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낼 수 없는 외전
#01 외전1
재희는 1층에 도착하자마자 구두 굽을 울리며 로비 앞까지 뛰어갔다. 입구에 새까만 헬멧을 쓴 오토바이 퀵 배송 기사가 있었다. 두 손을 쭉 내밀어 우선 서류부터 받았다.
“감사합니다! 결제는 그쪽에서 했나요?”
“아니요, 여기서 받으라고 하던데요."
“아, 네, 여기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돈을 건넨 재희는 허리를 꾸벅 숙인 후 오토바이가 떠나기도 전에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간이 없다. 곧 그가 올 시간이 됐다. 손에 든 서류 봉투가 팔락거렸다. 사원증을 찍고 로비 안으로 들어서자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장을 입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걷고 있었다. 딱 떨어지는 핏. 큰 키에 널따란 어깨.
깔끔하게 정리된 뒷머리와 깔끔한 목덜미. 뒷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선강 그룹 차강주 상무. 바로, 제 남편.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근처 임원을 타박하고 있었다.
재희는 21층에서 내려오는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 안내 창을 힐끗 보고는 3층에서 내려오는 사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제 남편이 화가 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쥐고 있는 서류가 바로 그 원흉이었다.
“도대체 기본적인 서류 관리를 어떤 식으로 하기에~”
그때, 부장을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뱉던 강주가 얼핏 말을 멈췄다. 강 부장 너머로 보이는 인영이 퍽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이는 바로 자신이 매일 보는 사람이었다. 바로, 제 부인. 강주의 빳빳했던 표정이 일순 허물어졌다.
“재희 씨.”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강주가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재희는 허리를 꾸벅 숙여 그의 알은체에 방어벽부터 쳤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강주 씨가 아닌 상무님이었다. 재희의 반응에 강주는 내심 서운한 것 같았지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강 부장을 슬쩍 밀어내고는 재희 쪽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어디 다녀오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앗, 제가 조금 바빠서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재희는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쭉 밀어 넣었다. 와르르 쏟아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22층을 누르자 사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강주는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부인을 삼킨 야속한 철문을.
재희는 엘리베이터 안내 창을 응시했다. 1층, 2층, 3층....... 찬찬히 잘도 올라갔다. 그제야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강주 씨보다 서류 먼저 도착하겠네. 다행이다.”
그녀가 지금 들고 있는 서류는 급하게 강주에게 올라가야 할 서류였다. 타 사무실에서 퀵으로 받으면서까지 공수한 중요한 서류.
방금 엘리베이터 앞에서 훔쳐 들은 대화 내용으로 보아, 이것이 차강주 상무보다 늦게 도착했더라면 모두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다.
22층. 재희는 다시 뛰어 부리나케 강주의 사무실 앞으로 갔다. 문 앞 책상에서 비서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싱긋 웃으며 재희가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 대리님.”
고개 든 비서가 재희를 확인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아니, 윤 주임님.”
비서가 급하게 호칭을 정정했다. 눈앞의 이는 마케팅 팀 윤 주임이자, 차강주 상무의 부인이었으니까. 우선 여기서는 윤 주임님이었다.
눈앞의 윤 주임과 제 상사가 결혼한 지도 몇 달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마주할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죄송한데, 잠깐 들어가서 이것만 책상 위에 올리고 올게요.”
갈색 서류 봉투를 급하게 박박 찢으며 재희가 말했다.
비서는 “네, 네.” 하고 답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 들어서자 환한 햇살이 들이닥쳤다.
재희는 강주의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고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그의 성격만큼 깔끔한 사무실이었다.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하게 닦인 데스크 위에 컴퓨터와 만년필, 몇 개의 서류.
그리고 커다란 사진 액자.
사무적이고도 딱딱한 책상 위에 놓인 유일한 인간적인 물건, 바닷가 파라솔 그늘 안, 한 여자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얼굴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떨어져 있다. 가느다란 햇살 역시 뺨 위에 반짝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솜털 구름. 잠든 여인 뒤로 보이는 잔잔하고 투명한 바다. 보는 것만으로도 평온해지는 사진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피사체를 바라보는 이의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진.
“참.... 이런 걸 사무실에 ......”
재희는 제 사진을 외면하고는 뒤를 돌았다. 사무실을 나가기 위해 조심조심 문고리를 잡고 힘을 주려는 순간 누군가 맞은편에서 먼저 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을 따라 재희의 몸이 딸려 갔다. 상대의 힘이 어찌나 센지 문고리에 붙은 채 상대의 가슴팍에 뛰어드는 모양새가 됐다.
