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96)

 #89

“관장님, 자료 여기 있습니다.”

 영현은 비서가 건네는 태블릿을 넘겨받았다. 그녀의 눈에 퍽 익숙한 풍경을 배경으로 두 남녀가 마주하는 사진이었다.

“어제 사진인가요?”

“예, 우선 두 분이 만나셨을 때부터 찍긴 했는데… 중간 이후에는 상무님의 사생활을 위해 임의로 철수시켰습니다.”

“잘하셨어요, 내 아들 애정 행각을 다 볼 필요는 없으니까. 고마워요. 나가 봐도 돼요.”

 비서가 고개인사 후 곧장 밖으로 나갔다. 영현은 피식 웃고는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슥슥 사진을 넘겼다.

“…뭐… 오래 참았지.”

 며칠 전, 강주 이름으로 발권된 비행기 티켓 정보를 입수했다. 상황으로 유추해 보건대 재희가 있는 장소를 알아낸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막고 막았는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영현은 우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저 두고 보았다. 사실 반쯤은 체념했다는 게 맞았다. 막아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생각까지 든 것이다. 그토록 보고 싶어 꽁지 빠지게 나간다는데.

 그간 영현은 윤재희의 곁에 사람을 몰래 붙여 놓은 상태였다. 피 끓는 나이 아닌가. 연고 하나 없는 해외 생활은 왜인지 모르게 해방감을 주기 마련이다. 따라서 행동마저 자유로워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래서 촉각을 곤두세우며 지켜보았다. 혹여 강주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지는 않을지. 만약 딴짓이라도 한다면 그것을 빌미로 어떻게든 내칠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영현이 마련해 준 외국 숙소는 기실 재희를 향한 심판대라 함이 옳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인 재희의 삶은 매우 단순했다.

 재희는 수녀원이 있는 그 한적한 도시에서 수녀보다 더욱 수녀처럼 살았다.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아침을 먹은 후엔 항상 숙소 근처 강가를 산책한다 했다. 산책 후에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다시 강가를 거닐다가 집으로 돌아온다고.

 이따금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이는 50대 아저씨. 배가 나오고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프랑스인으로 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칼같이 헤어진다는 보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 환경이 낯설어 그러려니 했는데……. 일주일, 한 달, 반년이 지나도 같은 삶을 사는 재희를 보며 영현은 조용히 읊조렸었다.

‘얘는 무슨 비구니도 아니고…….’

 그리고 그 비구니를 연인으로 둔 아들 강주 역시 정절을 지키며 사는 건 마찬가지였다. 재희의 부재로 외로움을 느낄 법도 한데 오가는 곳이라고는 회사와 집, 그리고 맨션에 있는 운동 센터밖에 없었다. 성직자라도 된 듯 몹시 질서적이고 금욕적인 삶이었다.

 어떻게든 다른 여자를 붙여 주려고 애를 썼으나 강주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반년 만에 포기하게 된 것이다. 둘 다 6개월을 그 꼴로 사는데, 일 년이라고 다를까.

 내가 졌어.

 기어코 재희를 찾아 출국하는 강주를 막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영현은 사진을 휙휙 넘기며 웃었다. 서로 부둥켜안은 연인이 보였다. 눈꼴 시린 한 쌍을 향해 영현이 중얼거렸다.

“젊다, 젊어……. 좋아 죽네, 내 아들…….”

 그러다 클로즈업된 강주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웠다. 어쩐지 조금 씁쓸하고 슬퍼 보이는 눈으로 태블릿 속 강주를 더듬는다.

 처음 보는 미소, 처음 보는 표정.

 재희 옆에 있는 제 아들은 행복해 보였다.

 강주가 이렇게 부드럽게 웃을 수도 있구나.

 냉담한 눈빛도 따뜻하게 풀려 있었으며 날카롭게 저며진 분위기 역시 누그러진 채였다.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애정이 화면 밖에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제게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들. 그랬기에 완벽한 며느리를 주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어린 시절 주지 못했던 애정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

 한데 아무래도 그 완벽한 며느리를 얻은 것 같다.

“그래, 과연 누가 내 아들을 이리 웃게 해 주겠어.”

 영현은 화면 속 둘을 손끝으로 건드리곤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입가에 미소가 가볍게 서렸다.

 22장. 고개를 들면

 월초부터 정신이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지난달 마무리 지었을 일이 출고 문제로 지연됐다. 그 탓에 재희는 아침부터 전화기를 붙들고 절절매는 중이었다.

