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화 (1/146)

제국의 17대 황제 아란흐로드 에린 라인스터.

그녀가 오라비들을 제치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로아크 대공 덕이었다.

황제의 제일가는 충신, 유일한 지지자.

"폐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귀족들은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헌신적인 그를, 황제는 냉담하게 대할 뿐이었다.

실로 이상한 군신관계였다.

*

밤.

문이 벌컥 열리고, 남자가 허락도 없이 황제의 침실에 발을 내디뎠다.

"대공..."

어느새 시녀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부탁할게. 오늘은 도저히 내키지 않아서...."

그 앞에선 황제의 위엄도, 권위도 소용없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간청뿐이었다.

"여간해선 폐하의 청을 들어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저도 참기 힘들군요."

부드럽게 웃은 대공의 눈이 그녀의 몸을 집요하게 훑었다.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속옷이 찢겨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조금 거칠지도 모릅니다. 낮의 일로 심술이 나서."

1화

해가 질 무렵, 사냥을 나갔던 이들이 저마다 잡은 짐승을 들고 기세등등하게 돌아왔다. 웃고 떠드는 소리, 말발굽 소리, 쇳소리가 섞여 금세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커다란 차양 아래 앉아있던 황제가 눈가를 미미하게 찌푸렸다. ‘건국제’라는 이름 때문에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단순히 유희만을 위한 살상행위를 황제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다. 피 냄새가 가까워질수록 치미는 욕지기를 그녀는 간신히 참아내었다.

불쾌한 황제의 속내를 모르는지, 그녀 앞에 도착한 귀족들은 자랑스럽게 제가 잡은 사냥감을 내보였다. 사냥에 참가한 이들 중 우승자를 가려 치하하고 상을 내리는 건 황제의 몫이었다.

간단한 논의 끝에 상을 받을 후보가 얼추 추려졌다. 선명한 붉은 털을 가진 여우를 잡은 프란시스 백작 부인, 커다란 멧돼지를 잡은 비에른 후작, 그리고 놀랄 만큼 희귀한 은빛 사슴을 잡은…….

황제는 마지막 후보를 외면하며 손가락을 들어 여우를 가리켰다.

“선명한 다홍빛이 짐의 눈길을 끄는구나. 가죽에 상한 부분이 거의 없는 걸 보니 그만큼 잡은 이의 사냥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겠지. 프란시스 백작 부인을 올해의 우승자로 결정하겠다.”

건국제의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는 건 대단한 영예였다. 그러나 막상 지목받은 프란시스 백작 부인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 역시 예상치 못한 결과에 수군거렸다.

백작 부인은 얼른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한 목소리로 상을 거둬줄 것을 청했다.

“폐하께서 보잘것없는 저의 사냥 실력을 높이 평가해주시니 이는 더없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에겐 너무 과분한 영예입니다. 외람되오나, 희귀하고 아름다운 은사슴을 잡은 로아크 대공께 그 영예가 돌아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그대는 지나치게 겸손하구나. 하나 짐이 그대를 우승자로 지목한 건 타당한 결정이다. 보아라, 비에른 후작의 멧돼지는 날붙이에 지나치게 찔려 가죽이 전부 상했고, 로아크 대공의 사슴은 언뜻 온전해 보이나 입에 피거품을 물고 있다. 일부러 죽이지 않고 오래 사냥감을 몰아 희롱한 흔적이지. 반면 그대의 여우에게선 목에 있는 치명상을 제외하곤 어떤 흠집도 찾아볼 수 없어. 단숨에 급소를 꿰뚫은 건 필시 사냥감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의도였겠지. 미물이라 하나 생명을 거둘 땐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대가 잡은 여우보다 희소하고 값비싼 사냥감이 있을진 몰라도 이 자리에 그대만큼 자격을 갖춘 사냥꾼은 없구나.”

황제가 그렇게 말하니 백작 부인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감동한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제야 박수가 터졌다.

우승자가 정해졌으니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 연회를 즐길 차례였다. 건국 20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는 여느 때보다 성대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하인들이 부지런히 제 주인들의 시중을 들고 사냥감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심히 말 위에 올라탄 로아크 대공에게 비에른 후작이 다가왔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공. 응당 공께서 받으셔야 할 상이 아닙니까? 세상에, 은빛 사슴을 제치고 그깟 여우가 다 뭡니까? 아무튼, 폐하께선 지나치게 고지식하시다니까요. 모두가 공을 진짜 우승자라 생각하고 있으니 공께선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십시오.”

“아니요,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은사슴을 발견하고 너무 흥분했더니 사냥감에 대한 예의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폐하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전 그걸로 족합니다.”

대공의 말에 후작이 껄껄 웃었다.

“하여튼, 공께선 제국 제일가는 충신이시라니까요. 한데 폐하께선 왜 그리 공께 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폐하를 황위에 올린 것도 전부 공―”

“후작.”

로아크 대공이 싸늘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갑작스레 변한 대공의 태도에 비에른 후작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 마른 침을 삼켰다.

