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두 사람의 약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1년 만에 대공가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대공 부부는 즉각 처형되었고, 아란이 울며 선황에게 매달린 덕에 에녹은 목숨을 건졌다. 심지어 비록 천민으로 격하되었을지언정 노예가 되지도 않았다. 아란이 딱 사흘 식음을 전폐한 것만으로도 선황은 안절부절못하며 에녹을 황궁 시종으로 들였다.
더는 약혼자가 아니었지만 아란은 꽤 살뜰히 에녹을 챙겼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도취될 때도 있었다. 연인의 가문이 어떻게 되었든, 연인이 무사하니 아란은 여전히 행복했다. 가끔 에녹이 가여워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지만, 그 슬픔 역시 달콤하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행복은 약혼만큼이나 순식간에 끝났다. 그녀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던 부모가 마차 사고를 당한 것이다. 황후는 즉사하고, 선황은 불구가 되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실무를 떠맡은 황태자는 곧장 에녹을 군에 입대시켜 변방으로 내쫓았다. 아란이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나 오라비는 아비가 아니었다.
막내 누이의 재산을 탐내던 그는 아란이 자라 제법 여자티가 나기 시작하자 그녀를 부유한 멕스웰 후작에게 팔아넘길 계획을 세웠다. 후작은 아란보다 50살이나 많은 늙은이였다.
마침내 황제가 죽고 새로 황좌에 오른 황태자는 즉위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란과 후작의 결혼식을 추진시켰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 미리 잠입해 있던 에녹과 그의 군사들에 의해 황제를 비롯한 황가 남자들은 전부 참수되었다. 살아남은 황족은 이제 아란이 유일했다. 공포에 질려 옛 약혼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에녹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오래전, 당신께서 저를 살려주셨던 적이 있지요. 그 보답으로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명예롭게 자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제 좆을 빨며 목숨을 부지하시겠습니까?”
죽는 게 무서웠던 아란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피 묻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그녀는 서투르게 에녹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에녹은 살아남은 유일한 황족이던 그녀를 황제로 추대해주었다.
* * *
아란이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저무는 중이었다. 창문으로 길게 드리워지는 노을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상체를 조금 세운 것만으로도 눈앞이 핑핑 돌아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어디로 갔는지 시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일정들은…….
어제부로 건국제의 중요 행사들은 끝났다지만, 아직도 자잘한 일정이 남아있었다. 그걸 전부 불참하고 말았다. 아란은 자괴감으로 몸을 웅크렸다. 밤새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열이 나는지 몸에 한기가 돌았다.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좋지 않다 사정했는데도 대공은 봐주지 않았다. 조금만 거칠게 하면 금방 열이 올라 꼼짝 못 하는 줄 알면서,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결국 도중에 혼절하다시피 잠들고 말았다.
아란은 고개를 조금 돌려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어제 그녀가 그 위에 엎드리고 누워서 당했던 행위는 전부 꿈인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아래를 만져보았다. 누가 닦아주었는지, 식은땀으로 온몸이 끈적한 와중에도 그곳에 다른 체액의 흔적은 없었다.
“으…….”
그러나 혹사당한 성기는 스치기만 해도 절로 신음이 나올 만큼 퉁퉁 부어있었다. 며칠간은 앉기도 불편할 것이다.
아란이 아래에서 손을 뗐을 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한순간 대공인가 싶어 잔뜩 몸을 웅크렸는데, 다행히 그녀를 모시는 시녀 중 한 명이었다.
“깨어나셨어요?”
시녀가 침대 옆에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 위에는 시원한 꿀물과 묽은 수프가 놓여 있었다.
“너무 일어나지 않으셔서 깨워드려야 할지 고민했어요. 식사하시겠어요?”
공손하긴 하지만 황제를 대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스스럼없다. 아란은 굳이 그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시녀의 태도가 지금 그녀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로아크 대공의 허수아비, 권력이라곤 없는 허울뿐인 황제.
반정 이후로 오래 황가에 충성했던 이들은 전부 제거되었고, 그 자리를 대공의 사람들이 채웠다. 지금 아란은 명목뿐인 황제로, 대공의 비호가 없다면 바로 끌어내려질 처지였다. 로아크 대공이야말로 제국의 진정한 황제였다.
“입맛이 없다.”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꼭 먹이라 하셨는걸요. 너무 무리하셨다고 걱정하셨어요.”
