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7화 (7/146)

7화

“대공!”

켈론 후작이 당황스럽게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은 오로지 황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부정하게 착복한 재물이 있다면 추징금 역시 기꺼이 내겠습니다.”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대공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천지가 개벽해도 변하지 않을 충신처럼,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폐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판도가 뒤집힌 건 순식간이었다. 승냥이 떼처럼 황제를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던 귀족들이 대공의 말 한마디에 꼬리를 내렸다. 사일러스 공작은 기막힌 속내를 숨기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도 다정한 약혼자 행세를 하고 싶은 건가.

더 우스운 건 황제의 태도였다. 궁지에 몰린 자신을 구해준 왕자님에게, 그녀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황제가 귀족들 사이에서 평판이 나쁜 데엔 저런 태도도 한몫했다. 귀족들의 수장인 로아크 대공을 저런 식으로 홀대하니 당연히 고깝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로아크 대공은 나이 많은 후작에게 팔려가는 신세였던 그녀를 황위에 올린 장본인이었다. 귀족들 눈에는 황제가 주제도 은혜도 모르고 대공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공의 측근 중 극성스러운 자들은 로아크 대공이 황제를 폐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 좋겠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떠들어대곤 했다.

그러나 사일러스 공작은 황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이제는 ‘피의 결혼식’이라 불리는, 그녀와 멕스웰 후작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그는 그날의 아수라장을 생생히 기억했다. 대리석 바닥 위에 흥건하게 뿌려진 황족들의 피를 떠올리면 그 역시 등골이 서늘했다.

그날 황제와 대공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저 섬약한 공주님이 대공을 볼 때마다 진저리를 치는 것도 이해 못 할 노릇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찌 됐건, 그녀는 이번에도 대공 덕에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더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다음 회의 때 모두의 의견을 취합하여 말해주길 바라오.”

회의 종료를 선언한 황제가 조금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황제는 사라졌지만 아직 대공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대놓고 결과에 불만을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폐하께선 복이 많은 분이시군요. 대공과 같이 충직한 신하를 둔 황제도 드물 겁니다.”

사일러스 공작이 로아크 대공에게 은근한 비아냥이 섞인 말을 건넸다. 그 때문에 공작 역시 추징금을 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대공의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다. 공작은 조금 김이 빠졌다.

“글쎄요. 폐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대공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냉랭하시지만 이리 충심이 지극하시니 언젠가 폐하께서도 알아주실 겁니다.”

그 말에 대공이 피식 웃었다. 그가 황제 앞이 아닌 곳에서 웃는 건 매우 드문 일이라 사일러스 공작은 내심 놀랐다.

“저는 결코 충신이 될 수 없습니다.”

뜻 모를 말로 대답한 그는 곧 황제를 따라 회의장을 떠났다.

아무튼 이상한 군신이란 말이야.

사일러스 공작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어떻게 하면 감사를 피할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 * *

아란은 비참한 기분으로 황궁을 가로질렀다. 한 시간 후 외국 사절들과의 오찬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런 기분으로는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조세를 내리게 되어 다행이라고 위안 삼아 보았지만, 무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란은 따르는 이들을 전부 물리고 혼자 후원으로 향했다.

햇빛이 잘 드는 벤치 위에 앉아 울적한 마음을 달래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귀가 어두워 명을 듣지 못한 시종인 듯했다. 아란은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시중은 필요 없다 하지 않았느냐.”

“시중을 들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아란이 급히 얼굴을 들었다.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그냥, 쉬려고…….”

대공이 성큼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거침없이 그녀의 뺨과 목 위로 미끄러졌다. 아란은 미약하게 그의 손을 밀쳐내며 속삭였다.

“제발, 대공.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다른 사람들의 눈보다 저를 더 중히 여겨주신다면 좋으련만.”

“…….”

그는 자꾸만 도망치려는 아란의 턱을 잡아 저를 바라보도록 고정했다. 살짝 벌어져 가쁜 숨이 새어 나오는 붉은 입술이 보였다. 그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껜 진한 화장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꺼운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연지가 그의 손가락 아래 뭉개지며 입술 주변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연지가 번진 모양이 야릇한 상상을 떠오르게 했다.

“눈 감고 귀 막고, 황궁 깊은 곳에서 사치나 즐기라 황위에 올려드렸더니 어울리지도 않는 성군 흉내를 내시는군요.”

“하지만 조세는 반드시 내려야 했어. 그대도 알지 않아, 작년 겨울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던 아란은 차가운 시선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런다고 제국민들이 폐하께 고마운 마음이라도 가질 것 같습니까? 황제가 바뀐 것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일 겁니다.”

