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재희의 고개가 대수롭지 않게 끄덕여졌다.
“네.”
“그러니까……. 나와의 관계가 처음이다, 라는 말이에요?”
“맞아요, 그런데요?”
뭐 이상해요? 순수한 얼굴로 재희가 되물었다. 강주는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미간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녀의 첫 경험이 자신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분명 남자 친구가 있지 않았나. 열여덟 청소년도 아니고 성인이 되어도 한참 전에 된 나이인 데다가…….
강주는 불현듯 재희와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날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건대, 결코 다정했던 밤은 아니었다.
재희의 전 남친, 정민철이라는 존재가 신경 쓰여 심기가 잔뜩 비틀려 있었고, 재희를 품에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반쯤 돌았던 데다가, 기어이 그녀의 나신을 보자 약에 취한 것처럼 흥분에 절여졌으니까. 짐승 같은 충동과 광적인 욕구가 온몸을 휩쓸던 감각이 지금도 선명했다.
그 탓에 배려심은 보이지 못했다.
버둥거리던 몸을 억지로 옭아맸었던 것 같다. 가녀린 꽃잎을 험하게 파헤치고, 제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입구를 억지로 열어젖히며 마구 밀어 넣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벽이 제 것을 잘라 내듯 쥐어짜며 아프도록 조이기도 했다. 그 이유가.
게다가 마지막에는 피까지…….
“…….”
강주가 자괴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틈 사이로 메마른 한숨이 흘렀다.
“미안해요, 재희 씨. 진작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강주는 웬만해서는 끝마무리가 모호한 말은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차마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만약 미리 알았더라면 재희의 처음을 그런 식으로 폭력적으로 가지지는 않았을 거다. 아주 소중하고 부드럽게 열어 보듬어 주었을 테지. 두려움과 초조함을 품으며 상냥하게 한 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희는 강주의 죄책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주 씨가 뭐가 미안해요? 미안할 게 있나? 내가 말 안 한 건데요, 뭐. 이 나이 되도록 못 한 것도 좀 창피했고……. 말할 기회가 없기도 했었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재희가 살포시 웃었다.
강주는 그런 재희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저 역시 허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런 뒤 재희로서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도 처음이었어요.”
“네?”
“나도 재희 씨가 처음이었다고.”
“…….”
끔뻑, 재희의 큰 눈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던 탓이다. 끔뻑끔뻑 눈꺼풀을 움직이며 영 현실성 없는 그의 말을 되새겨 본다.
내가 처음이었다고?
…강주 씨가 동정이었다는 뜻이야?
세상에! 그제야 현실이 밀려왔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저 배경에, 저 얼굴로, 저 몸을 갖고?
들고 있던 책이 와락 구겨졌다.
“처음이었다고요? 진짜로?”
강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인 사람이 뭐 그렇게……. 그렇게 잘해요?”
재희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꽥 질렀다. 강주는 팔짱을 끼고는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빤히 웃었다.
“재희 씨 애인은 뭐든 잘해요. 공부도, 일도, 섹스도.”
“…….”
“타고난 거죠.”
어처구니없을 만큼 뻔뻔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재희는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말이 지독하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그는 확실히 공부를 잘했다. 상무님의 업무 처리 실력 역시 가히 칭찬할 만했다. 밤일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왜인지 약이 올랐다. 재희는 지고 싶지 않아 테이블을 탁 내려치며 도전적으로 발언했다.
“저는요. 첫 키스도 강주 씨예요.”
사실 처음과 끝이 모두 그라고 함이 옳았다. 다른 이와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이번에는 자신이 이길 것 같았다. 눈앞의 사내가 어쩌다 금욕적으로 살았다고 한들 키스 정도는 경험했을 게 분명했다. 늘 여학생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를 남몰래 바라보았었으니까.
강주의 미소가 더욱 여유로워졌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쯤 되자 재희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재희는 심히 허탈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이럴 수가 있나. 이건 정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함이 맞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재희의 질문에 강주는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재희 씨 말고는 이게 안 서서. 친구가 고자냐고 언젠가 물어 잠깐 생각해 보기는 했는데.”
