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들어서자마자 그는 공기 중을 떠도는 묘한 열기를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은은한 열기였으나 감이 좋은 공작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공작은 의아함을 느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의자에 파묻히다시피 앉아있는 황제는 열기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착각인가?
공작이 들어왔는데도 그녀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오.”
황제가 맥없이 물었다. 며칠 전 회의에서 봤을 때보다 몇 배나 위태로워 보였다. 한순간 뺨을 맞은 게 대공이 아니라 황제 쪽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흰 얼굴은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먼저 급작스럽게 알현을 청한 것, 사과드립니다.”
“인사치레는 되었소. 미안하지만 오늘은 몹시 피곤하니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황제가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을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재수 없는 낯짝을 본 것만으로도 꺼림칙한데, 우울해 보이는 황제에게 나쁜 소식까지 전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번 회의에서 말씀하신 세금 관련 안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이미 결정된 안건이 아닌가.”
“예. 하지만 원로들 사이에 반발이 큽니다. 그중 몇 명은 다음 회의부터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재협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황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긴 속눈썹을 깜박였다. 문득 공작은 그 속눈썹이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눈가도 붉고 입술도 깨문 흔적으로 부르터 있었다.
울었던 걸까.
“그대가 그들이 선택한 중재자인가 보군.”
“……예.”
공작이 황제 앞에 들고 온 문서를 내려놓았다.
“그들이 요구한 재협의안입니다.”
황제는 피로한 눈으로 그것을 훑었다. 전부 들통날 거짓이라도 늘 완벽함을 가장하던 황제가 오늘은 지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공작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예?”
“그대 역시 내 결정에 불만이 있지 않았나. 빈말로도 그대가 성실한 납세자라고는 우기지 못하겠지.”
상처 때문일까, 그를 올려다보는 입술이 오늘따라 붉어 보였다. 공작은 마음이 크게 일렁이는 걸 느꼈다. 한순간 그녀를 찾은 이유도 잊을 뻔했다. 눈앞이 어지러워 공작은 시선을 돌렸다. 식은 차가 가득 담긴 찻잔이 보였다.
아까 쏟았다고…….
그는 눈을 깜박였다.
“편히 이야기해 보시오.”
“폐하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겠군요. 변명하자면…….”
“그대를 탓하려는 건 아니야. 탈세는 귀족들 사이에 성행하는 일종의 관습이니 말일세.”
공작은 그녀의 목소리에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늘 정갈해야 할 황제의 책상에 어째서 구겨진 서류가 나뒹구는지, 대공의 소매를 적신 액체는 무엇이었는지 따위의 사소한 잡념 말이다.
노곤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 협의안을 읽는 황제의 모습도 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옷소매가 흘러내려 드러난 흰 손목에 공작은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허락 없이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 중죄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황제가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고자 한 말은 아니지만, 아까부터 시선이 너무 따갑기에.”
목소리는 평소보다 날이 서 있었다. 공작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집무실을 나오고 나서도 공작의 잡념은 계속 이어졌다. 협의에 대해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연한 초록색 눈동자의 잔상과, 흰 손목만 뇌리에 남았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제를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황제 역시 귀족들 앞에서 여자가 아닌 황제로 보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오늘 그녀가 보여준 빈틈은 확실히 사내의 마음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대공은 그녀의 집무실에 자신을 들여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역시 오늘 황제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남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건가.
두 사람은 한때 약혼한 사이였다. 당시엔 황녀였던 그녀가 집요하게 대공의 애정을 갈구했던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아직도…….
갑자기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공작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원.
과거에 그들이 무슨 사이였든, 대공이 황제의 혈육을 전부 죽인 시점부터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대공이 아무리 충직한 개처럼 굴어도 냉랭하기만 한 황제를 보면 알 수 있다. 대공을 보는 황제의 눈엔 언제나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공작은 말에 오르기 전 힐끗 황궁을 돌아보았다. 오늘 황제의 모습을, 어쩌면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쳤다.
* * *
공작이 나가고 나서 아란은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대공이 그녀의 뜻을 지지하겠다고 밝힌 이상 대놓고 반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대귀족 중 몇 명과 그 휘하에 있는 이들이 뜻을 모아 완강히 나오기로 한 듯했다. 아란은 사일러스 공작이 놓고 간 문서를 다시 한번 살폈다.