“…….”

“민생 같은 건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당신이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공의 말이 아란의 마음을 잔인하게 후벼팠다.

대공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아란이 그를 내려다보는 형태가 되었다. 그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가느다란 목선이 드러났다. 긴장했는지 아란이 마른침을 삼켰다.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을 대공이 잡았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을 느리게 쓸었다. 야윈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아란이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 애정이 가득했던 녹색 눈동자엔 이제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그 눈빛이 대공의 가학심을 부추겼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그녀의 다리를 벌리는 건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손바닥을 더듬던 그의 손가락이 손목 안쪽까지 타고 올라갔다.

성적인 의도를 읽은 아란이 숨을 삼켰다. 그사이 다른 손은 아란의 치맛자락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그녀는 벤치 위에 누워있었다. 다리가 벌려지고 옷자락이 올라갔다.

“아직 낮인데……!”

아란이 기겁하며 다리를 가리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그녀는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대공의 손을 막아보려 애썼다. 마른 손이 필사적으로 대공의 손목을 쥐었다. 시선이 얽혔다. 아란은 간절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밤에, 뭐든 할 테니까, 여기서는…….”

아란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고 애원했다. 표정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대공이 속삭였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옷자락이 허리까지 말려 올라갔다. 아란은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아무리 밀어도 그는 꿈쩍도 안 했다. 사람이 아니라 바위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반항 끝에 완전히 지친 아란은 포기하고 팔을 늘어뜨렸다. 햇빛 아래 노출된 맨몸을 대공이 훑는 것이 느껴졌다. 아란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뜨거운 손이 마른 허벅지와 골반을 지나 납작한 아랫배를 쓸었다. 대공의 손이 스칠 때마다 아란의 가슴께가 가파르게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어차피 안겨야 한다면, 조금 전 말한 대로 빨리 끝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대공은 선뜻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아란의 몸을 바라보았다. 밤엔 어두워서 몰랐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아직도 성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특히 허벅지 사이는 손자국, 잇자국이 빼곡해 원래의 피부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벗기진 않았지만 가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짐승이 따로 없군.

우습게도, 그 모습을 보자 흉포하게 날뛰던 성욕이 가라앉았다. 황제를 범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사라지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밝은 곳에서 멍 자국이 가득한 앙상한 몸을 안을 기분은 들지 않았다.

대공은 혀를 차며 옷을 다시 내려주었다. 잔뜩 긴장한 채 행위가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던 아란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왜…….”

얼떨떨한 채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어깨를 대공이 가볍게 눌렀다. 그리고 자신도 그 옆에 누웠다.

황궁 정원의 벤치는 꽤 폭이 넓었지만 두 사람이 눕기엔 비좁았다. 게다가 대공은 보통 남자들보다 체격이 훨씬 컸다. 어깨가 닿자 아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불쑥 머리 아래로 팔이 들어왔다. 잔뜩 굳은 몸을 대공이 끌어당겨 안았다. 그 탓에 아란은 대공의 품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그의 팔과 가슴에서 힘차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또 한 손으로 아란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물었다.

“헤넨의 사절들과 오찬을 드실 예정이라고요.”

“응.”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란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믿었다가 호되게 당한 게 바로 이틀 전이였다. 게다가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선 아직도 짙은 흥분이 묻어났다.

“폐하께서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하라 미리 일러두었으니 남기지 말고 다 드십시오.”

“응…….”

대화가 끊겼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대공의 얼굴을 살폈다.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귀를 만지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저기.”

“말씀하십시오.”

“그……. 안 하는 거야?”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시작할까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가 마음을 바꿀까, 아란은 다급히 대답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대공이 조금 웃었다.

“너무 완강히 부인하시니 조금 서운하군요.”

그녀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정말로 아무 짓도 않으려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졌다. 규칙적인 대공의 맥박 소리와 따뜻한 햇볕이 눈꺼풀을 무겁게 했다.

가장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남자의 품이었다. 혈육을 죽이고, 그녀를 희롱하고 모욕하는 자였다. 그 품 안에서 이리 태평하게 졸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그러나 눈이 감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 차에 아침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던 터라 몹시 피로했던 것이다. 점점 잦아드는 숨소리를 눈치챈 대공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시간에 맞춰 깨워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주무십시오.”

대공의 목소리가 꿈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가 뭐라고 더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는데, 잠에 빠진 아란은 듣지 못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