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이윽고 식탁 위에 식기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미령은 찜을 덜다 말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강주를 응시했다. 눈을 내리깐 채 우아하게 식사하는 사내가 보였다.
이렇게 보면 참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위기인데, 어쩌다 이런 사이가 됐을까.
몇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눈을 떴을 때, 무엇보다 놀란 건 차강주라는 존재였다.
딸아이들이야 똑같았다.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여운 제 새끼들. 앳된 재희는 어느새 사회인이 되어 있었고 마냥 어린 것 같던 효정은 훌쩍 큰 대학생이 되었지만 그래도 재희와 효정이었다.
이전에 알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제 딸들이었다.
하지만 차강주는 달랐다. 강주 학생. 제 기억 속 강주 학생은 어려운 상대였다.
오만하거나 교만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까다로워 대하기가 힘들었다. 말이 그다지 없는데도 늘 존재감이 컸고 어린 나이에도 눈빛이 유독 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보다 특유의 침착한 분위기가 먼저 눈길을 끄는 아이였다. 이따금 속으로 주책스럽게 그의 부인이 될 이를 상상하기도 했었다.
'강주 학생 부인은 은근히 힘들겠어..........'
중심이 딱 잡혀 있는 데다 은근히 고집이 있고 대쪽 같은 기질을 가져, 배우자가 힘들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바 였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 강주 학생의 부인이 제 딸이라는데.
오지랖을 부리며 걱정했던 그 자리에 제 딸이 떡하니 앉아 있는데... 그건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게다가.......
“재희 씨, 입맛이 없어요?"
재희를 걱정하는 강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강주 학생이 저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재희의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도 늘 섬세히 반응하며 다정히 대해 줄 줄이야. 회상을 벗어난 미령이 저 역시 재희를 향해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게, 재희야, 밥도 거의 못 먹었네.”
그제야 재희가 수저를 놓았다. 안 그래도 억지로 움직이던 참이었다. 그릇 안 쌀이 그다지 줄어 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식욕이 없네........... 음식 냄새도 좀 그렇고."
미령이 제 접시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냄새가 좀 그래? 상했을 리는 없는데.”
과거, 자신의 10년 넘은 도우미 경력이 말해 오고 있었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분명 신선한 해물로만 이걸 만들었을 게 분명했다.
“상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속에서 좀 안 받아.”
둘러대는 재희의 말에 강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다른 찬으로라도 먹어 봐요."
냉장고에 남아 있을 다른 음식을 살펴보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 끼라도 굶는 사태를 용인할 수 없다는 의지가 다분해 보였다. 재희가 강주의 손을 붙들어 앉혔다.
이러다가 그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계란 프라이를 부치게 생겼다.
“강주 씨는 마저 먹어요. 진짜로 입맛이 없어서 그래. 억지로 먹다가 체할 것 같아.”
강주는 다시 수저를 들지 않았다. 재희의 이마를 짚어 열이 있는지 확인한 뒤에 걱정스레 다시 물었을 뿐이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다니까요.”
“정 박사님이라도 불러야겠어요.”
그의 표정이 다시 강경해졌다. 주치의를 당장 부르겠다는 그의 말에 재희는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한 끼 굶은 거로 누가 진찰을 받아요?"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강주는 마치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싸고돌았다.
하지만 그 관심과 사랑이 솔직히 싫지만은 않아 재희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한편, 둘을 바라보는 미령의 표정은 묘했다. 갑자기 입맛이 없다는 딸아이. 퇴근하고 나면 유독 식욕이 돈다며 한 그릇을 싹싹 비우던 재희가 갑자기 냄새가 별로라며 밥그릇을 밀었다.
“재희야.”
“응. 엄마.”
“너 혹시..."
“응?”
재희는 순진무구하게 대답했다. 미령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강주 역시 같은 표정으로 미령을 응시했다. 제 장모님이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미령은 순수해 보이는 두 젊은이를 향해 어렵게 입을 떨어뜨렸다.
“너 혹시 임신한 거 아니니?”
정적이 셋을 휘감았다.
그리고 약 3초 뒤,
“아이가?”
강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웬만해서는 감정의 동요를 잘 드러내지 않는 남자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화들짝 놀랐다.
미령은 강주의 태도에 더 놀랐다. 텅그렁! 미령이 들고 있던 숟가락이 아래로 떨어졌다.
재희는 놀란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엄마가 한 말이 흘러들어 왔으나 현실 감각이 없어 고개만 슬쩍 기울일 뿐이었다.
“보기 좋지요?”
미령이 영현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제 아들이 좀 유난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둘이 참 예쁘네요."
빙긋 웃은 영현이 미령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미술관 화단이 보이는 2층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저 아래, 손을 맞잡고 화단을 거니는 재희와 강주가 보였다. 여지없이 사이좋아 보이는 부부였다.
결혼한 지도 꽤 됐는데 아직 저렇게 좋을까....... 재희를 싸고도는 강주를 보며 영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재희와 강주, 영현과 미령. 두 사돈이 미술관에서 만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주말이었다.
미령이 온전하게 건강을 되찾은 뒤로, 종종 이런 시간을 자주 갖고는 했다.