아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몸이 약했고, 최근엔 건국제 때문에 바쁜 일정을 감내해야 했으니 신하로서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가까이서 아란을 모시는 시녀들이라면 그녀와 대공과의 관계를 모르지 않을 터였다. 지독히 눈치가 없는 자라도 그녀가 밤새 내지르는 신음을 들을 귀는 있을 테니까.
대공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란은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그녀가 식사를 거부하면 시녀가 곤란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대외적으로 대공은 차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굉장히 변덕스럽고 예민한 남자였다. 그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무슨 트집이 잡힐지 몰랐다.
바로 어제도 그랬었지.
아란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까끌한 입안에 수프를 밀어 넣었다.
“서류는 누가 치웠지?”
“대공께서 보시겠다며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공이 확인한다면 무역 건에 대해 제때 승인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아란의 의견을 묻거나 승낙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대공이었으니.
오늘 일정도 그가 수습했으려나.
권력을 빼앗긴 것에 분노는 일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황제의 그릇이 못 된다는 건 아란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몸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정무에 매달리곤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면 괴로운 처지를 조금은 잊을 수 있었다.
수프를 몇 수저 넘기고 아란은 식사를 물렸다. 시녀는 더 권하지 않고 접시를 치웠다. 이번엔 약을 먹을 차례였다.
지독하게 쓴 약을 삼키고 나니 혀가 마비될 것 같았다. 그래도 음식과 약을 먹고 나니 조금 힘이 나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시녀가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식은땀에 몸이 끈적해 씻고 싶었지만 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란은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일정을 망쳤으니 공부라도 해야 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걸 못마땅히 여겼던 부황 때문에 그녀는 황제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많이 몰랐다.
의자에 앉자 역시나 아래가 쓰라렸다. 애써 고통을 모르는 척하며 책장을 넘겼다. 시녀가 그녀의 어깨 위에 두꺼운 담요를 걸쳐주었다. 그래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오늘은 그냥 쉬세요, 폐하.”
보다 못한 시녀가 말렸지만 아란은 고집스럽게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괜찮다. 너도 이만 쉬려무나.”
“폐하께서 편찮으신데 제가 어떻게 쉴 수 있겠어요.”
시녀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녀가 있어서 편한 자세로 앉을 수 없는 게 더 불편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이 어제 대공이 한 말을 연상시켜 마음이 답답해졌다.
결국 반강제로 시녀를 돌려보내고야 말았다.
시녀가 나가자마자 아란은 의자 위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제야 통증이 조금 가셨다. 그녀는 책을 내려놓은 채 무릎 위에 얼굴을 기댔다.
“이런 게 황제라니…….”
귀족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지금껏 그녀처럼 한심한 황제도 없을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황제. 가끔은 대공이 자신도 죽이고 황좌에 앉는 게 나라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란은 멍하니 제 앞에 펼쳐진 책을 바라보았다. 노력하면 할수록 우스워 보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제국의 황제는 그녀였고, 제위에 오른 동안에는 제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고 싶었다. 얼마나 황제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란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억지로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나 점점 앉아있는 것도,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워졌다.
종일 아무것도 안 한 주제에 뭐가 힘들다고. 남은 시간까지 헛되이 보낼 수 없다며 아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 때,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보폭이 넓은 그 소리는 결코 여자의 걸음이 아니었다. 이 시간에 황제의 침실을 찾을 남자는 단 한 명뿐이다. 아란은 그대로 굳었다.
제발, 오늘은…….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란의 희망을 배신하며 낮고 울림이 풍부한 음성이 정중히 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곳이라도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던 아란은 서둘러 책을 덮고 침대 위에 누웠다. 자는 척을 하면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폐하.”
재촉하듯 그가 다시 아란을 불렀다. 아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았다.
어젯밤 그렇게 괴롭혀놓고 또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은 도저히 그런 행위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흉기에 가까운 그의 것이 들어오는 순간 소리 내어 엉엉 울게 분명했다.
그러면 분명 화를 내겠지.
화가 난 그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아직 그녀를 때리거나 폐위시키겠다고 협박한 적은 없지만, 여태 그랬다 해서 앞으로도 무사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할 수 있었다. 아란은 아직도 그의 검에서 뚝뚝 떨어지던 오라비의 핏방울을 잊지 못했다.
마침내 인내심이 사라진 그가 문을 열었다. 대공은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아란이 누운 침대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