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재희는 자그마한 도시 어귀에 있는 한적한 강가를 따라 걸었다. 꽃집을 지나고 빵집을 지나 분수대를 서성이고 있노라니 자주 보던 아저씨 한 명이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채이채이!”
재희의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하는 그는 늘 재희를 채이채이라고 부르며 친근히 웃고는 했다. 분수대의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그와 수다 떨었다. 아침 식사 메뉴와 어젯밤 본 별 이야기가 다였다.
그녀는 곧 아저씨와 헤어져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드니 두 조각으로 갈라진 구름이 천천히 떠밀려 가고 있는 게 보였다. 평화로운 정오였다. 돌담 앞에 가만히 서서 재희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강주 씨는 잘 있으려나.”
프랑스의 아주 작은 도시. 한국인에게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 머무른 지도 반년이 지났다. 영현이 마련해 준 숙소였다. 휴대 전화는 사용하지 않았고 서너 번 한국으로 돌아가 기습적으로 효정을 방문하고, 엄마를 보고 왔다. 물론 강주는 만나지 못했다.
이 고요한 도시에서 한국과 단절된 채 지내고 있었다. 직접 찍은 집 주변 사진을 프린트하여 효정에게 엽서를 보낸 게 다였다. 강주와는 통화도, 메일도,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완벽히 차단되어 그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영현의 통제력이 새삼 대단하다 느낀 순간이었다. 그래서 새삼 무서워지기까지 했었다. 재벌가 사모님이 작정하면, 나 같은 애 하나쯤은 죽은 듯 묻어 버릴 수 있겠구나… 싶어서.
길을 걷다가 아무렇게나 놓인 벤치에 앉았다. 돌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 여행객 커플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강주 씨와는 저런 사진을 찍은 적이 없네.”
둘의 셀카는커녕 그의 사진 하나 제대로 없었다.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휴대 전화 속엔 효정과 찍은 사진만이 가득할 뿐이다. 다시 만나면 꼭 찍어야지. 기약 없는 다짐을 중얼거리며 재희는 눈을 감았다.
“…보고 싶다.”
그를 한번 떠올리자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괜찮다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초조함과 애달픔으로 이따금 속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고요히 참고 견디다가도 문득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는데. 한번 물꼬를 트면 참을 수 없이 마음이 떨리니 어떻게든 모른 척 있고 싶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이 통제되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진짜 보고 싶다.”
그 잘생긴 얼굴이 보고 싶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싶고 근사한 미소를 마주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떠날 때도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못 했어.’
말없이 떠났다며 원망하면 어쩌지. 오해라도 하고 있으면 어떡해.
혹시 날 잊었으면 어쩌지. 다른 여자가 생겼다면.
만약, 그때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면…….
반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사랑을 잊고 새로운 인연을 찾기에도 적당한 시간. 그를 믿는다며 영현에게 호언장담하기는 했으나 재희는 사실 불안했다. 누가 보아도 탐이 나는 남자다. 유혹이 무수할 것이며 그중에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풍랑이 쳤다. 절 감싸고 있는 풍경은 평화로웠으나 속은 폭풍우였다.
그를 얻기 위해 이곳으로 왔는데. 이곳을 떠나 한국에 돌아갔을 때 그의 옆자리에 다른 이가 있다면 어찌해야 할까. 난 과연 그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포기하지 못한다고 한들 무얼 할 수 있을까. 고작해야 난 윤재희라는 소시민일 뿐인데.
불안감이 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럴 리 없어.’
재희는 고개를 내저으며 고개를 젖혔다. 감은 눈 위로 따뜻한 볕이 아스라이 덮였다. 초조함은 쉽사리 녹아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참으면 볼 수 있어……. 날 끌어안아 주는 그 널따란 품도, 따뜻한 온기도… 분명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거야. 재희 씨, 하고 날 부르는 그 목소리도,
“재희 씨.”
그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라고 생각하려던 순간이었다. 재희 씨, 하고 누군가 절 불렀다. 너무도 듣고 싶어 하던 그 목소리로, 너무도 듣고 싶어 하던 그 문장을.
재희는 눈을 감은 그 상태로 경직됐다. 하다 하다 이제는 환청까지 듣는구나……. 자괴감마저 치밀어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웃기까지 했다.
머릿속에 그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 무지막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점점 뜨거워지는 눈가를 훔치며 재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속에 있는 울음을 엉엉 쏟아 내고 싶은데, 간신히 버티고 있는 감정을 무너뜨리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애써 참았다.
