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외전2
차 회장은 맞은편을 응시했다. 닿지 않는 상대를 향해 주먹을 꽉 움켜쥔다. 세상과 절 단절시킨 차가운 창. 그 맞은편에 제 아들이 있었다.
피 하나 섞이지 않은, 제 전 부인이 누구와 들러붙어 만들었는지 모를 놈이, 강주가 무표정하게 물어 왔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차 회장은 분노를 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푸른 죄수복과 강주의 멀끔한 양복이 둘의 위치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 차강주 새끼만 아니었다면, 저놈의 부인과, 저놈의 어미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호령했을 것이며 누구든 발아래 깔고 있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방에 갇혀 날개가 꺾인 채 시간만 흘려보내는 일은 결단코 없을 일이었다. 차 회장은 동요를 숨겨 애써 목소리를 깔았다.
“덕분에 아주 잘 지냈다."
“그게 제 덕이겠습니까. 다 아버지 능력이시죠.”
강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날아왔다. 강주의 여유로운 미소를 마주하자, 최 화장의 낯에 그제야 균열이 갔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 했다. 제 자식도 아닌 놈을 몇 년이나 친아들인 척 품었거늘 돌아오는 것이 이따위일 줄이야.
“여기는 왜 온 게냐.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차 회장의 흥분에도 강주는 동요 하나 없었다. 강주는 차 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시은이 곧 결혼합니다.”
“결혼? 내 허락도 없이 감히 누구와..........”
“아버지도 아시는 분입니다. 권기석 실장과 해요.”
“뭐!”
차 회장이 유리창 너머로 고함을 질렀다. 숨길 수 없는 당황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시은이가, 애지중지 곱게 키운 제 시은이가 고작 해 봐야 권 실장과 결혼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감히 권 실장 따위가 어찌 감히 우리 시은이를, 정신이 나간 결정이다. 정신 나간 결혼이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의 차강주 놈은 몰라도 전 부인이었던 유영 현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 오만한 여자가 시은과 권 실장의 결혼을 허락했다고?
“거짓말이야! 우리 시은이가 그까짓 놈과 결혼할 리가 없어!"
거짓이 분명했다. 차강주가 자신을 기만하기 위해 꾸며 낸 불쾌한 거짓말이 분명했다. 시은이가 자신의 허락 없이 권 실장 따위와 결혼할 리 없다.
저놈과 달리 시은은 자신의 피가 섞인 진짜 딸이다. 이런 배신 같은 일을 벌일 리가 없었다.
"네가 날 기만하려고 이깟 거짓말을!”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강주가 무료한 표정을 지었다.
“시은이가 아버지께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기에 대신 온 겁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만나기 싫어하셨거든요.”
"뭐... 및.......”
차 회장의 경직된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끄으으, 하고 신음이 목 안에서 걸렸다.
그에겐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완벽한 계획이 있었다. 이곳에서 몇 년 썩다가 나가면 다시 제 세상이 펼쳐지리라 의심치 않았다.
가족도 필요 없었다. 차강주란 놈과 유영현이란 부인은 애초에 제 세상에 없던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시은이는 아니었다. 시은이만 바라보며 다시 도약하려 했었다. 보란 듯 재기하여 다시 세상을 호령할 것이었다.
한데 시은이가 어째서. 어찌 시은이마저...
강주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회장의 핏발 선 시선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강추가 투명한 벽 너머 공간을 조용히 훑었다.
“안락해 보이네요.”
“아버지가 절 가두셨던 창고보다는."
그리고 옅은 미소와 함께 등 돌렸다. 차 회장은 패배자처럼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계단을 찬찬히 걸어 나오는 강주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먼지 낀 창문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 울,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던 비는 금세 폭우가 되어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주는 관자놀이를 지끈 눌렀다. 비다. 또, 비다. 비를 보자 다시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잘게 출렁이며 절 집어삼키려 했다.
“후.”
강주는 눈꼬리를 문지르고는 다시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의 몸 뒤로 펼쳐진 창문 밖, 비가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1층 로비 안으로 들어서기 전. 강주는 휴대 전화를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운전기사를 부를 것인가, 택시를 부를 것인가.
새까만 휴대 전화를 꽉 쥔 채 무표정한 얼굴로 고민하는데 어떤 목소리가 환청처럼 귀에 꽂혔다.
“강주 씨!”
강주는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믿기지 않는 탓이다. 이 시간에, 이 장소에 그녀가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환청이 아니었다.
