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밤이 깊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 아란은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아래 숨겨둔 옷을 꺼냈다. 헐렁한 셔츠와 딱 붙는 바지는 그녀와 키가 비슷한 어린 시종을 구슬려 얻은 것이었다. 사실은 협박에 가까웠지만, 철부지인 아란은 그게 정당한 거래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아란은 거울 앞에서 긴 백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었다. 그리고 제 모습을 여기저기 비춰보았다. 처음 입는 남자 옷이 어색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일 입는 드레스보다 훨씬 편해 마음에 쏙 들었다.
“좋아.”
침대 아래를 한 번 더 휘젓자 검술 교본과 목검도 나왔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목검을 집어 들고 휘둘러 보았다. 생각보다 무거워 몸이 휘청였다. 하마터면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요즘 아란은 황궁 근위대의 여자 기사들을 동경하여 날마다 그들을 훔쳐보았다. 검은 제복을 입고 능숙하게 검을 다루는 모습을 볼 때면 저의 약해빠진 몸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결국 그녀는 열세 번째 생일날, 생일 선물로 검을 배우게 해달라고 부황에게 요구하기까지 했다. 딸의 요구에 부황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되냐며 떼를 쓰는 딸을 달래느라 그는 진땀을 빼야 했다. 결국 그는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검을 익히게 해주겠다는 허락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란은 그때까지 기다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다면 혼자 익히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끈으로 검술 교본과 목검을 몸에 칭칭 묶고 창문을 통해 몰래 침실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그녀의 침실은 그리 높은 곳에 있지 않아 빠져나오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어둠에 몸을 숨긴 아란은 낮에 미리 봐둔 곳으로 향했다. 인적 드문 곳에 도착하자 품에 넣어 온 초를 꺼내 불을 밝혔다. 그리고 교본을 펼치고 거기 나온대로 검을 휘둘렀다. 준비도, 자세도, 모든 것이 엉성했지만 일탈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가벼운 기분과 달리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고작 목검을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숨이 턱까지 찼다.
결국 그녀는 목검을 팽개치고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엔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축축하게 젖은 이마를 스쳤다. 아란은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 때였다.
“누구야?”
재빨리 몸을 일으킨 아란이 외쳤다. 그리고 옆에 놓인 목검을 집어 들었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황녀가 황궁에서 위험한 인물과 맞닥뜨릴 확률은 길 가다 벼락을 맞을 확률만큼이나 적었지만, 아란은 괜히 위협적으로 목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이 시간에 여길 올 사람은 밤눈 어두운 시녀나 시종뿐이었다.
내가 몰래 밖에 나왔다는 걸 부황에게 이르지 못하도록 단단히 겁을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란은 한껏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누구냐니까?”
“로아크의 에녹이라 합니다.”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아크……?”
아란은 잔뜩 겁을 주겠다던 각오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오늘 달이 뜨지 않은 건, 소년의 자태 앞에 모습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소년의 시선이 아란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얼핏 은빛으로 보일 만큼 색이 옅은 금발은 황족의 상징이었다. 그를 알아본 소년이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란흐로드 황녀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에녹 앞에서 아란은 몹시 당황했다. 태어나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이었다. 힘껏 검을 휘둘렀던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
아란은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에 몹시 안도했다. 어둠에 가려 그는 땀과 흙으로 엉망이 된 제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잘 익은 사과 빛깔로 붉어진 얼굴 역시.
그런 사정을 모르는 에녹은 눈에 띄게 머뭇거리는 황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황녀가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건지는 모르지만 목검을 든 자세가 몹시 어설펐다.
저런 자세라면 다칠 위험이……. 아니면 이미 다친 건가?
뒤늦게 황녀가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에녹이 몸을 일으켰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란이 날카롭게 외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혹시라도 그가 땀 냄새라도 맡을까 봐 몹시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이라니. 생소한 감정이었다. 어여쁘다, 영특하다, 언제나 칭찬만을 듣고 살았던 아란은 한 번도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 없었다. 아란은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외침에 에녹이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다치신 건 아닌 것 같네요.”
“그, 그래. 안 다쳤으니까 거기서 이야기해. 알았어?”
“알겠습니다.”
에녹의 침착한 태도에 아란은 제가 얼마나 멍청하게 굴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무엇이 똑똑한 대처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대로라면 더 우스운 꼴만 보일 거라는 것이다. 아란은 소년이 자신을 완전히 바보로 생각하기 전에 자리를 뜨기로 했다.