클레어드 변경백, 헤스턴 공작, 비에른 후작…….
하나같이 쟁쟁한 귀족들의 이름 중에서 아란은 설득이 가능할 것 같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추렸다.
먼저 클레어드 변경백은 설득이 가능한 쪽이었다. 젊은 변경백은 어릴 적부터 그녀와 알고 지냈던 사이였던 데다 그의 아비가 선황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으니 마음을 바꿀 것을 종용해볼 만했다.
나이가 찬 후계자의 혼처를 찾고 있는 헤스턴 공작에겐 적당한 가문을 연결해 주는 조건으로 회유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비에른 후작의 이름을 본 아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거칠고 포악한데다 그녀에 대한 반감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 상대하기 몹시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사일러스 공작이 그를 설득해주기로 약조했지만 공작 역시 이번 결정에 회의적이니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후작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그녀의 뜻이 받아들여진 건 대공의 이름을 빌려 반대 의견을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찬성한 이들 역시 언제고 기회만 된다면 손바닥 뒤집듯 결정을 바꿀 것이다. 후작은 그 도화선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아란은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화끈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가 화가 나서 결정을 번복하면 어떡하지.
대공이 없다면 자신은 후작 한 명에게도 쩔쩔매는 허수아비 황제일 뿐이었다. 그를 미워하면서도 결국은 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참담했다.
아란은 무거운 마음으로 클레어드 변경백과 헤스턴 공작에게 서신을 썼다. 일개 귀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황제가 친서까지 보내는 건 과한 일이었지만 무력한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에게 보낼 서신을 마무리하고 새 편지지를 꺼낸 그녀는 망설였다. 앞선 두 편지도 수월히 적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 것은 더 어려웠다.
결국, 비에른 후작에게는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그와의 충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당장은 피하고 싶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이미 그녀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제발 그 전에 사일러스 공작이 후작을 설득하길 바랄 뿐이었다.
황제의 서신에 가장 먼저 답신을 보낸 쪽은 클레어드 변경백이었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그녀를 찾아뵙고 의견을 조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인 답변에 오랜만에 아란의 얼굴이 펴졌다. 지금은 소원해졌지만 그는 분명 다감하던 친구였다. 클레어드 변경백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비에른 후작을 상대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어쩌면 대공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공을 떠올린 아란의 얼굴이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대공은 그날 이후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란은 처음엔 그 사실을 기꺼워했으나, 그가 나타나지 않는 날이 길어지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조세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가 필요한 일들은 늘 산적해 있었던 것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상황은 매번 바뀌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주도권을 쥔 쪽은 늘 대공이었고, 아쉬운 쪽은 언제나 그녀였다. 하다못해 대공이 시종이었던 시절에도 아란은 언제나 그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특히 갓 시종이 되었을 때의 그는 늘 날이 서 있어서 한번 화를 내면 쉽게 푸는 법이 없었다. 그럴 때면 아란은 자존심도 버리고 그에게 매달렸다.
재회한 이후 아직 그런 일은 없었지만 어쩌면 대공은 그녀가 예전처럼 비굴하게 간청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일지도 몰랐다. 손쉽게 가졌으니 버리는 것 역시 쉬울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었다. 지금껏 아란은 단 한 번도 그가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애틋하게 사랑해서, 지금은 그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황제라서.
그녀는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로아크 대공에 비하면 비에른 후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공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비에른 후작을 상대하는 게 몇 배는 나았다.
고민이 길어지는 바람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과를 마무리한 아란은 무거운 걸음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클레어드 변경백의 서신을 올려놓고, 무거운 정복을 벗었다.
얇은 네글리제 차림이 된 그녀는 따라붙는 시녀를 거절하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된 후에야 남아 있던 속옷마저 벗어버렸다.
대공과 재회한 이후, 그녀는 대공 외 사람 앞에선 절대 옷을 벗지 않았다. 제아무리 입이 무거운 시녀라 해도 다른 사람 앞에서 성애의 흔적으로 얼룩덜룩한 몸을 보이는 건 난처한 일이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자국이 희미해진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했다.
아란은 주저 없이 뜨거운 물이 담긴 욕탕에 들어갔다. 근심 많은 마음과 달리 몸은 금세 노곤하게 풀렸다. 그러다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