 추길 바라십니까?”
아란은 당황하여 눈을 깜박였다. 다행히 연회장이 소란스러워 사람들은 그의 질문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건 짐이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대공이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예전엔 제가 여자들과 말을 섞는 것도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과거 아란은 에녹이 다른 여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시선을 맞추는 것만 봐도 불같은 질투에 휩싸였다. 그런 모습을 본 날은 잠도 안 오고 음식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내색은 못 했다. 에녹은 성가신 걸 가장 싫어했다. 그는 늘 깍듯하게 아란을 대했지만, 때때로 붉은 눈동자에 미처 숨기지 못한 짜증이 묻어날 때면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가 뭘까.
“그때는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으니까. 늦었지만 사과하네.”
“사과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딘지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대공이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시종이 빈 잔에 다시 와인을 채웠다.
아란은 그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상황이 달라졌어도 과거나 지금이나 그의 속내를 모르는 건 똑같았다. 그리고 물어볼 용기가 없는 것도. 이럴 때 아란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아란의 시선이 대공의 얼굴에서 목과 어깨를 지나 술잔을 든 그의 왼손에 닿았다. 약지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국서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그의 빈 손가락이 신경 쓰였다.
황족과 마찬가지로, 고위 귀족들은 일찍 혼인하는 편이었다. 아란은 왜 아직 그가 짝을 고르지 않은 건지 조금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한다는 말 역시 듣지 못했다.
로아크 대공가는 손이 귀하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선대 대공과 대공비의 사이가 그리 좋았는데도 자식이라곤 에녹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선대 대공 부처는 그가 몸이 약한 아란과 혼인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했다.
이제 아란은 그의 약혼자가 아니니 그는 언제든지 건강한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내를 대하는 대공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내에게도 나를 대할 때처럼 고압적일까, 아니면 조금 전 여자들에게 그렇듯 다정하게 굴까. 아내가 생기면 나를 더 찾지 않겠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아란의 시선을 느낀 대공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대는 어째서 혼…….”
무심코 왜 혼인을 하지 않느냐 물으려던 아란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대공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수없이 밤을 함께 보냈지만, 사적인 일을 공유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하기야, 지금 내가 그의 혼인을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아란은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말라빠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녀는 후사를 이어야 했다. 그건 아란에게 제일 자신 없는 일이었다. 월경은 끊긴 지 오래인 데다 약해 빠진 몸으로 임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오늘 로아크 대공과 헤스턴 공작의 언쟁은 작은 소동으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후계와 혼인에 대한 압박이 이어질 것이다. 안 그래도 무능한 황제가 후사까지 이을 수 없다는 걸 알게되면 그녀의 입지는 지금보다 더 작아질 게 분명했다. 아란은 우습게도, 동화처럼 새가 아이를 물어다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아란은 그 생각을 취소했다. 기적처럼 아이가 생겨도 그녀는 아이를 위한 기반을 만들어줄 수 없었다. 아이가 그녀를 닮아 몸도 마음도 약하다면 더 곤란했다. 아란은 제 아이가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랐다.
황제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귀족들은 그녀를 무시한 채 대공에게 아첨을 늘어놓느라 정신없었다. 황제의 즉위를 기념하는 자리라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무례였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만큼 황제와 대공 사이의 권력은 기울어져 있었다.
“무료해 보이십니다.”
아란은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 말이 자신에게 건네진 줄도 몰랐다.
“폐하?”
거듭 묻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말을 건 사람은 사일러스 공작이었다. 아란은 조금 안도했다. 그 역시 껄끄럽긴 마찬가지지만 그나마 다른 귀족들보단 가식이 없어 대하기 편했다.
“미안하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일인가.”
“즉위 1주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아란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사일러스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로아크 대공을 바라보던 여자들의 시선이 이번엔 그를 향했다. 로아크 대공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지만 그 역시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남자답게 선이 굵은 대공에 비해 공작은 더 섬세하고 학구적인 느낌이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벌써 1년이나 지났다니 말입니다.”
“그런가.”
아란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지난 1년이 살아온 모든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고작 1년 만에 이렇게 지쳤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나날을 보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저번부터 느낀 건데, 이제는 연회를 그리 즐기지 않으시나 봅니다.”
“그럴 리가. 짐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리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기쁘기 그지없네.”
“하기야, 사람이 많으면 흥이 나긴 하지요.”
공작은 아란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 아까 하지 못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입술을 떼었다.
“공, 비에른 후작일은―”
“그리 무료한 얼굴로 계시지 마시고, 한 번 더 춤을 추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란보다 공작이 조금 앞서 말했다. 예의상 건넨 권유라고 여긴 아란은 무심코 대답했다.
“글쎄. 마땅한 파트너가 있을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대가 짐의 파트너가 되어 주겠다고?”
아란은 조금 놀랐다. 공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옆자리에 앉은 대공을 돌아보았다. 대공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아란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두 사람은 연인도, 약혼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가 어느 여자와 춤을 추어도 아란이 상관할 일이 아닌 것처럼, 반대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란은 잠시 망설이다 공작의 제안을 수락했다. 마침 대공의 들러리처럼 앉아있는 것도 난감하던 참이었다.
“그럼 잠시 부탁하기로 할까.”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공작이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홀 중앙으로 나갈 때까지 대공은 한 번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란은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공작의 리드를 따라 움직였다.
공작은 상당히 사려 깊은 상대여서, 어색해하던 아란도 점차 마음을 놓았다. 대공과 춤을 추었을 때처럼 짓누르는 듯한 긴장감이 없으니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땐 고마웠네. 비에른 후작을 상대하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게다가 그대 역시 추징금을 물게 되었으니.”
“폐하께 인사를 들을 만큼 대수로운 일을 한 건 아닙니다. 후작을 설득한 건 결국 로아크 대공이셨으니까요.”
“그래도, 공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짐은 그들에게 맞설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거야.”
대공의 뺨을 때렸던 날, 아란은 그대로 모든 것을 팽개치고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도와주겠다던 공작의 말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그녀는 그에게 지나치게 예민했고 날카롭게 굴었다. 자책하느라 조금 시무룩해진 아란을 공작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고 반듯한 이마가 예뻤다.
“가끔은 궁금합니다.”
“무엇이?”
“폐하의 속내 말입니다. 일부러 어려운 길을 선택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지요.”
공작이 말했다. 아란이 쓰게 웃었다.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만 짐에게 쉬운 선택지가 없을 뿐.”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것 역시 또 다른 선택지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선택이 아니라 외면이고 방관일세. 귀족들의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로 황제가 제국민을 외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
대답하는 아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또렷하고 강경했다.
“짐이 무능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마저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최소한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국민들의 고혈을 쥐어짜게 될 거야.”
무능한 황제라 하여 의무조차 잊은 건 아니다.
공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비웃고 있을 거라고, 아란은 생각했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만약 황위에 오르지 않으셨다면 폐하께선 혁명가가 되셨을 것 같습니다.”
의외의 말이었다. 아란이 고개를 들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동자는 맑은 날의 하늘처럼 아주 새파란 빛깔이었다.
“황제와 혁명가라니, 너무 극단적인 말이 아닌가. 그리고 짐처럼 무능한 사람이 혁명을 일으킨다면 분명 얼마 가지 않아 실패하고 말 거야.”
공작이 웃는 얼굴 그대로 대답했다.
“확실히 폐하께선 절대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아란은 한순간 공작이 자신을 놀리는 건지 고민하느라 그의 무엄함을 꾸짖을 때를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더 용기 있는 자에게 영감이 되는 분이셨을 겁니다.”
“……지금 짐을 조롱하는 것인가.”
“조롱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