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와줘서 고마워. 대공령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며칠은 걸렸을 텐데.”
“괜찮습니다. 아, 황후 폐하께서 이걸 전하께 전해주라 하셨는데. 꼭 드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에녹이 건넨 건 가루약이 든 작은 종이봉투였다. 아란은 시무룩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약은 먹기 싫은데…….”
에녹은 그 투정을 못 들은 척했다. 잠시 그의 눈치를 보던 아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잖아, 먹여주면 안 돼?”
“네?”
예상치 못한 요구에 에녹은 조금 당황했다. 그 역시 귀한 대공가의 후계자라, 그런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황후의 경고를 떠올린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어설픈 솜씨로 약을 물에 개어서 아란의 입에 넣어주자 그녀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불평은 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란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던 시종들이 보면 억울해할 일이었다.
아란은 내심 그가 칭찬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에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미리 준비한 사탕을 아란의 입에 넣어주었다.
볼록 튀어나온 뺨이 우스꽝스러워 에녹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에녹이 웃는 이유를 모르는 아란은 그냥 그가 웃는 게 좋아서 따라 웃었다. 아파서 그런지 평소보다 힘이 없는 웃음이었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성가신 성격과 별개로, 어린 나이에 침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안쓰러웠다. 얌전한 척 굴고 있어도 몰래 침실을 빠져나와 목검을 휘두르던 모습이나 당돌한 언행을 보면 분명 활달한 성격일 것이다.
에녹의 손이 닿자 아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열이 올라 뜨거운 체온이 손바닥 전체에 느껴졌다.
“이상하다.”
“무엇이 말입니까?”
“에녹이 다정하니까…….”
아란이 힘없이 웃었다.
“내가 아파서 그런 거면 매일 아팠으면 좋겠다.”
“모두 전하의 쾌차를 바라고 있습니다.”
“너도?”
“물론입니다.”
“그럼 빨리 나을게.”
천진한 얼굴을 보니 왜 황제가 딸에게 어떤 권력도 쥐여 주려 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환경 탓도 있겠으나 황녀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솔직했다. 게다가 몸까지 약하니 어설프게 권력을 가졌다간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했다.
로아크 대공가는 전통적으로 황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가 무리하게 대공가와 약혼을 강행한 건 딸이 다른 이들에게 휘둘리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에녹은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졌다. 대공 부부는 늘 에녹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하게 굴었다.
에녹이 빤히 바라보는 게 부끄러운지 아란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에녹.”
“말씀하십시오.”
“네가 오니까 너무 좋아.”
“네.”
무뚝뚝한 대답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아란은 웃기만 했다.
에녹의 눈에 황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부모조차 좋아해 본 적 없던 그는 타인을 좋아하는 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다. 그저 평생 황녀의 기분을 맞춰 줘야 한다는 생각에 피곤해졌을 뿐이었다.
* * *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동안 대공은 아란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표현이었다. 아란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삽입만 하지 않았을 뿐 대공은 여전히 틈만 나면 그녀를 괴롭혔다. 삽입 없이도 그렇게 난잡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걸, 아란은 처음 알았다.
그래도 확실히 버거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전처럼 체력이 달려 국사를 소홀히 하지는 않게 되었다. 아란에겐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로아크 대공이 집무실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란은 달뜬 신음을 삼키며 제 다리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남자를 힘겹게 바라보았다.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열면 신음이 터질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쾌락에 들뜬 와중에도 아란은 불안하게 문 쪽을 살폈다. 문밖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집무실 책상 위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을 거라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대공이 알현을 청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받아 준 것이 화근이었다. 설마 대낮에, 집무실에서 이런 짓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아란은 앓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그러나 대공이 이를 세워 클리토리스를 아주 살짝 깨물자, 저절로 허리가 뒤틀리며 비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유려한 손가락이 뜨겁게 달아오른 내부를 파고들며 아란이 느끼는 곳을 집중적으로 찔렀다. 이미 흠뻑 젖은 그녀의 아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의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찔꺽이는 젖은 소리가 음탕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녀가 막 절정에 다다르려 했을 때였다.
“폐하.”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시종장의 목소리에 아란이 그대로 굳었다. 대공은 그 틈에 그녀의 다리를 더 활짝 벌렸다. 두툼한 혀가 애액이 흘러나오는 입구를 핥았다. 새하얀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아란이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시종장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폐하?”
