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얼마나 지났을까.
아란은 퍼뜩 눈을 떴다. 얼마나 잤는지 그새 물이 식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뒤늦게 그녀는 뜨거운 체온이 뒤에서부터 자신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의 입을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막았다.
“접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아란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대공이 빙그레 웃었다.
아란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조만간 그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적인 공간에서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침실로도 모자라 욕실까지 들어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그녀는 놀란 기색을 숨기며 말을 걸었다.
“얼마 안 됐습니다. 곤히 잠들어 계시기에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랬나…….”
아란은 느리게 대답하며 자연스러운 척 제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남자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겨우 그의 팔을 떼어냈을 때, 그가 그녀를 끌어당겨 배와 허리, 허벅지를 매만졌다.
“며칠 사이에 살이 찌셨군요.”
“으응……?”
“제가 없는 동안 편히 지내셨나 봅니다.”
허리를 배회하던 대공의 손이 올라와 물속에서 부드럽게 출렁이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도 커진 것 같고.”
웃음 섞인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귓바퀴를 깨물었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뾰족한 감각에 겁을 먹은 아란이 몸을 굳혔다.
“그동안 무얼 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까.”
어딘지 서운함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어떻게 지냈어?”
아란이 마지못해 물었다. 뱀처럼 서로 얽힌 다리와 맨몸을 어루만지는 손이 몹시 곤혹스러웠지만 참기로 했다. 대낮에, 집무실만 아니라면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비에른 후작령에 갔습니다.”
“비에른 후작령?”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아란이 놀라 되물었다.
“예.”
“거긴 왜, 흣……!”
유려하지만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유두를 굴렸다. 집요하게 건드리자 말캉하던 유두가 단단히 굳어지며 도드라졌다.
“평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따끔히 충고를 해두었습니다.”
비에른 후작을 어려워했던 건 사실이지만 내색한 적은 없었는데, 그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공이 대답했다.
“그를 볼 때마다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리셨죠.”
“그건, 후작은 너무 안하무인이라, 하앗……!”
갑자기 허벅지 사이로 손이 파고들더니 예고도 없이 몸 안으로 손가락이 침입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란은 숨을 삼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여기서…….”
울상이 된 아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욕망으로 달아오른 대공의 눈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뺨을 때리십시오. 그 정도는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으니.”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애액 대신 물이 침입을 용이하게 도왔다. 뜨거운 기둥이 명백한 의도를 담고 엉덩이와 허벅지를 찔렀다. 아란은 기겁하여 몸을 떨었다.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관계가 있을 것은 각오했지만 설마 욕실에서 하려 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깊이 박힌 손가락이 그녀의 성감대를 성급히 눌렀다.
“흑…….”
신음을 흘리자 대공이 가슴을 우악스럽게 쥐며 목덜미와 어깨를 세게 빨았다. 시간을 들여 그녀가 달아오를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던 평소와 달리 성급한 움직임이었다. 아란이 미처 준비되기도 전에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성기가 박혔다.
“자, 잠깐…… 아흑……!”
발버둥 치자 무릎 아래로 손이 들어와 다리를 더 활짝 벌렸다. 물과 함께 뜨겁고 굵은 기둥이 꾸역꾸역 안으로 밀려들었다. 아란은 압박감에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오랜만의 삽입이라 더욱 힘겨웠다.
“앗, 아, 아파……!”
아란이 고통을 호소했으나 대공은 막무가내였다. 마침내 성기가 끝까지 박혔다.
“하아……. 좋아.”
귓가에 만족스러운 남자의 한숨이 울렸다. 그러더니 곧바로 허리를 세차게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내부에서 물이 찰박거렸다.
“안 돼, 아직…… 흣, 움직이지 마!”
“조금만 참으세요.”
그의 목소리에선 조금의 여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싫…….”
아란은 힘껏 몸을 틀었지만 물속에서 저항하는 건 쉽지 않았다. 반면 대공은 쉬이 그녀를 다루었다.
그가 아란의 몸을 들었다가 제 성기 위로 내리꽂았다. 물 속이라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성기가 깊이 찔러오자 아란은 놀라 제 몸을 파고든 것을 꽉 조였다. 그러자 대공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더니 더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흑!”
자지러지는 신음이 욕실을 울렸다. 자꾸만 밀려드는 뜨거운 성기와 식은 물 때문에 아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몸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응, 하앗, 아앙……!”
아란이 비음 섞인 교성을 내뱉기 시작하자 대공이 뒤에서 박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몸을 돌려 서로 마주 보도록 앉혔다. 아란이 가쁜 숨을 흘리며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이 가볍게 허리를 움직이자 그녀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아래를 움찔거렸다. 그의 성기를 감싼 내벽이 조금 전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내부에서 찰박거리는 액체 역시 점점 끈적해지고 있었다. 몽롱하게 풀어진 눈매와 벌려진 입술이 색정적이었다.