강주의 친구인 OU엔터테인먼트 전무 지혁은 이따금 말하곤 했다. 그 정도면 슬슬 병원을 가 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사업 분야가 엔터테인먼트 쪽인지라 지혁의 주위엔 늘 예쁜 여자들이 많았다. 때문에, 늘 혼자였던 강주를 신경 써 무던히 밀어 넣고는 했는데. 강주는 눈앞의 화사한 여자들을 보면서도 일관적인 심드렁함을 보였었다.
심지어는 언젠가 진심으로 짜증까지 냈었다. 약속 장소에 다른 이들과 함께 오지 말라며. 다른 사람들은 제발 소개 좀 해 달라고 제게 술까지 사 주는데 말이다.
마치 가운데 토막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강주를 보며, 지혁은 어느 날 진지하게 물었었다.
‘너 진짜 고자냐……?’
물론 강주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그건 불치병이 아니라며, 성 기능 장애는 초기 치료가 중요하다며 핏대 세우는 지혁을 향해 관심도 없다는 듯 고개만 저었었다.
정말이지 강주는 이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관계는커녕 입술을 맞대는 상상만으로도 미약한 불쾌함이 일었다. 혐오스럽다거나 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즐겁지 않을 일에 애써 도전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바였다.
자신이 탐냈던 건 윤재희뿐이었다. 애가 타 안달 났던 건 늘 윤재희 하나밖에 없었다.
마치 알을 깬 새끼가 어미에게 각인된 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마음이 가는 곳은, 눈길이 닿는 곳은 언제나 그녀였다.
재희만이 삶이자 목적이자 방향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강주 오빠, 하고 절 향해 미소 짓는 순수한 재희에게 욕정을 품었었다. 붉은 입술을 마구 빨아 먹으며 혀를 폭력적으로 밀어 넣고 안을 잔뜩 휘젓고 싶었다. 옷 아래 손을 넣어 하얗고 말랑한 살결을 만지고 싶었다.
그녀를 모조리 벗겨 마구 들쑤시며 절 가득 쏟아 내고 싶은 열망이 제 몸을 불태웠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냥 안고만 있어도. 꽉 끌어안은 채 자그마한 온기만 느껴도 좋을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좋으니 제 곁에 있기만 해 준다면.
제 성적 기능에는 분명 문제가 없을 게 분명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재희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렇게 흥분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며 보듬어 주고 싶다가도 거칠게 밀어붙여 울리고 싶기도 했다.
모든 욕망이 그녀에게만 향해 있는데 다른 이에게 눈이 돌아갈 리가.
재희를 상상하며 자위는 많이 했지만 다른 이성을 상대로 세운 적은 없었다. 그런 음습함을 재희에게는 결코 밝힐 수 없어 강주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향해 미소만 보였다. 부디 그녀 눈에는 이런 시커먼 속내가 보이지 않기를. 평생 몰라주기를.
한편, 재희는 절 향해 산뜻하게 웃고 있는 강주를 보며 생각했다.
첫 키스까지 어떻게 자신일 수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강주 씨도 고등학생 때 첫 키스 한 거예요?”
“고등학생 때?”
그의 미소가 일순 흐릿해졌다.
“네, 우리 고등학생 때 첫 키스 했잖아요……. 그때… 그 방에서…….”
괜히 몸이 배배 꼬여 재희는 손부채로 얼굴을 몇 번 파닥파닥 부쳤다. 첫 키스라는 건 상상만으로도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존재 같았다.
강주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어쩐지 무언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우리 첫 키스 호텔에서 했어요. 고등학생 때는 도대체 어떤 새끼랑 했는데.”
“차강주란 새끼랑 했는데요.”
“…….”
강주의 표정이 더욱 모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재희와 했다면 분명 잊었을 리가 없는데. 자신은 재희가 고등학교 때 들고 다닌 필통 색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청록색 천 필통. 지퍼가 회색이고 끄트머리에 튀어나온 상표가 분홍색이었다.
강주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재희를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누가 제 뒤통수를 후려쳐 기억을 잃게 하지 않았던 이상, 그녀와의 첫 키스를 잊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재희는 입술을 한 번 물었다 떼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잊은 걸까? 조심조심 입을 열어 그의 의문을 풀어 주기로 했다.