반평생 국경을 지켜온 그였다.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이와 비교해 기세가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제 아들보다 어린 대공 앞에서 범을 만난 생쥐처럼 위축되었다.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선 입조심을 해야 하는 법이지요. 고귀하신 분을 입에 담을 때는 더더욱.”

그 말을 끝으로 로아크 대공은 속력을 높여 황제가 탄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널찍한 등을 보며 비에른 후작은 치미는 욕을 삼켰다. 새파란 놈에게 기가 눌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분노는 배가 되었다.

재수 없는 새끼. 저놈은 제 별명이 황제의 충견이라는 건 알긴 할까. 하여튼, 주인을 닮았는지 개 역시 재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대공이 호위하듯 황제의 마차 뒤쪽에 섰을 때, 갑자기 마차가 멈추더니 창문이 열렸다. 뒤이어 황제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창백하게 질린 게, 멀미라도 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창문을 열고 숨을 몰아쉬는 황제에게 로아크 대공이 재빨리 다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황제는 건네진 손수건과 대공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없이 창문을 닫아버렸다.

무안할 법도 한데,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수건을 가까이 있는 시녀에게 건넸다.

“필요해질지도 모르니 일단 챙겨두십시오.”

“예.”

손수건을 받아드는 시녀의 얼굴이 수줍게 붉어졌다. 시녀는 잠시 그 손수건의 주인이 자신이었다면, 하고 상상해보았다. 이토록 수려하고 다정한 사내의 호의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황제를, 시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황궁에 도착하는 내내 황제가 그 손수건을 사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시녀는 대공의 손수건을 차지하는 작은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 * *

황제는 연회장에 겨우 얼굴만 비치고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주변에 있던 사람 몇이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진심으로 붙잡지는 않았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고, 놀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아첨 섞인 농담을 받아줄 줄도 모르는 황제가 그 자리를 지키는 건 모두에게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침실로 돌아온 황제는 저녁도 거르고 곧바로 침의로 갈아입었다. 짓누르는 것 같던 예복을 벗어내자 울렁이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에 붉은 피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피보다 더 붉은 그 눈동자.

무안을 주었다고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사냥 대회 결과에 불만이 있을 텐데.

뒤늦게 걱정이 몰려왔지만,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 눈을 계속 보고 있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토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조금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폐하,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곁에 서 있던 시녀가 물었다.

“괜찮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론 식사는커녕 물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어지러움을 참고 의자에 앉았다. 황제의 업무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몸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일을 거를 수는 없었다.

멀리서 떠들썩한 웃음과 고함, 음악 소리가 들렸다. 평소엔 점잖은 체하는 귀족들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냥이 끝나도 그들은 아직 그 흥분에 젖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고, 고함을 지르고, 눈이 마주치는 대로 뒹굴었다.

황제는 문득 그들 사이에 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도 저 소란에 장단을 맞추고 있을까. 거추장스러운 체통 같은 건 벗어 던지고, 가까이 있는 여자를 끌어당겨 입을 맞출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녀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황제는 잡생각을 떨치려 애쓰며 눈앞의 글자에 정신을 집중했다. 다행히 그녀는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소음도, 남자의 얼굴도 잊어버린 채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제는 아까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구―”

미처 물을 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오늘 같은 날에도 서류를 들여다보십니까?”

키가 훤칠한 남자가 허락도 없이 황제의 침실에 발을 디뎠다. 황제는 그 무뢰배를 호통칠 생각도 못 하고 천천히 굳은 몸을 일으켰다.

“대답이 없으시기에 허락인 줄 알았더니 종이 따위에 정신이 팔리셔선.”

그가 작게 혀를 찼다. 황제는 재빨리 문밖을 살폈다. 어느새 시녀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을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시녀부터 호위기사까지, 최측근에서 그녀를 보필하는 사람들은 전부 남자가 부리는 자들이었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얼굴도 희게 질렸다.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더 즐기지 않고.”

침착하려 애썼으나 목소리 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군께서 편찮으신데 신하 된 도리로 마음 편히 연회를 즐길 수는 없지요. 귀찮게 구는 자들을 떼어놓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자못 걱정스러운 어조였으나 황제는 그게 전부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라고 말하려는데, 남자가 빠르게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 등불이 일렁이며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황제의 눈엔 그가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는 수도 없이 많은 목숨을 거두었다.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과 목을 어루만졌다. 황제가 그 손을 뿌리쳤다. 무례함에 화가 났다기보단 겁에 질린 동물처럼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남자는 제 손을 뿌리친 황제의 손을 붙잡아 가볍게 입을 맞추곤, 아직도 그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다시피 넘겨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안색이 창백하십니다. 폐하께선 늘 무리하시니 걱정이 됩니다.”

“……그래. 그 말을 들으니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 그러니 그대도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떤지.”

황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 로아크 대공은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는 그 눈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겁을 먹었다. 오늘처럼 무고한 피를 본 날이면 더더욱 그랬다. 불현듯 피거품을 물고 죽은 은빛 사슴의 얼굴이 떠올라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돌아갈 겁니다. 폐하의 옥체가 불편하지는 않으신지 확인한 후에 말입니다.”

대공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황제의 허리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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