“네, 제가 그건 상품 팀에 얘기해 놨어요. 네, 네. 아……. 죄송해서 어떡하죠? …네, 알죠, 이런 식으로 급하게 진행하는 거 부담스럽죠, 네. 그래도 이번에 좀 어떻게 해 주시면…….”

 재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대기업은 대부분 갑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간간이 을 비슷하게 흘러가기도 했다. 이따금 기한 문제로 공장을 압박한다든가, 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생겨 억지로 일정을 조정해야 할 때 등등.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외부 거래처 담당자에게 장단을 맞춰 주며, 재희는 엉거주춤 서서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마케팅 팀 팀원들은 괜히 재희를 힐끔거렸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눈빛을 교환한다. 과연 저 전화 상대는, 자신의 신경질을 받아 주는 마케팅 직원이, 선강 그룹 후계자인 차강주 상무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저렇게 못 할 게 확실할 텐데…….

 한 달 전, 재희는 다시 마케팅 팀으로 복직했다. 원래라면 일 년 뒤에 돌아올 것이었는데 반년이 조금 지나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녀의 복직을 꿈에도 몰랐던 팀원들은 진심으로 놀라며 환영회를 열어 주었었다.

 상무님 사모로 살며 자유를 누릴 줄 알았는데? 혹시 회사에 뼈를 묻을 생각이냐며 가볍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녀가 예상보다 빨리 귀국할 수 있던 건 모두 영현의 권유 때문이었다. 계약이고 뭐고 이제 다 괜찮으니 어서 돌아오라는 영현의 말. 재희의 숙소까지 직접 찾아오더니 함께 귀국하자며 손을 뻗었던 것이다.

 설마 강주 씨와 내가 만났다는 걸 아시게 된 걸까. 계약 무효라고 말씀하시려는……? 불안함에 입술만 깨물던 재희를 향해 영현은 부드럽게 웃었었다.

‘한국 가면 결혼 준비부터 해요. 기왕에 하는 거 일찍 해야지. 가능하면 손주도 빨리 봤으면 좋겠어요. 이건 두 사람이 정할 문제지만… 어쨌든 내 생각은 그래요.’

 갑자기 벼락같은 결혼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약속한 일 년도 채 채우지 않은 시점에, 심지어 환영까지 받으며.

 이유를 모르는 재희는 엉겁결에 고개만 끄덕였다. 숨겨지지 않는 미소를 환하게 올리며.

 그 뒤로는 쾌속 순항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재희는 회사에 복직했고, 틈틈이 결혼도 준비하며 열심히 근무 중이었다.

 사실 재희가 준비할 건 별달리 없었다. 강주 측에서 혼수를 해 오라 할 리도 없었고, 딱히 식장이나 자잘한 준비를 할 것도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착착 진행됐고, 정신을 차려 보니 디데이가 눈앞에 있었다.

 딱히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았으나 기실 생각해 보면 많은 게 달라지기는 했다.

 주말이면 아주 자연스럽게 효정이와 강주의 본가에 놀러 갔으며 이따금 영현의 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현은 이전과 달리 너무도 친절해서 마주할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시어머니가 될 영현은, 일단 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모든 걸 퍼부어 주는 타입 같았다. 처음 가까이하기는 힘들어도 한번 가까워지면 벽 없이 허물어지는.

 이젠 말하기도 지치지만, 그런 점이 강주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시어머니가 될 영현 역시 참 좋았다.

 ***

 재희는 효정의 손을 잡고 복도 끝 병실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향기로운 내음이 퍼졌다. 창가에 한가득 꽂혀 있는 생화 내음이 바람을 타고 밀려오고 있었다.

“엄마, 우리 왔어.”

 재희는 커튼을 몽땅 젖혀 창문부터 열었다. 효정은 이리저리 병실 정리를 하는 재희를 뒤로하고 엄마 손부터 잡았다.

“엄마, 그거 알아? 언니 결혼한대.”

“내가 저번에 이미 선수 쳐서 엄마한테 말했는데?”

 창가를 싹싹 닦는 재희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효정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다시 엄마 손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엄마 남편 될 사람 되게 잘생겼다? 돈도 많아. 아마 엄마도 알걸? 강주 오빠. 그 강주 오빠랑 언니 결혼하거든. 되게 신기하지?”

“이미 강주 씨랑 여러 번 와서 엄마 벌써 알고 있을걸? 첫째 사위 인사 다 마쳤어.”

 스피커 버튼을 눌러 음악을 켜며, 재희는 또 효정을 놀리듯 씩 웃었다.

“아, 언니이-!”

 효정이 엄마 손을 꽉 잡은 채 고개 돌려 재희를 흘겨봤다. 그 탓에 둘은 보지 못했다. 엄마의 눈가가 아주 살짝 움직였던 찰나의 순간을. 재희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린 효정이 엄마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이어 말했다.

