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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6화 (6/146)

6화

아란은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고 계속 가슴으로 성기를 마찰시켰다. 모멸감과 수치가 언뜻언뜻 고개를 들었지만 억지로 무시했다. 지금 그녀는 황제도, 약혼자도 아닌 그저 노리개일 뿐이니, 그 쓸모를 증명하면 될 뿐이다. 노리개에게 수치 같은 건 과분한 감정이다.

그러나 열이 올라 예민해진 유두에 뜨거운 기둥이 닿을 땐 어쩔 수 없이 몸이 떨렸다. 어째서 이런 행위에 숨이 달뜨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음탕한 여자가 되어 버린 건가. 덜컥 겁이 났다.

아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이 사실을 들킨다면 틀림없이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러나 그만둘 수도 없었다.

“하읏.”

결국 작게 신음을 흘리자 대공이 실소를 흘렸다. 아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제 이런 행위로도 느끼시는 건가요.”

아란을 비웃으면서도 그는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성기가 그녀의 가슴과 유두, 목, 턱을 마구 문질렀다.

곧 그가 파정하고, 정액이 아란의 얼굴과 가슴에 온통 튀었다.

끝났구나.

아란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과 가슴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가 불쾌했지만 대공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닦을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천 마디의 희롱보다 그 눈길 한 번이 그녀를 더 비참하게 했다. 그래도 아란은 반항할 수 없었다. 명예 대신 수치를 택한 건 그녀 자신이었으므로.

감상하듯 한동안 아란을 그대로 앉혀두었던 대공이 마침내 젖은 천을 가져와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

“내, 내가 할게.”

이번에도 그녀의 말은 무시당했다. 꼼꼼하게 정액을 닦아준 대공이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잠깐, 씻고 싶어.”

“열이 나니 씻으시면 안 됩니다.”

그가 아란의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다정한 손길로 땀에 젖어 척척한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난폭하게 굴던 건 전부 그녀의 착각인 것처럼, 그는 어느새 가증스럽고 충직한 신하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대꾸할 힘도 없어서, 아란은 체념하듯 사지를 늘어뜨렸다. 흔적을 전부 닦아냈는데도 아직 몸에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는 일부러 그녀의 몸에 정액을 묻혔을 것이다. 그녀를 더 모욕하기 위해서. 아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곧 약효가 돌며 다시 잠이 쏟아졌다. 억지로 감기는 눈을 뜨려 했지만 대공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별수 없이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 수마가 덮쳐왔다.

완전히 잠에 빠지기 전에 아란은 그에게 물었다.

“저기, 오늘 일정들은…….”

“주무십시오.”

이마에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문득 다정했던 그의 예전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쓰렸다. 잠에 빠져드는 바람에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 * *

피로가 누적되었으니 며칠 더 쉬어야 한다는 궁의의 만류에도 아란은 고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잘게 떨리는 몸을 본 시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폐하, 그냥 쉬시는 게 어떨까요?”

“괜찮다. 이미 너무 많이 쉬었어.”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시녀는 다시 묻지 않았다.

정복으로 갈아입은 아란은 화장을 짙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답답하다는 이유로 평소엔 화장을 그리 즐기지 않는 그녀였지만, 도저히 지금 몰골로는 나갈 자신이 없었다. 미추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 사사건건 그녀를 물어뜯기 위해 혈안이 된 귀족들에게 사소한 것이라도 약점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떠세요?”

화장을 마친 그녀에게 시녀가 거울을 갖다 주었다. 거울 안에 우울하고 피로한 얼굴을 가진 여자가 비쳤다. 과장되게 칠한 뺨과 입술이 광대 분장처럼 우스웠다.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도 병약해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속을 모르는 시녀는 뿌듯한 얼굴로 거울을 치웠다.

침실을 나서기 전, 아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화려한 정복 아래 떨리는 몸을 감춘 그녀는 목과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두껍게 칠한 화장처럼, 꾸며낸 위엄과 허세는 아란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상석에 앉은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짙은 화장은 그녀를 더욱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아름답긴 하지만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한때 봄처럼 화사하게 웃던 소녀였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았다.

“왜 다들 대답이 없소.”