영현은 미령의 조용하고 진중한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고, 미령 역시 영현의 화통한 성격이 흡족했다.
같은 집에 살았어도 마주칠 일 없던 두 사람이, 재희와 강주의 결혼을 계기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퍽 좋은 인연이 된 건 사실이었다.
최근 영현은 해외 생활을 아예 정리했다.
과거 그녀는 일 년 중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는데, 강주의 결혼을 계기로 모두 청산한 것이다.
그녀에게 해외 생활은 도피였다. 제 치부로부터, 과거로부터의 도피. 눈을 감고 귀를 가리면 해결될 줄만 알았다.
덮어만 놓으면 덮일 줄 알았다. 의도적으로 외면하다 보니 한국은 더욱 머무르기 힘든 곳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제게 마음을 연 강주와 제 딸. 새로 생긴 가족, 며느리. 삶은 평온해졌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마음 붙일 곳이 생기니 더 밖으로 나돌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아들 강주 부부! 에게는 최근 아이까지 생긴 터였다.
자신이 늘 바라고 고대하던 손주가 이제 곧 태어날 것이다.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영현은 하루하루 달력에 동그라미를 체크했다.
재희의 출산 예정일을, 재희보다 그녀가 더 꼼꼼히 챙겼다. 영현이 테라스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강주와 재희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커다랗게 부푼 배를 안고 재희는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만 보는데도 괜히 마음이 흐뭇해졌다.
강주는 재희를 테이블 의자에 천천히 앉혔다.
"조심해요. 의자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바닥에 자갈돌이 깔린 터라 걱정되는 모양이다. 의자에 앉은 재희가 다리를 쭉 뻗고는 잘게 웃었다.
“내가 애예요? 의자 흔들릴 걱정까지 하게."
“애가 배에 있으니 재희 씨도 애예요."
강주가 단호하게 답했다. 다정한 말 속에 딱딱한 의지가 박혀 있었다. 재희는 다시 웃으며 발목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요새 다리가 붓기 시작했는데 걷다 앉으면 피가 몰리는 느낌이 퍽 불편했다. 재희 옆에 앉은 강주가 재희의 배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생명체가 있을, 사랑스럽게 부푼 동그란 배. 보이지 않는 이 속에 저와 재희의 결실이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벅찼다.
그래서, 마치 경배하듯 시도 때도 없이 재희의 배를 어루만지는 게 최근 그의 버릇이 됐다.
재희가 강주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커다란 그의 손을 다 덮을 수는 없었지만 겹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새삼 신기하죠? 여기에 우리 애가 있다는 게.”
말이 끝나자마자 안에서 퉁, 하고 태동이 느껴졌다. 만삭에 가까운 터라 아이의 움직임은 꽤 활발했고 낮과 밤에 걸쳐 시도 때도 없이 움직였다.
아이가 지금 신이 나 발을 찼으니 강주도 분명 느꼈을 터다. 강주는 말없이 그녀의 배를 천천히 쓸었다. 무척 소중한 것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난 아직 믿을 수가 없어요."
강주에게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강주는 그녀가 품고 있을 아이와 교감하듯 봉긋 솟은 배를 쓰다듬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늘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자신과 재희를 이어 줄 생명체가 손 아래 있다는 이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녀와 자신 사이에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끈이 생겼다. 아이의 존재 자체도 행복이었으나, 재희가 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더욱 그를 경이롭게 했다.
과거엔 그녀를 임신시키려 노력했었다. 비열한 작당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가지고 싶었다.
아이라도 생긴다면 붙들 수 있지 않을까. 제 곁에 어떻게든 둘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돌아봐 주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강압적으로 그녀를 취한 적도 있었다.
자신은 그토록 저열한 인간이었다. 가질 수 없는 그녀가 탐이 나 그녀를 탐욕스레 집어삼키려 했었다.
하지만 재희는, 순수하고 올곧은 그녀는.
강주는 부푼 배를 만지던 손을 내려 재희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재희는 아무런 조건 없이 곁에 있어 준다고 했다. 비틀리고 어리석은 자신을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고, 품어 주었다.
따뜻하게 안아 주고 웃어 주었다. 그녀가 웃고 울 때마다 제 세상도 피었다가 졌다. 그녀의 눈물과 웃음, 슬픔과 기쁨이 모두 곁에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행복해 늘 환상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제 아이가 생기면 본인은 아빠가 되리라. 누구에게도 받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이에게 모든 사랑을 퍼부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재희에게 받는 사랑이 너무나 커서 아이에게 나누어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하지 않았다.
“음. 너무 꽉 잡으면 아파요, 강주 씨."
재희가 강주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강주는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 늘 다가가 당기고, 옥죄어 끌어안고만 싶었다.
그런 충동을 참다가 정신을 차리면 재희가 옆에 있었다. 마주하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강주는 재희를 더욱 놓을 수 없었다.
강주는 그녀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품 안에 들어오는 작은 어깨를 느끼며 보드라운 뺨 위에 입을 맞췄다. 따뜻한 풀 내음과 재희의 향기가 스쳤다.
“사랑해. 재희야.”
차오르는 마음을 고백하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그녀의 체온을 당겨 단단히 품었다.
“나도.”
돌아오는 짤막한 답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