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황제의 내부에서 손가락을 빼내자 미처 다 흘러나오지 못한 애액이 튀어 그의 얼굴을 적셨다. 아란은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외면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대공은 대수롭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 아란의 아래를 닦아주었다. 그 자극조차 견디지 못하겠는지, 그녀가 몸을 뒤틀며 고개를 저었다.
대공은 코웃음을 치며 제 얼굴과 손도 닦았다. 그러다 소매가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것을 발견했다. 소매뿐만 아니라 책상에도 여기저기 애액이 흩뿌려져 있었다.
조금 더 놀려줄까 고민하던 그는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눈치챘다. 뒤이어 작은 흐느낌이 들렸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뭐가 그리 서러운지, 황제는 울고 있었다. 대공은 그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기에 안아 일으키려 하자 매섭게 뿌리쳤다. 아란은 비틀거리면서도 혼자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진이 다 빠져 발이 땅에 닿자마자 크게 휘청거렸다. 대공이 빠르게 부축하지 않았다면 형편없이 넘어졌을 것이다.
“놔……!”
아란은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대공은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란은 그를 노려보며 볼썽사납게 떨리는 몸에 힘을 주어 꼿꼿이 섰다. 서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뺨을 타고 흘렀다.
“그대는…….”
꽉 잠긴 목소리가 나와 아란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대는, 짐이 그렇게 우습나?”
그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아란은 모든 용기를 끌어모았다. 남자의 존재감이 태산처럼 그녀를 짓눌러 질식할 것 같았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사실 행위 자체만 보자면 그리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 악랄하고 더 잔인한 행위도 익히 당해봤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은밀한 공간에서 비밀스럽게 행해진 일들이었다. 오늘 대공은 그녀가 가장 깊숙이 감춰둔 자존심마저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말해. 그대가 짐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지……!”
격앙된 목소리가 문밖까지 울렸다.
“제게 폐하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아란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차라리 평생 지하 감옥에 가두고 괴롭히지 그래. 가장 비천한 사내에게 팔아버리고 초라해진 모습을 비웃지 그래, 이런 식으로 조롱할 바엔……!”
“폐하.”
대공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저는 폐하께서 마음대로 부리실 수 있는 종입니다. 수치를 느끼실 필요도, 자존심을 세우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원하는 걸 요구하시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는 짐을 기만하고 있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짐의 뜻을 따른 적 없으면서!”
그의 오만한 입술에 그린듯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저는 폐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을 드렸을 뿐입니다.”
아란은 눈앞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날카로운 마찰음이 공기를 갈랐다.
제가 저지른 일에 도리어 놀란 아란이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수려한 얼굴에 선명하게 손자국이 남았다.
대공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공포에 질린 아란은 황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잔뜩 굳히고 어깨를 웅크렸다. 두 눈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맞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아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아란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반항은 그에겐 고양이가 손톱을 세우는 것보다도 못했다.
“제게 겁먹지 마십시오. 저는 폐하께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란은 그의 뺨에 길게 그어진 제 손톱자국을 바라보았다.
“짐을 주인이라 여기지도 않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지.”
아란이 힘없이 대답했다.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으나 한순간 느낀 공포에 모든 전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공이 칭찬하듯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애초에 제 노리개가 되기를 택하신 건 폐하가 아닙니까.”
그의 속삭임에 아란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얄팍한 자비에 빌어 비참한 삶을 택한 건 그녀였다. 정말로 견딜 수 없다면 언제든 죽음이라는 안식으로 도망치면 되는 것이다. 수많은 그녀의 선조들은 명예와 긍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그들의 고결함을 물려받지 못했다.
“자존심을 가진 노리개는 없는 법입니다, 폐하.”
대공의 손바닥이 느리게 아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아란은 그것이 언제든 조금 전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경고임을 깨달았다.
뺨을 희롱하던 입술이 내려와 굳게 닫힌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아란은 그 입맞춤을 거부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입술을 핥던 혀가 부드럽게 입안을 파고들었다. 아란은 그가 원하는 대로 가만히 입을 벌렸다. 뜨거운 혀가 치아와 입천장을 샅샅이 훑었다.
이미 숱하게 몸을 섞은 사이였다. 대공은 어떻게 하면 그녀가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흐응…….”
살짝 혀를 빨아들이고 입술을 깨물자 아란이 작게 비음을 흘렸다. 대공이 낮게 웃었다. 맞닿은 입술로 그 진동이 전해졌다. 위태롭게 서 있던 아란이 그의 목을 끌어안자 대공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받쳐 들었다.
