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4화 (14/146)

14화

대공이 자연스레 그녀를 홀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악사들이 우아한 무곡을 연주했다. 그에 맞춰 춤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폐하를 마주하니 폐하의 데뷔탕트 볼이 생각나는군요. 그날도 폐하께선 저와 첫 춤을 추셨죠.”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듯 대공이 웃었다. 아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 역시 데뷔탕트 무도회를 똑똑히 기억했다.

열네 살의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준비한 흰 드레스를 입고 약혼자인 에녹의 손을 꼭 잡은 채 마냥 행복에 겨워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자신과 약혼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린 연인이 춤을 마쳤을 때, 갑자기 연회장에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자가 부황에게 무어라 고했고, 부황은 아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얼굴로 로아크 대공 부부를 끌어내라 명령했다.

전대 로아크 대공은 이름난 무인이었지만 무기도 없이 완전히 무장한 병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언제나 우아하던 대공비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아들인 에녹 역시 병사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멈추지 못해!’

아란은 병사들을 말리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버지!’

아란은 제 아비가 명을 거두어줄 거란 기대를 품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잠시 딸을 응시하던 그는, 곧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녀를 침실로 데려다주어라.’

‘잠시만요, 아버지! 안 돼, 에녹……!’

한 병사가 그녀를 들쳐 안았다. 아란은 씨근덕거리며 에녹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전하.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은 에녹이 아란에게 한 첫 번째 거짓말이 되었다. 대공부부는 그 다음 날 아침 처형되었고, 에녹의 사형집행일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충격받은 아란이 식음을 전폐한 채 앓아눕자, 황제는 별수 없이 에녹의 신분을 천민으로 강등하는 것으로 처벌을 그치는 자비를 보였다.

옛 기억을 떠올린 아란이 몸을 떨었다. 몇 번이나 실수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대공이 능숙하게 그녀의 실수를 감춰주었다.

분명 그날은 대공에게 더 끔찍한 기억일 텐데, 겁먹고 떠는 쪽은 아란이었다. 그게 우스운지 대공이 조소를 흘렸다.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내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왜 그리 떠십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폐하를 범하기라도 할까 봐서요.”

아란은 그를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춤이 끝났는지 모르겠다. 단 몇 분 만에 피로가 극심해졌다. 아란은 넋을 놓은 사람처럼 멍하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공은 그녀의 옆자리까지 따라와 시중을 들었다.

“폐하께서 춤추시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요. 실력이 조금도 녹슬지 않았습니다.”

아란은 제게 말을 건넨 초로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헤스턴 공작이 그녀 옆에 앉아있었다. 저번 회의에서 그녀에게 격렬히 항의했던 건 잊어버렸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대공의 춤도 훌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공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헤스턴 공작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대공이 아닌 황제였다. 표정을 정리한 그가 다시 아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파트너가 국서였다면 더 보기 좋았을 것을요.”

“무슨 소릴.”

뜬금없는 말에 아란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헤스턴 공작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폐하의 보령이 벌써 스무 해를 넘겼는데, 아직 국서가 없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나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네.”

아란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지금 그녀는 제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벅찼다.

그 말에 헤스턴 공작이 혀를 찼다.

“허어. 안 될 말입니다, 폐하. 후계를 든든히 세워두는 것이야말로 폐하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후계.

아란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그 의무를 다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마지막 월경을 하고 해를 넘겼다. 원래도 주기가 불규칙적이었지만 황위에 오른 이후엔 아예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공작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그저 난처해할 뿐이었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국서를 들이시어 후계를 보신다면 폐하의 위엄이 한층 드높아질 것입니다.”

“국혼은 쉬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허나 공의 충심을 보아 내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네.”

“아직은 폐하의 나이가 젊으시지만 한 해 두 해 미루다 보면 시기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선 사내가 아니시니 후계를 볼 수 있는 시간 역시 짧습니다.”

공작의 말이 길어질수록 아란은 난처해졌다.

제 의견이 통했다고 생각한 공작이 뭐라 더 말하려 했을 때, 가만히 듣고 있던 대공이 끼어들었다.

“폐하께서 아직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까. 공의 말대로 폐하의 보령이 젊으시니 몇 년 더 두고 보아도 늦지 않습니다.”

“민망한 말이지만, 지금 폐하께선 아이 둘을 낳아도 전혀 이상한 나이가 아니십니다. 후계 문제는 마냥 감싼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대공께서 정녕 폐하를 위하신다면 진작 국서 후보를 찾아보셨어야지요.”

