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바작 바작, 재희는 강주가 건넨 초콜릿 과자를 먹었다. 차창 옆으로 붉게 타오르는 한강이 보였다. 여지없이 평온한 퇴근 시간이었다.
“오늘 저녁은 어머님 댁으로 가서 먹는 거예요?”
“네, 재희 씨가 좋아하는 갈비찜 준비해 놓으셨대요."
“어머, 감사해라.”
재희는 부스러기를 톡톡 털며 웃었다. 결혼 이후, 재희는 일주일에 한 번은 강주의 본가에서 저녁을 먹었다.
결혼 전에는 탐탁지 않아하는 시어머니 영현을 무작정 찾아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꽤 달라졌다.
영현이 버선발로 먼저 환영해 주는 것이다.
도도한 재벌가 사모님이 언젠가부터 살갑고 다정해졌다.
그 모습이 새로워 재희 역시 강주의 본가를 방문할 그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화기애애 시간을 보내노라면 어느새 훌쩍 밤이 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늦은 밤에는 본가에서 자고 가는 일도 빈번했다. 본가에 도착하자 시은과, 시은의 애인인 권기석 실장까지 모여 있었다.
"어서 오렴, 오느라 수고했어.”
현관 앞까지 마중 나온 영현이 재희를 안으로 잡아끌었다.
“죄송해요, 차가 조금 밀렸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목 빠지는 줄 알았지. 둘 다 워커홀릭이라 큰일이야. 얼마나 회사에 충성하려고?"
재희는 대답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재희와 강주의 결혼 직후, 영현은 은연중에 재희의 퇴사를 바랐다.
'재희야, 이제 슬슬 퇴사하는 건 어떠니? 적적할 것 같으면 내가 미술관에 자리 하나 줄 테니까. 어때?"
그럴듯한 직함 하나 준 후 유유자적하게 해 준다는 취지였다.
제 며느리가 마케팅 팀 주임이라는 명함을 달고 근무한다는 사실도 껄끄러웠거니와 그들의 2세를 누구보다 바랐기 때문이다.
집에서 쉬며 얼른 손주를 안겨 주었으면 하는 속마음이 다분했다.
하지만 재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해요, 어머님. 제가 이 자리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사근사근 부드럽게 거절하는데 어찌나 대쪽 같은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영현 역시 포기했다.
강주와 떨어져 있으라 제안했을 때에도, 당돌하게 '귀국하면 복직시켜 주세요.'라며 말해 왔던 재희 아니었나.
애초에 그런 고집이 마음에 들었던 터다.
그래, 저 정도 심지와 강단은 있어야지. 시간이 지나자 흐뭇하기까지 했다. 모임에서 재희의 말이 나오면 자랑스럽게 턱을 들었다.
“참 깜찍하지 않아요? 제 며느리 심지가 이렇게 굳어요.
한번 마음을 열자 마음에 드는 것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중심을 꼿꼿이 지켜 온 것이나, 차 회장을 대하면서도 주춤거리지 않던 강단 있는 눈빛.
제 동생을 보호하고 아픈 엄마를 등에 이고 있던 책임감.
막말로 세상에 저런 애가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처음에 왜 그렇게 반대를 했는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만큼.
“재희 너도 차 필요하지 않니?”
맞은편에 앉은 재희에게 영현이 물었다. 물 잔을 집던 재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차? 차가 필요한가?
"아뇨, 어머님. 그다지요.”
필요한 순간에는 본가 운전기사님을 부르면 되었고, 그러지 못할 땐 강주를 부르면 됐다. 그래서 딱히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자신은 휴일을 집에서 보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고 밖으로 나갈 땐 늘 강주와 함께였으니까. 있어 보았자 무용지물일 뿐이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주가 도리어 거절했다.
“재희 씨 차 필요 없어요.”
"응? 왜?” “재희 씨에게 차 생기면 제가 운전기사 역할 못 해서 곤란해요.”
콜록콜록, 권기석 실장이 물을 잘못 들이켰는지 연신 기침을 했다. 강주의 뻔뻔한 발언을 듣고 놀란 탄이다.
차 회장의 경호 실장을 하면서 눈앞의 강주를 자주 마주했던 그였다. 기석은 본인이 강주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런 모습은 결코 상상으로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
결단코 절대...
기석이 아는 강주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공적으로는 유연하게 사람을 다루면서도 사적으로는 얼음 철벽 같은 사람이었다. 늘 삭막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렇기에 윤재희라는 사람을 향한 강주의 태도에 늘 놀랐다. 마치 코끼리를 처음 마주한 조선 사람이라도 된 마음이었다.
하지만 기석을 제외한 식구들은 강주의 태도에 이골이 났는지 놀랍지 않은 표정이었다. 시은이 고개를 내저으며 기석의 팔뚝을 툭 쳤다.
“저 오빠를 어쩌면 좋아....... 기석 씨는 저러지 말아요. 알았죠?"
영현은 그저 웃었다. 제 부인에게 죽고 못 사는 아들이 흐뭇하기만 했다.
언제부터일까. 강주가 제 앞에서 저런 농담을 가볍게 던지게 된 순간이, 아들과 엄마 사이이긴 하지만 묘하게 벽이 있었다.
고개를 쳐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메마른 벽이 둘 사이에 늘 심연처럼 가로질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강주는 이제 좀 더 가볍게 웃었고, 좀 더 속내를 쉽게 드러냈다. 강주에게서 이런 농담을 들을 수 있는 지금이 영현은 행복하기만 했다.