로비 끄트머리에 재희가 있었다. 가볍게 웃는 얼굴로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 워질 때마다 고막을 아프게 찢어내는 것 같은 폭우 소리가 찬찬히 가라앉았다.
"비 온다는 소식에 걱정되어 와 봤어요. 괜찮아요?”
재희는 강주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애써 밝게 물었다. 비가 올 때마다 휘청이고 흔들리는 그를 안다. 그렇기에 부러 쾌활하게 목소리를 내 보는 것이었다.
“내가 운전할게요. 강주 씨는 편하게 옆에 앉아 있어.”
“집에 얼른 가서 뜨거운 물에 씻고, 따뜻한 차 마시자.”
.
“응?”
재희는 불안함을 숨기고 고개를 기울여 강주에게 응? 하고 되물었다. 강주에게서 계속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또 초조한 걸까. 또 힘든 걸까.
무표정해 보이는 그의 얼굴 뒤,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 걸까. 강주는 물끄러미 재희를 내려 보았다.
제 손을 잡고 절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꿈에서 깬 것처럼 주위가 밝아졌다.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녀가 있었다.
강주는 제 손을 붙든 재희의 손을 떨어뜨린 후, 자신이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았다. 차갑게 식은 손에 그녀의 따뜻한 손이 당자 온기가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요, 얼른 가요.”
그녀의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로비 밖, 쏟아지는 비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빗소리보다 제 옆에서 걷는 재희의 구두 굽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차가운 바닥과 맞닿는 차가운 굽 소리가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다가왔다.
건물 입구에서 나자 강주는 재희가 챙겨 왔던 우산을 활짝 폈다. 재희의 어깨를 끌어안아 자그마한 몸을 이끌고 차를 향해 다가섰다.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차가 있었다.
지체 없이 다가가 문을 열자 강주의 팔에 매달려 있던 재희가 깜짝 놀라 그를 붙들었다.
“강주 씨?"
강주가 차 문을 열어 절 안내한 곳이 조수석이었기 때문이다.
“응, 왜요.”
“강주 씨, 저기......"
강주가 재희를 차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수석 문을 닫고는 자신이 운전석에 앉았다.
차 문을 닫자 퍼붓던 빗소리가 벽에 막힌 것처럼 잦아들었다. 시간을 두지 않고 강주는 시동부터 걸었다. 재희가 운전대에 올라온 강주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저... 강주 씨가 운전하려고요?”
“네.”
".....괜찮아요?"
힘들 텐데, 재희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강주는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응, 괜찮아.”
강주가 재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곤 앞을 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는 비를 뚫고 부드럽게 바퀴를 움직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물방울이 강처럼 흘러내렸다가 흩어졌다. 강주는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라디오를 틀었다. 때마침 부드러운 선율의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아예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다. 하지만 막상 한발을 내디딘 이 순간, 우스울 만큼 마음이 평온했다.
그건 아마도 제 옆에 있는 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리라. 강주는 고개 돌려 옆을 응시했다. 자신보다 더 불안해하는 것 같은, 순진한 초식 동물처럼 눈동자를 반짝이는 재희가 결에 있었다.
상체를 내려 그녀의 다물린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뜨는 눈이 귀여웠다.
쪽, 하고 얼굴을 떨 어뜨리자 어느새 신호등은 녹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문득 미소까지 맺혔다. 제게 트라우마를 주었던 차 회장은 차가운 철창 안에 있다.
비 오던 창고 안,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누워 있던 재희는 제 부인이 됐다.
자신이 손을 뻗으면 잡아 주고 두 팔을 벌리면, 마주 안아 주었다. 제 곁을 떠나지 않고 영영 있어 줄 터였다.
제 구원이 옆에 있으니 절 덮쳤던 트라우마도 찬찬히 떨쳐 낼 수 있으리라. 한 걸음 한 걸음씩 천천히.
“뽀뽀 좀 하려고 했는데 신호등이 바뀌네요. 아쉽게.”
짐짓 농담을 건네자 하아, 하고 그녀의 숨소리가 떨어졌다. 안도에 찬 듯한 작은 소리.
“다음 신호등에 걸리면 또 해요. 나도 강주 씨랑 뽀뽀하고 싶으니까.”
재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주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재희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끄트머리가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 억지 미소 같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단정하고 얼굴 옆선은 평온해 보였다.
핸들을 잡은 그의 손등이 단단하다. 그는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