더없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연인끼리 나누는 달콤한 입맞춤처럼 보였지만 실은 잔인한 폭력이며 기만임을 황제도, 대공도 알고 있었다. 황제는 키스가 이어지는 내내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고, 대공은 뻣뻣하게 굳은 그녀를 비웃으면서도 한껏 다정하게 눈물을 핥았다.
* * *
대공이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자 그를 본 이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대공의 부어오른 뺨과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보지 못한 척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황제가 대공에게 화를 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그의 뺨을 때리는 소리까지.
“괜찮으십니까, 대공 전하.”
시종장이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원래는 황제의 내밀한 일까지 전부 모셔야 하는 그이지만, 황제가 남자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집무시간 외 시중을 거부하여 그녀의 사생활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폐하의 심기가 좋지 않으시니 각별히 신경 쓰거라.”
평소처럼 집무실 문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서 분노나 서운한 기색은 없었다.
시종장은 평소엔 아주 얌전하고 온화한 제 주군이 유독 대공에게는 매정하게 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한 번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예리한 감과 눈치는 그를 오래도록 황궁에서 버티게 해준 밑천이었다. 그저 무력한 황제가 대공에게 열패감을 느낀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대공은 얻어맞은 뺨을 매만지며 복도를 걸었다. 오늘 일로 황제는 또다시 구설수에 오를 테지만 오해를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외부와 고립될수록 가지고 노는 즐거움도 커질 걸 알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사일러스 공작과 마주쳤다. 공작이 그의 얼굴을 보고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황제가 대공에게 화를 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때렸을 줄은 몰랐다.
“이런, 대공께서 뺨을 맞다니요.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분의 심기를 거슬렸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뺨 한 대로 모든 것을 용서해주신 폐하야말로 자비를 베풀어 주신 셈이지요.”
충직한 대답에 공작이 기가 막힌 웃음을 흘렸다.
“무슨 짓을 하셨기에 그 얌전하신 분께서 손까지 올렸는지 궁금한데요.”
“공작께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말에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대공은 더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예상보다 손이 야무지신가 봅니다. 꽤 아파 보입니다. 괜히 알현을 신청한 게 아닌지 후회되는군요. 저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덩달아 뺨을 맞게 되는 게 아닌지.”
공작이 농담처럼 말하자 대공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공께선 무사하실 겁니다.”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이 세상에 그분을 노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니까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의 붉은 눈이 한순간 번뜩였다.
공작은 보이지 않게 얼굴을 찡그렸다. 세상 사람들은 대공이 둘도 없는 성인이라며 칭양하지만, 공작은 어쩐지 그를 대할 때마다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점잖은 척하고 있어도 그에게선 감출 수 없는 위험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 무슨 일로 폐하를 찾으십니까?”
“아, 저번 회의에서 결정된 안건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어서 말입니다.”
대공이 황제의 집무실을 한 번 힐끗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의 기분이 언짢으시니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먼저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군요.”
그러면서 공작이 들고 있는 문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공작의 시선이 그의 젖은 소매로 향했다. 그를 느낀 대공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차를 쏟아서.”
“폐하께서 뺨을 때리시고도 모자라 찻잔까지 던지신 겁니까.”
공작의 농담에 대공은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무슨 용건으로 폐하를 찾으셨는지 말씀하십시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이야기하려던 공작은 위화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황제에게 올라갈 문서를 앞서 보는 것은 큰 죄였지만 대공은 거리낌이 없었다. 실질적인 황제 노릇을 하고 있음에도 이렇게 대놓고 월권을 저지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뺨을 맞은 것에 대한 사소한 보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뺨에 새겨진 손톱자국을 보자 갑자기 그의 뜻대로 해주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떼 같은 귀족들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던 작고 창백한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공작은 황제가 어릴 때부터 그녀를 보아왔다. 그녀는 결코 여간한 일로 누군가에게 손찌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니, 못되었다.
과연 대공은 어떻게 황제를 화나게 했을까.
“서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나중에 폐하를 통해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대공의 새빨간 눈동자가 공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작은 충동적으로 대답한 일을 곧바로 후회했다. 대공의 눈 밖에 날 일을 만들 바엔 황제와 완전히 척을 지는 편이 몇백 배는 나았다.
공작은 대공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황제와 다투고 예민해졌을 터였다.
“그렇군요.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의외로 대공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불쾌한 기색이 전혀 없는 담담한 어조에 공작은 되려 제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색하게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황제의 시종장이 끼어들었다.
“공작 각하, 폐하의 알현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공작의 거절에도 태연하기만 하던 대공이 갑자기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대공이 뭐라 말을 꺼내기 전, 공작은 서둘러 그를 지나쳐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