“차병준 그 나쁜 새끼도 벌받았거든. 엄마 결백한 거 사람들 다 알고 있어. 억울하면 저승에서도 벌떡 일어난다는데, 우리 엄만 너무 착해서 이렇게 누워 있기만 하고…….”

 그 말에 재희는 더 농담을 건네지 않았다. 효정의 뒤로 찬찬히 다가와 엄마 손을 붙든 손등 위에 제 손을 맞붙였을 뿐이다. 세 명의 온기가 폭 포개졌다. 재희가 두 사람의 손을 한꺼번에 붙들며 속삭였다.

“엄마, 이제 남은 건 엄마 일어나는 일뿐이야. 알지?”

“…….”

“엄마의 예쁜 두 딸, 기다릴게.”

 대답할 수 없는 엄마를 향해, 재희는 나지막하게 오랜 염원을 풀었다.

 부디 엄마가 눈을 뜰 수 있길. 다 자란 효정과 자신을 보며 흠뻑 웃어 주기를.

 언젠간, 서로 마주 안은 채 행복할 수 있기를… 부디.

 그리고 효정과 재희가 엄마의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고 환희에 차 비명을 지른 건, 석 달 뒤의 일이었다.

 ***

 늦은 밤. 재희와 강주는 테라스 테이블 위에 여행 책자를 자르르 펼쳐 놓았다. 모든 결혼 준비는 강주 측에서 준비하지만, 여행지만큼은 재희 본인이 정하고 싶어서였다.

 재희는 영현에 의해 반쯤 타의적으로 갔던 프랑스행을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을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제주도 여행도 못 갔다. 삶이 빈곤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제대로 된 첫 여행을 강주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 참을 수가 없었다. 재희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강주 씨는 어디로 가고 싶어요?”

 선선한 밤바람이 강주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들었다 놓았다. 강주가 앞머리를 대강 쓸어 올리며 답했다.

“바닷가 휴양지. 아무도 없는 외딴섬 프라이빗 리조트로.”

 재희 씨가 좋은 데라면 어디든 좋아요, 같은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확고한 장소가 나왔다. 재희는 여행 책자를 들어 목차를 훑으며 물었다.

“바닷가 좋아해요? 어릴 때 제주도 살아서 그런가?”

 강주가 어린 시절 제주에서 자랐다는 걸 아는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는 쉽게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바다보다는 호수가 좋아요.”

“그런데 왜 바다로 가요?”

“호수보다는 바다 쪽이 더 사생활 보호될 것 같아서.”

“사생활 보호?”

 재희가 들고 있던 책을 내리며 되물었다. 턱을 괸 강주의 입꼬리가 어쩐지 짓궂게 올라갔다.

“아주 많이, 자주 할 거라서. 안에서든 밖에서든 재희 씨가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그러려면 사생활 보호가 아주 중요하지 않겠어요?”

“…….”

 재희의 목덜미에서부터 붉은 열꽃이 찬찬히 번지기 시작했다. 다시 책을 확 올려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뭐 언제는 지쳐 떨어질 때까지 안 했나. 맨날 뭐…….”

 머쓱함을 숨기려 툴툴거리는 말만 내뱉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다. 늘 먼저 나가떨어지는 건 자신이었고 넘쳐흘러 주체 못 하는 건 항상 그쪽이었다. 지금도 그런데 거기서 뭘 더 어쩌려고…….

 언제나 느끼지만, 체력도 너무 좋고 기술도 과하게 좋다. 이제 그만 하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밀치려다가도, 그가 꽂아 넣는 쾌감에 무너져 다시 매달리는 일이 빈번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하고 했으면 그렇게…….’

 왜인지 심통이 치밀었다. 케케묵은 과거를 들추어 성낼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억울하기까지 했다. 난 강주 씨가 처음이었는데. 강주 씨 혼자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해 와서는.

 재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더듬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억울하네요. 강주 씨는 체력도 좋고… 다 잘하고……. 난 강주 씨가 처음인데 혼자 그렇게 앞서 나가니까 따라가기도 벅차고…….”

 그때, 눈앞까지 바짝 들어 올린 책이 찬찬히 내려갔다. 강주의 손이 책을 붙들어 내린 것이다. 재희의 얼굴을 가리는 책을 치운 뒤, 강주가 재희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방금 재희가 한 말을 더듬는 듯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어렵게 유추하는 얼굴이었다.

“처음…이었다고?”

 그가 찬찬히 재희가 했던 말을 되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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