강주의 어린 시절, 본인은 늘 아들을 외면하기만 했었다. 이 커다란 저택에 외롭게 떨궈 놓은 채 모든 걸 주는 줄 착각했었다.
커다란 어둠이 제 아들을 집어삼킨 줄도 모르고, 본인은 그렇게 무지하고 잔인한 엄마였다.
영현은 자다가도 울며 눈을 떴다. 강주를 향한 차 회장의 학대를 떠올리며 후회와 죄책감으로 이불을 아프도록 움켜쥐 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영현은 어느 날. 강주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이 못난 엄마를 용서해 주렴. 무지로 널 상처 입혔던 나를, 부디.
강주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주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눈물에 젖어 흔들리는 어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었다.
'다 과거예요, 어머니.’
목소리 안에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 점이 영현은 더욱 마음 아팠다. 그의 어리광을 잘라 낸 건 영현 본인이었다.
작고 예뻤던 어린 강주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꿋꿋이 컸다. 지난 일을 모두 과거라 말한 강주는 고개 돌려 창밖을 응시했었다. 그리고 분홍빛으로 돋은 꽃 몽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봄이 왔네요. 같이 꽃놀이나 가시죠.'
그거면 돼요.
영현은 그날 결국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리고야 말았다. 그때를 회상하며 영현은 콧날을 문질렀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봄이 왔다던 강주. 그 봄이 강주에게는 재희일 것이다. 울긋불긋 예쁘게 피어 영원히 지지 않을 봄.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한 강주의 봄.
“그럼 효정이는 차가 필요 없다니?"
영현은 치밀어 오르는 울컥거림을 물과 함께 마시고는 재희를 향해 물었다. 기어코 무어라도 주고 싶었다.
차가 아니면 다른 무어라도, 재희가 싫다면 대신 효정이에게라도, 무얼 주어도 아깝지 않다.
“괜찮아요, 어머님. 효정이 아직 대학생인데요.”
손사래를 치는 재희를 향해 영현은 환히 웃었다. 가슴 속에서 따뜻함이 차올랐다.
식사 후, 재희와 강주는 2층에 올라왔다. 재희는 강주의 침대에 앉아 발을 통통 찼다.
"이 방에서는 처음 자 보네요?”
식사 중 곁들였던 와인 덕에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강주는, 그러게요, 하고 가볍게 답하며 방문을 닫았다.
재희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운 지 꽤 된 방인데도 관리가 잘되어 그런지 향기가 좋았다.
재희와 강주 둘 다 술을 마셔 오늘은 본가에서 묵고 가기로 했다.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영현이 두 부부에게 와인을 계속 권한 것이다.
평소엔 이 방의 침대가 작아 손님방을 사용하고는 했는데, 공교롭게도 오늘은 그 방을 권기석 실장이 사용하기로 하여 여기서 자게 되었다.
권기석 실장, 차 회장의 경호 실장이었다가 이제는 영현의 개인 비서가 된 그는, 시은의 약혼자였다.
결혼 허락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태도가 뻣뻣했으나 곧 한 식구가 될 터다.
영현은 생각보다 쉽게 시은과 기석의 관계를 허락했다. 재희와 강주의 결혼을 계기로 평생 지녀 온 신념이 변한 모양이 었다.
‘권 실장과 결혼하면 행복하겠니?'
권 실장과 결혼하겠다며 긴장한 얼굴로 주먹을 쥔 시은에게, 영현은 그리 물었었다.
그리고 시은이 분명 행복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쉽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었다.
'그래, 네가 행복할 것 같다면 해야지.'
허탈할 만큼 손쉬운 허락이었다.
영현의 허락이 떨어진 다음 날, 시은은 재희를 찾아와 손을 꽉 잡았었다. 고맙고 또 고맙다며.
기석 씨와의 결혼 허락이 쉽게 떨어진 건 모두 재희 씨 덕이라며.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으나 재희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었다.
“강주 씨 먼저 씻어요. 나는 메일 보낼 게 있어서.”
“늦었는데 또 일하려고-”
강주가 무어라 잔소리를 쏟아 내기 전에 재희는 강주의 등을 쭉쭉 밀었다. 그리고 커다란 남자를 방 밖으로 쉽게 쫓아냈다.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메일을 보낸 후, 강주가 들어오자 재희는 저 역시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편안했다.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장소. 이 거대한 저택에서 본인은 학창 시절 내내 들러붙어 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편안한 내 집이라 느꼈던 적은 없었다. 늘 딱딱하고 메마른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안락하고 포근했다. 강주와 절 감싸 주는 거대한 안식처가 된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친 재희는 잠옷으로 강주의 티셔츠를 챙겨 입었다. 안에 본인 두 명은 들어갈 정도로 품이 꽤 넉넉했다.
재희는 피곤한 어깨를 문지르며 강주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리라 예상한 강주는 의외로 책상 앞이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조명 빛에만 의지하여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한테는 밤에도 일하냐고 잔소리하려고 했으면서, 자기는 ....... 입을 삐죽이며 강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차림새가 유독 익숙했다.
'...꼭 강주 오빠 같네.'
옷장 안에 있던 옷이라도 입은 걸까. 학창 시절 그가 자주 입곤 했던 차림새 그대로였다.
새하얀 흰 반팔 티에 편한 반바 지. 몸은 그때보다 커졌지만 매끈한 이마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이나 담담하고 정적인 표정은 그때와 같았다.
그래서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강주가 고개를 들었다.
“재희야.”
그리고 가만히 웃으며 이름을 불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