“강주 씨 아플 때……. 방에 죽 가지고 갔다가……. 자는데 몰래 뽀뽀해서…….”
재희의 귓가가 금세 달아올랐다.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지만 제 행동이 몹시 염치없게 느껴졌던 탓이다. 자는 이를 상대로 뽀뽀하려고 하다니. 성희롱 급 범죄 아닌가.
“그랬더니 잠결에 저 안고……. …진짜 기억 안 나요……?”
딱딱히 굳은 강주의 표정을 살피며 재희가 다시 물었다. 강주는 재희를 바라만 봤다. 어떤 기억이 스치는지 눈동자가 가만히 흔들렸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찬찬히 내려갔다. 팔짱 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하…….”
허탈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재희는 괜히 불안해 그의 눈치만 살폈다. 혹시 불쾌한 걸까.
강주가 여전히 아래를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그게.”
그에게서 다시 헛웃음이 흘렀다. 강주는 홀로 피식거리더니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예쁘게 말린 눈매에 황당함이 가시지 않은 웃음기가 맺혀 있었다.
“그때 내게 키스는 왜 했는데?”
“좋아했으니까.”
재희의 대답이 당연하다는 듯 간격 없이 튀어나왔다. 너무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낸 것 같아 재희는 부끄럽기까지 했다. 다 아는 걸 뭘 묻고 있어. 아무튼, 음흉스럽게. 내게 기어코 고백을 끌어내려고.
새삼스럽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미 할 수 있는 건 다 한, 말하자면 볼 장 다 본 사이였다. 한데 마치 그 시절의 강주 오빠를 앞에 둔 듯 가슴이 두근거려 견디기가 힘들었다.
오래전에 헤어졌던 첫사랑과 조우한 기분이었다. 차마 바라볼 수 없던. 탐낼 수 없던 강주 오빠를 다시 만난 것처럼.
강주의 표정이 멍하니 풀렸다. 그는 제 귓가를 치고 지나간 문장을 믿을 수 없는지 눈썹을 구기기까지 했다.
“좋아했다고? 네가? 나를?”
재희의 고개가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의 눈 속에 진심 의아함밖에 없는 것 같아 오히려 재희 본인이 더 의아해졌다.
다 알면서 왜 또 묻지? 내 마음 다 알면서 벽을 높다랗게 치고, 냉정하게 선을 그은 후 훌쩍 떠나 버린 장본인이.
“네가 나를? 왜?”
아까부터 자꾸 되묻기만 하는 그를 보며 재희는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오늘따라 강주의 상태가 퍽 이상했다. 왜 자신을 좋아했냐고 물으면 무어라 답해야 하나.
“그냥…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첫사랑이라……? 이유를 굳이 말하라면…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잘생겨서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내가 딱히 막 외모를 따지는 타입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너무 내 취향이기도 해서…….”
괜스레 곤혹스러워 콧잔등을 긁는데 강주가 손을 강하게 채갔다. 재희의 손을 꽉 움켜쥔 후 얼굴을 가까이 대며 다시 물었다.
“내가 무서웠다며. …무섭다며. 싫다며.”
“무슨 소리예요? 지금 그 눈이 더 무서워.”
재희는 옅게 웃으며 손가락으로만 강주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꽉 잡힌 손이 움직여지지 않아 손가락 윗동만 겨우 움직이는 것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네가 말했었잖아. 무섭다고.”
재희의 눈이 그를 조용히 훑었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지 강주의 표정을 살피며 꽉 잡힌 손가락만 꿈지럭거린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자신이 그에게 무섭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고개만 살포시 기울였다.
“내가 언제 강주 씨 무섭다고 했어요? 내가 무서운 건 강주 오빠가 그 폭력 건으로 회장님께 혼나는 거밖에 없었어요. 그건 진짜 무서웠지.”
“…….”
강주의 눈가가 찬찬히 일그러졌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헤집을 듯 응시한다. 깊게 일렁이는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추고 결국엔 고개 숙여 이를 악물었다.
뺨 위로 재희의 손이 닿았다.
“강주 씨?”
“…….”
“괜찮아요?”