황제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전, 조세를 낮춰야 한다고 한 그녀의 말에 회의장 안은 불편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참석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켈론 후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조세는 예년과 비교하여 크게 올랐다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내년 예산안을 전부 짜놓은 상황에서 갑자기 조세를 낮추면 영지를 꾸려가는데 차질이 생길 겁니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3년 연속 큰 흉년이 들어 곤궁한 처지에 놓인 제국민들에게 더는 부담을 지울 수는 없소.”

“폐하께서 제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신 건 기쁜 일이지만, 영지마다 그에 맞는 구제법이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작이 과장되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태도로 완곡하게 참견하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몇몇 귀족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구제는 조세 감면이 선행된 후에 생각할 일일세.”

황궁에서 평생을 보낸 그녀는 평민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금만 계산해 보아도 그들의 생활이 곤궁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3년째 이어진 흉작으로 이미 평민들의 가계는 형편없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여기서 그녀가 뜻을 굽힌다면 많은 이들이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조세를 감면하면 황실의 세수 역시 줄어들 겁니다. 국고는 어떻게 채우실 생각이신지요? 대책이 있으신 겁니까?”

젊은 나이에 비해 관조적인 인상의 사일러스 공작이 물었다. 황제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각 영지에 감사를 파견해 불법으로 탈세한 세금을 받아낼 생각이오. 그대들도 아시겠지만, 일부 귀족들은 과도한 사치와 향락을 누리면서도 편법을 써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있소. 추징금을 받아내면 어느 정도 모자란 국고를 확보할 수 있소. 또한, 사치 품목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세수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오.”

“폐하.”

사일러스 공작은 기막힌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설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귀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귀족들과 척을 지는 건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닙니다.”

“못 받아들일 이유도 없지 않소. 나라가 어려울 때 베푸는 건 지배층의 의무가 아니던가.”

완강한 황제의 말에 찬물을 뿌린 듯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황제와 귀족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평소엔 몹시 얌전한 황제지만 간혹 지금처럼 고집을 부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귀족들과의 골만 깊어지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일러스 공작은 황제의 결연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황위에 앉기엔 지나치게 유약한 이였다. 제 한 몸 지키기도 벅찬 주제에 쓸데없이 올곧아 늘 적을 만들었다. 그는 황제의 그런 성정을 내심 좋아했지만 다른 귀족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약간의 호감이 있다는 이유로 제 살을 깎아 먹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공작은 힐끗 고개를 돌려 로아크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유일한 황제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강력한 패였다. 허수아비 황제가 작게나마 회의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전부 그 덕분이었다. 사일러스 공작은 그가 어찌 나올지 궁금했다.

이번만큼은 대공도 황제의 편을 들어주지 못하겠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제국의 모든 중대사가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감사가 이루어진다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사람이 바로 대공이었다. 사일러스 공작은 다시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화장 아래 감춘 얼굴은 필시 창백하게 질려 있을 터였다.

대공이 황제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다른 귀족 몇 명이 언성을 높여 항의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항의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자 보다 못한 사일러스 공작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현실적으로 조세를 낮추는 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뜻이 워낙 완고하시니 작년 수준으로 동결시키는 걸 고려해 보겠습니다. 폐하께서도 그쯤에서 양보해 주십시오.”

“하지만…….”

황제는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망설였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귀족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로아크 대공은 그때까지도 어떤 의견도 내지 않고 있으므로, 귀족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황제는 옷자락을 꽉 쥐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제 뜻이 전부 관철될 거라 순진하게 믿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을 상대하기엔 몸도 마음도 지쳤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이 정도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극심한 피로가 느껴졌다.

고작 동결 선에서 타협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고집을 피워봤자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장담은 없었다. 그나마 사일러스 공작이 중재해줄 때 타협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황제는 꺾이려는 목을 억지로 세워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수십 쌍의 눈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물어뜯을 것처럼 조여왔다.

허수아비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그들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황제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깨달았다. 귀족들은 인내심이 강한 자들이었다. 그녀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언제고 기다릴 것이다. 깊은 무력감이 가슴을 때렸다.

나는 혼자 높은 곳에 앉아 제국민의 고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만 하는 건가.

황제가 절망적으로 사일러스 공작의 제안을 수락하려 했을 때였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대공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로아크 대공령은 조세를 감면하고 감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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