“재희 씨?”
머리 위에서 강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재희는 강주의 품에 엉성하게 안겨 물끄러미 그를 올려 보았다.
그가 오기 전에 여기서 나갈 생각이었는데 사진을 보느라 늦장을 부려 마주치고야 말았다. 빙긋 웃은 그가 재희를 이끌고 무작정 안으로 들어섰다. 탁. 그녀가 나가려던 문이 굳게 잠겼다.
“강주 씨, 저 이제... 앗."
저 이제 가 봐야 하는데, 하는 말조차 할 기회가 없었다. 재희는 그의 품에 아기 새처럼 매달려 휘청휘청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소파에 대충 던져 놓은 강주가 재희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재희 씨가 여기 왜 있어요? 선물인가?"
이마 위에 붙었다 떨어지는 키스가 다정했다. 재희는 발개진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상무님께 전해 드릴 서류가 있어서요."
데스크를 향해 눈짓하자 강주의 시선 역시 그 위에 머물렀다. 사내에서 ‘강주 씨가 아닌 ‘상무님' 이라 부를 때는 지극히 공적인 일로 방문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강주야 공적인 자리 이건 사적인 자리이건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재희는 나름 룰을 정하고 있는 터였다.
사내에서는 되도록 윤재희 주임으로, 집에서는 차강주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이곳에서는 무조건.
강주의 후광이 주는 단맛에 빠져 본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복직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내 부인에게 상무님이란 호칭을 들으면 이상하게 심술이 난단 말이야.”
강주가 짓궂게 웃었다. 방금 재희가 말한 '상무님께 드릴 서류'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주가 고개를 내려 재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흠칫 놀라 입술을 달싹이는 재희를 향해 가만히 웃는다.
"내가 지금 윤 주임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건가?"
“이건 ”
“이러면?”
다시 다가온 얼굴이 장난스럽게 재희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그게.”
이건 직위를 이용한 사내 성희롱이에요, 상무님, 하고 장난스럽게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맞붙었다. 통통하게 부푼 입술 틈 사이로 강주가 혀를 밀어 넣었다.
도망가려던 혀를 붙들어 얽고는 부드럽게 안을 매만진다.
재희의 몸이 무너지며 흐트러졌다. 강주의 양복을 붙들고 힘 빠진 몸을 간신히 지탱한다.
그와 처음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닌데 닿을 때마다 심장이 아릿하니 두근거렸다. 집이 아닌 회사이다 보니 꼭 나쁜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강주는 재희를 커다란 데스크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덮치듯 그녀 위로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빨며 핥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저 키스일 뿐인데 금세 아래 피가 몰렸다. 등 뒤에 닿는 데스크가 차가운지 재희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강주는 그녀와 입을 맞춘 채 웃었다. 모든 행동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살금살금 들어와 몰래 서류를 올려놓는 것도, 제 키스에 당황해 손끝을 바르르 떠는 것도, 끙끙거리면서도 자신의 애정을 애써 받아 주는 것도, 모두.
창문 아래 노곤한 햇살이 들이닥쳤다. 강주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며 다른 손으로 유리 액자를 치웠다.
그리고 액자 속으로만 보던 부인이 아닌, 눈앞의 사랑스러운 부인을 쓰다듬고 매만졌다.
흐트러지는 그녀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지금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재희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반지가 만져졌다. 자신과 그녀의 결혼을 증명하는 징표. 제 손가락에도 끼워져 있는 같은 반지.
“재희야.”
강주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환상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하고 재희가 작게 답했다. 그녀의 무른 살갗을 깨물며 다시 웃었다.
법적으로 그녀와 함께한 지 몇 달이나 지났음에도, 늘 환상을 품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꿈에서 영영 깨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는 사원들로 인산인해인 로비 앞. 재희는 새로 부임한 팀장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팀장님.”
“그래요, 재희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팀장 역시 재희를 향해 꾸벅 허리를 마주 숙였다.
재희는 좋은 저녁 되시라며 벙긋 웃고는 로비에 대기 중인 차를 향해 다가섰다.
재희가 조수석 문을 열기 전 누군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끌어안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강주 씨?"
“삼십 분밖에 안 기다렸어요.”
“많이 기다렸네, 먼저 가지 그랬어요.”
“내 부인을 두고 내가 왜.”
가볍게 웃은 강주가 재희를 안쪽에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성큼성큼 운전석으로 향하는 그에게 언뜻 몇 개의 시선이 박혔지만 그뿐이었다.
강주가 재희를 모시고 집으로 가는 건 일상이 된 지 오래였기에 다들 적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