헤스턴 공작이 내심 불편한 심기를 흘렸다. 그는 대공이 영 마뜩잖았다. 얼마 전 감사 건으로 찾아와 공작가를 들쑤신 것도 괘씸했지만 황제를 독점하려 드는 꼴 역시 배알이 뒤틀렸다.

아직도 제가 황제의 약혼자인 줄로 착각하나 보지.

황제가 혼인을 하지 않은 건 대공의 탓이 8할이라고 공작은 생각했다. 황제와 대공 모두 한창나이인 데다 미혼이니 두 사람이 아직도 과거의 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냥 황제를 싸고도는 대공의 태도 역시 그 소문을 부추겼다.

그러나 가까이서 두 사람을 지켜본 사람들은 전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는 대공에게 냉랭했으며, 대공 역시 황제에게 연심을 품었다기엔 하는 행동이 담백했다.

어째서 대공이 황제에게 붙어 충견 노릇을 자처하는지 헤스턴 공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황제는 대공에게 던져줄 변변한 뼈다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대공이 공작의 계획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공작은 제 아들을 국서 자리에 앉히고 싶은 야심이 있었다. 허약하고 유순한 황제는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끔 맹랑한 짓을 할 때가 있지만, 아들이 국서가 되기만 하면 그런 건 문제도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대공께선 지금이라도 국서 후보들을 추리심이 어떻습니까.”

“주제넘은 말은 그만두십시오, 공작.”

대공이 차갑게 내뱉었다. 무안을 당한 헤스턴 공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라고요?”

“폐하를 보아 적당히 넘어가려 했는데 정도를 모르시는군요. 폐하께선 저와 공의 주인이십니다. 헤스턴 소공자의 자식을 낳을 씨암말이 아니라.”

주변 공기가 싸늘히 가라앉았다. 난폭하고 노골적인 비유에 아란 또한 할 말을 잊었다. 둘만 있을 땐 온갖 저질스러운 말을 쏟아내도 공식적인 자리에선 늘 귀족다운 언행을 고수하던 그였다. 헤스턴 공작의 얼굴은 이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대공이야말로 무례하지 않습니까! 나이 찬 주군께 배우자를 맞이하라는 충언을 그리 매도하다니! 어떻게 그런 천박한 표현을…….”

“공의 속이 훤히 보이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공은 조소를 숨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폐하께선 사내가 아닌 여성이시니, 국서가 없어도 충분히 후계를 낳으실 수 있습니다.”

“뭐, 뭐라고?”

“대공……!”

놀란 아란이 저도 모르게 대공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거리끼는 기색이 없었다. 헤스턴 공작이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

“대공께선 지금 사생아를 차기 황위에 올리자 주장하시는 겁니까? 육백 년 황가의 정통성을 이런 식으로 무시하시는 걸 보니 혹 다른 마음을 품고 계신 게 아닌지 의심되는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사생아든 아니든, 아비의 신분이 높든 비천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황제의 태에서 태어난 자식보다 더 정통성을 갖춘 후계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헤스턴 공작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는 열심히 반박할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황제가 직접 낳은 후계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면 그건 황실을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두 사람 다 그만하시오!”

아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의 언쟁에 끼어들었다. 대공을 제외하면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는 이런 화제가 곤혹스럽고 낯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짐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국사를 돌보기에도 버거우니, 국서나 후계 문제는 치세가 안정된 이후에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소.”

“죄송합니다.”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헤스턴 공작도 마지못해 사과했다.

“저 역시 너무 경솔하였습니다. 하지만 결코 다른 속셈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겠소.”

그 말을 믿진 않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마무리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아란은 공작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공작이 아란 몰래 이를 악물고 대공을 노려보았다. 후계 이야기를 했을 때 분명 황제는 망설였다. 조금 밀어붙이면 제 아들과 만남을 성사시켰을지도 모른다. 대공이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황제 앞에서 이 일로 언성을 높이고 말았으니, 황제가 또다시 그의 말을 들어줄 거란 보장도 사라졌다.

대공은 저를 노려보는 헤스턴 공작을 무시한 채 아란이 마시다 만 와인잔을 들어 맛을 보았다. 흠잡을 곳 없는 최상급 와인임에도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란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충심이 과해 일어난 일이니 마음 쓸 것 없소. 기쁜 날이니 모쪼록 즐기다 가길 바라오.”

그녀의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대공이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대공의 곁으로 다가왔다. 헤스턴 공작은 떫은 얼굴로 황제와 대공을 노려보다 어디론가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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