재희의 손이 그의 매끄러운 뺨을 문지르고, 재희의 눈이 표정을 가까스로 숨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강주는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안타까움과 허탈함.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이 뒤범벅돼 감당하기 힘들 만큼 넘쳐흘렀다.
바보 머저리 새끼. 등신 같은 놈. 스스로를 향한 욕이 속을 헤집고 들쑤시며 파헤쳤다. 진작 알았다면. 진작 알았더라면.
강주는 두 팔을 뻗어 재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잡아당겨 온몸으로 품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매달리듯 얼굴을 묻었다.
“재희야.”
“네.”
“재희야…….”
“응, 나 여기 있어요.”
재희가 강주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녀의 손길이 느껴지자 강주는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난데없는 그의 매달림에도 재희는 아이를 어르듯 토닥토닥 그를 다독였다. 목덜미에 내리누르는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그게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계속 그의 등을 쓸어내린다.
트라우마 때문일까. 이따금 그가 제게 매달리듯 안아 올 때가 있었다.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고, 떨리는 손으로 끌어당겨 숨이 막힐 만큼 강하게 부둥켜안고는 했다.
그럴 때면 그저 기다려 주면 됐다.
재희야, 하고 환영을 좇듯 이름을 부르면, 나 여기 있노라고. 당신 앞에 있노라고 확인만 시켜 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강주는 안심한 듯 그제야 긴장을 풀고는 했었다.
마치, 지금처럼.
“재희야.”
“응.”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그의 등 위에서 손을 움츠리며 재희가 간지럽게 대답했다.
목덜미 위에서 그의 읊조림이 애달프게 흩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밖에 없었어. 나는 늘…….”
말을 삼킨 그가 재희에게 뺨을 비볐다. 살갗이 닿을 때마다 따뜻한 향기가 피어올라 가슴이 벅찼다. 제 불안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평온히 채워 주는 그녀만의 내음.
달콤하고 향기로워 강주는 그녀의 살갗을 약하게 물었다. 재희를 아프도록 씹고 그녀의 모든 것을 제 안에 모조리 삼켜 버리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이 치밀었다. 하지만 애써 참으며 옅은 입맞춤만 내리누를 뿐이었다.
제 삶은 늘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함께 있으면 재희까지 새까맣게 물들일 것 같아 무섭고 두렵기까지 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암흑뿐인 것 같았다.
그러다 그림자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 끝에, 재희가 있었다. 빛이 시작되는 곳에서 서서 손을 뻗어 주는 유일한 그녀가 있었다. 엉망으로 처박힌 진창에서 끌어당겨 환한 빛 속으로 이끌어 주던,
나의 빛.
나의 재희.
“재희야. 그림자를 따라 고개를 드니 네가 있었어.”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재희의 귓가를 두드렸다. 재희는 강주를 토닥이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왜인지 가슴이 아릿해졌다.
“늘 네가 있었어. 끝이자, 시작인 곳에… 늘 너뿐이었어.”
깊고 짙은 고백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무거워 마치 심연을 긁는 것처럼 간신히 끄집어져 나왔다.
까만 구름 사이로 적막한 달빛이 녹아 흐른다. 그는 잠잠히 말이 없었다. 재희는 강주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어둠에 묻힌 등을 쓸어내리고 그와 몸을 맞댔다. 얼음꽃이 녹듯, 틈 없이 맞닿은 서로의 온기가 찬찬히 번졌다.
이 커다란 남자가 애틋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뿐이라는 고백이 사랑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둘이 함께할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함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걸어가겠지. 그 사실을 알기에 충만한 행복이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저도 늘 강주 씨뿐이에요.”
재희의 잔잔한 고백에 강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강주는 팔에 힘을 주어 재희를 꽉 끌어안았다. 마치 오랜 세월을 지나 간신히 마주한 연인이라도 된 양 절박하게.
품 안의 그녀를 느끼자 그제야 안도감이 치밀었다.
강주는 눈을 감았다. 많은 오해와 긴 시간을 건너, 어렵게 그녀 마음을 얻었다. 비로소 움켜쥔 마음을 몹시 소중하게 가슴에 품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 따뜻했다. 이대로 평생 안고만 있어도 좋을 기분이었다.
온전한 행복이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