젖은 머리채를 휘어잡자 머리가 젖혀지며 긴 목선과 물이 고인 쇄골이 더 잘 보였다. 대공은 걸신들린 듯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다시 추삽질을 시작하자 그에 맞춰 가슴이 흔들렸다.
“아읏, 흐응……!”
아란이 절박하게 팔을 뻗어 대공의 목에 매달렸다. 평소라면 관계 중에도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으나 손에 걸리는 것이 물과 그의 몸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갈 곳을 잃은 다리 역시 어느새 그의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느끼는 곳을 연달아 긁자 다리에 힘이 들어가며 그의 것을 더 깊게 끌어당겼다. 대공은 곧 그녀가 절정에 도달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흐으읏……!”
아란이 대공의 어깨에 이를 세우며 신음했다. 동시에 대공도 그녀 안에 파정했다.
한 차례 사정했음에도 대공은 여전히 아란의 안에 머물렀다. 아란은 가쁜 숨을 삼키며 나른하게 늘어지려는 사지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대공은 되레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제 품에 몸을 기대게 했다.
실랑이할 힘도 없어 아란은 얌전히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얹었다. 말캉한 가슴이 남자의 뜨거운 가슴에 눌려 뭉그러졌다. 대공의 목에 감겨 있던 아란의 팔이 힘을 잃고 근육으로 꽉 차인 등을 가로질러 추락했다.
대공의 맨몸엔 흉터가 가득했다. 전장을 떠돌았던 흔적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등에 길게 새겨진 흉터에 닿자 대공의 몸이 아주 잠깐 움찔거렸다. 반쯤 정신이 나간 아란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피부가 아주 뜨겁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지금처럼 서로 나신으로 엉켜 있는 건 굉장히 드물었다. 그는 여간해선 옷을 벗지 않았고, 아란 역시 그의 옷을 벗길 생각 같은 건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옷을 벗을 필요가 없겠지. 그가 내게 원하는 건 교감도, 온기도 아니니까. 아란은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옷을 벗어야 하는 건 희롱을 하는 쪽이 아니라 당하는 쪽이었다. 이번만은 그 장소가 물 속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대공은 계속 그녀의 몸을 지분거렸다. 머금고 있는 성기가 다시 부피를 늘리는 게 느껴져 몸을 떨자,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추우십니까?”
대답할 힘도 없어서 아란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식으며 으슬으슬 한기가 몰려왔다. 그녀는 추위를 피해 대공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엉덩이 아래를 단단히 받치더니 몸을 일으켰다.
“앗…….”
이어진 상태로 몸이 공중에 들리자 화들짝 놀란 아란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완전히 곤두선 성기가 걸을 때마다 안을 찔렀다.
“흣, 흐…….”
아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에게 매달려 밭은 신음만 흘렸다.
욕실을 가로지른 대공이 문을 열려 할 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란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시녀는……?”
보통 시녀들은 대공이 올 때마다 자리를 비웠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 대공이 그들을 물리지 않았다면…….
아란의 눈에 불안이 스쳤다. 설마 시녀를 대기시켜 놓고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워낙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성정 탓에 완전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부리는 이의 눈이 그리 걱정되십니까?”
대공은 어딘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나가면 안 되겠군요. 폐하께서 다른 사람에게 벗은 몸을 보이는 걸 싫어하시니.”
“잠깐, 그 말은 아직 시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가 문고리를 놓고 아란을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무슨 상황인지 깨달을 새도 없이 한쪽 다리가 대공의 팔에 걸쳐졌다. 다른 한쪽은 그의 팔에 단단히 잡힌 채였다.
대공이 몸을 바짝 붙이자 다리가 접히며 이어진 부분이 훤히 드러났다.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챈 아란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대……!”
그녀가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그가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성기가 깊게 박혔다. 아란이 비명을 삼켰다.
“보이지만 않으면, 괜찮은 겁니까?”
그가 치받아 올 때마다 몸이 문에 부딪히며 쿵쿵 울렸다. 허공에 들린 불안한 자세 때문에 아란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거칠게 아래를 들쑤시는 성기에 식었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 살 부딪히는 소리가 어지럽게 귓가를 울렸다.
“흑, 이런 건, 너무, 흣!”
성기가 깊게 찔러 들어올 때마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밖에 시녀가 있다면 지금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계속 문에 부딪힌 등과 엉덩이가 얼얼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새도 없었다.
“아, 앗, 그만, 으응……!”
아란이 울면서 애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울자 더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는 걸 부추기듯 더 세게 찌르고, 더 난폭하게 헤집었다.
아란은 고통과 쾌락, 두려움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그의 열기와 체취에 이성이 녹아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목놓아 울었다.
대공은 아란의 잔뜩 찡그린 콧등과 눈가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리곤 탐욕스럽게 눈물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