분명히 대공 역시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란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래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마, 말하라.”
“사일러스 공작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일러스 공작이?
아란은 흐릿한 이성으로도 판단을 내리려 애썼다. 오늘 그녀가 만나기로 한 사람 중에 그는 포함되지 않았다.
“무슨 용건인지 물, 흣……!”
갑자기 혀가 질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아란은 하마터면 그대로 교성을 내지를 뻔했다. 절정 직전까지 갔던 터라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일어서 있었다. 대공의 숨결에도 몸이 떨릴 정도였다.
“폐하? 어디 편찮으십니까?”
갑자기 황제의 말이 끊기자 시종장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 아니다. 무슨 용건인지 묻고 급한 일이 아니면 오늘은 돌아가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아란이 원망스럽게 대공을 노려보았다. 초조해하는 그녀와 달리 그는 여유롭기만 했다.
아란은 숨을 헐떡이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제발, 집무실이잖아.”
감히 허락도 없이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올 자는 없겠지만, 문 바로 뒤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아란은 어떻게든 대공에게서 멀어지려 그의 머리를 밀어냈지만 도리어 손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하읏, 당연히……!”
질구 위를 핥던 입술이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며 강하게 클리토리스를 빨아들였다. 아란은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달뜬 신음이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신 차릴 틈 없이 이어지는 애무에 자꾸만 몸이 꼬이며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좋아하시는 게 아닌지.”
아란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짐승처럼 불규칙적으로 헐떡이는 숨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황제의 아래에서 입술을 뗀 대공이 자꾸만 닫히려는 다리를 잡아채며 손가락을 깊숙이 넣었다.
“흑…….”
성감대를 건드리며 손을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자 결국 아란은 참지 못하고 작게 교성을 흘렸다. 물기 어린 녹색 눈동자가 쾌락에 젖어 들었다.
대공은 잘게 경련하는 아랫배 위에 입을 맞추고 배꼽에 혀를 넣어 할짝였다. 뜨거운 내벽이 움찔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강하게 물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꾹 누르자 내벽이 세차게 수축했다. 구멍에서 뜨거운 애액이 왈칵 쏟아졌다. 그 모든 과정이 대공의 눈앞에 여과 없이 노출되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아란이 쾌락에 떠는 와중에도 아래를 가리려 손을 뻗었다. 대공은 계속 질구를 쑤시면서 다른 손으론 아란의 손을 잡아내려 훤히 드러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게 했다.
“무슨……!”
아란은 이번에야말로 경악에 차 비명을 질렀다.
“폐하?”
기어이 문을 뚫고 나간 목소리를 들은 시종장이 아란을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아까와 달리 이번엔 대공이 움직임을 멈춰주지 않았다. 그는 아란의 손을 제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가늘고 뾰족한 손끝이 돌기를 건드릴 때마다 아란의 허리가 강하게 튕겼다.
대답이 없자 이상함을 눈치챈 시종장이 재차 물었다.
“폐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란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쾌락에 잠긴 몸은 평소의 반 만큼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란은 애원하듯 대공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실례합니다, 폐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에 아란이 뻣뻣하게 굳었다. 곧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이 쏟아진 것뿐이니 들어올 필요 없다.”
문이 열리기 직전, 대공이 말했다. 그가 하고 있는 무도한 짓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조한 목소리였다.
“하녀를 시켜 닦겠습니다.”
시종장의 공손한 대답이 들렸다. 그 와중에도 대공은 장난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절정이 다가온 아란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아직 시종장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신음을 참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한 그녀가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새된 소리가 목을 타고 터져 나오려 할 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럴 필요 없으니 물러가라.”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문에서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그는 자연스럽게 대공의 명령을 따랐다.
“흐으읏……. 흑……!”
동시에 억눌린 신음을 터뜨리며 아란이 크게 몸부림쳤다. 오래 참은 만큼 길고 지독한 절정이었다. 절정이 지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아란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다면 종종 이곳을 찾아올 걸 그랬습니다.”
대공이 떨리는 허벅지 안쪽에 입술 자국을 내며 속삭였다. 삽입이 없던 며칠 동안 그녀의 피부는 제 색깔을 많이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