“날 본 건 비밀로 해. 안 그러면…….”
아란은 뒷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아름다운 소년을 어떻게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대로 목검을 내팽개친 채 제 침실로 돌아왔다. 어렵사리 구한 물건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도 자꾸만 가슴이 뛰어 잠이 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 자신의 약혼자라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아란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
*
황녀가 새끼 오리처럼 제 약혼자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소문은 금방 사교계 전체에 퍼졌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라 그런 소문을 부끄럽게 여길 법도 한데, 아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실 그녀의 머릿속은 에녹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다른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반면 에녹은 지나치게 적극적인 황녀를 조금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열여섯이지만 이미 성인만큼 키가 큰 그는 제 가슴팍에나 겨우 닿을 법한 아란을 그저 여동생처럼 대했다.
황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이 무심한 에녹에게 목을 매는 꼴을 보고 분개했지만, 그때마다 아란이 에녹의 편을 드는 바람에 못마땅한 마음을 속으로만 삼켰다.
안타깝게도 아란은 에녹을 자주 볼 수 없었다. 에녹만 만나면 늘 무리하는 바람에 앓아눕기 일쑤였으니까. 특히 그를 졸라 겨울 낚시에 따라갔다가 심한 감기로 한 달이나 고생한 이후, 황제는 에녹을 만나는 걸 월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
“에녹이 보고 싶어요.”
“얼른 건강해지렴. 그래야 그 애를 더 자주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저는 왜 이렇게 약하게 태어났을까요. 오라버니들은 저렇게 건강한데.”
아란이 황후에게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철없는 아란은 그 말이 모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걸 몰랐다. 안쓰러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던 황후는 황제 몰래 에녹을 황궁에 초대했다.
며칠이나 말을 달려 황궁에 도착한 에녹은 황녀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자가 아프다는 말에도 표정 변화가 없는 소년을 보는 황후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공자.”
“예.”
“황녀 때문에 많이 성가시다는 걸 안다. 워낙 철이 없으니.”
“……아닙니다.”
황후는 잠깐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지만 그 역시 소년이라 모든 것을 완벽히 숨기지는 못했다.
“아란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지. 나와 황제 폐하는 그 애가 지금껏 잘 자라준 것만으로 고마워 단 한 번도 혼낸 적 없었다. 아란이 철부지가 된 건 전부 우리의 탓이지.”
“…….”
“철부지라도 내겐 천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딸이다. 그러니 공자도 조금은 그 애에게 다정하게 대하길 바라. 나는 내 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니.”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그건 경고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황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황녀의 방으로 들어서는 그녀는 한없이 자애롭고 온화한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란, 선물이 있단다.”
“그래도 약은 안 먹어요.”
침대 속에 파묻힌 아란은 얼굴도 들지 않고 말했다.
“이 어미가 누굴 데려왔는지 알면 그런 말은 못 할걸. 어서 일어나보렴.”
황후의 말에 아란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에녹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동안 에녹을 바라보던 아란이 갑자기 작게 소리를 지르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왜 하필 이럴 때……!
꿈에도 그리던 에녹이지만 이런 꼴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며칠이나 앓아 단장은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입은 옷도 애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유치한 무늬의 파자마였다. 그에 반해 에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아란?”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렇게 야속하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있다가 다시 오면 안 될까요? 옷을 갈아입고…….”
그제야 아란의 마음을 눈치챈 황후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늘 어린아이로만 생각해 딸이 약혼자 앞에서 이성으로 보이고 싶어 할 거란 생각을 미처 못했다.
“그럼 공자, 잠시…….”
“괜찮습니다. 황녀 전하께선 언제나 사랑스러우시니까요. 몸이 좋지 않으시니 편하게 계시는 편이 더 좋습니다.”
에녹이 침대에 다가서며 말했다. 아란이 조금만 덜 당황했어도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았겠지만, 열이 오른 머리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불 밖으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정말?”
“예.”
황후는 그의 거짓말을 진작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녹의 진심이 어떻든, 황후 역시 딸이 행복해하니 그만이었다. 그녀는 모처럼 활기가 도는 딸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용히 방을 나섰다.
둘만 남게 되자 아란은 더 어쩔 줄 몰랐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상관없습니다.”
이번 말은 진짜였다. 애초에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으니 잔뜩 치장한 모습이나 파자마를 입은 모습이나 다를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