온종일 울어도, 이곳에 머무는 내내 운다고 하더라도, 제 속의 그리움은 다 쏟아 내지 못할 것이다.
“흑… 강주 씨…….”
코끝이 찡하니 달아올랐다. 울먹울먹 그의 이름만 불렀다. 보고 싶어요.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눈물과 함께 혼잣말이 이어 나왔다. 문장마다 애달픈 미련이 덕지덕지 엉겨 있었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다시 환청이 들려왔다. 울음으로 들썩이던 재희의 어깨가 멈췄다. 가물가물 칭얼거리는 것 같았던 목소리도 멎었다. 재희는 눈물로 흥건한 손바닥을 천천히 내렸다. 달아오른 뺨 위로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눈물 맺힌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속눈썹 끝에 가까스로 붙어 있던 눈물방울이 톡 떨어져 뺨을 타고 흘렀다.
한동안 재희는 깜빡 깜빡 속눈썹만 움직였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젖은 잔상 사이에 서 있는 누군가는 확실히 보였다. 차강주. 그가 마치 환상처럼 눈앞에 있었다.
“…강주 씨?”
“네.”
“…강주 씨?”
재희의 환상이 재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왜 부르기만 하고 말이 없어요.”
벤치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강주가 그녀 옆에 앉았다. 재희는 흠뻑 젖은 시선으로 그의 행적을 좇았다. 그를 따라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오목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뺨 위로 그의 손이 닿았다. 눈물을 닦아 주려는 듯 부드럽게 쓸고 매만진다. 재희는 흠칫 놀라 눈가를 떨었다. 눈꼬리를 말며 강주가 다정히 웃었다.
“방금까지는 보고 싶다더니 왜 피해요. 막상 보니 마음이 달라졌어요? 서운하게.”
부드러운 농담이 밀려왔다. 재희는 농담을 향해 웃는 대신 다시 눈물을 뚝 떨궜다. 물길을 타고 이어지는 눈물을 그가 찬찬히 훔쳤다. 재희는 뭉개진 눈물 사이로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강주 씨예요?”
“네.”
“정말요?”
“네.”
“진짜 강주 씨예요?”
재희는 마치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해 물었다. 강주는 끊임없이 같은 답을 상냥히 되돌려 주었다. 네, 맞아요, 하고.
그제야 재희에게서 와앙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재희는 다짜고짜 강주의 목덜미에 매달려 그의 옷깃에 뺨을 비비며 울었다. 몸에 힘이 풀려 그를 꽉 부둥켜안았다. 뜨겁게 젖은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닿고, 타고 내린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재희는 그가 사라질세라 옷을 더욱 꽉 붙들었다. 강주는 잘게 떨리는 재희의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려 주었다. 다정한 손길이 이어졌다. 마치 아비가 아이를 달래 주듯 상냥하게.
뺨을 적시던 눈물이 바짝 마를 때까지 재희는 안겨만 있었다. 소금기만 버석버석하게 남을 무렵, 재희는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강주 씨.”
환청도, 환영도 아님을 깨닫자 문득 현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만나면 절대 안 되는 건데. 만나서 기쁘기는 하지만. 너무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강주 씨……. 우리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건데…….”
눈물로 엉켜 있던 눈동자에 이번엔 불안이 덕지덕지 감겼다. 분명 관장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1년을 떨어져 있어야 인정해 주겠다고.
하지만 강주는 그녀의 애타는 속도 모르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보였다.
“난 만나도 돼요.”
“네?”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거든.”
“…그게…….”
“애초에 재희 씨와 어머니 둘이 한 약속일 뿐이잖아요. 난 그런 제안 받아들인 적 없어요. 재희 씨를 일 년이나 못 본다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내가 고개 끄덕일 리가 없잖아.”
“…….”
강주가 그녀의 젖은 입술을 문질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재희 씨가 날 찾은 게 아니라 내가 재희 씨 찾아온 거예요. 둘이 작당한 이 계약, 계속 유효하다는 뜻이에요.”
재희는 열없이 눈을 끔뻑였다. 언뜻 영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재희 씨가 강주에게 일 년만 연락 안 하고, 흔들지만 않으면 되는 거예요. 계약서라도 쓸까요?’
강주의 말이 맞긴 했다. 자신이 강주에게 연락하면 안 된다는 말만 있었지, 강주가 찾아와도 안 된다는 말을 영현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런 말장난 같은 주장에 관장님이 넘어가 주실까.
“그래도 혹시 책잡히면 어떡해요… 강주 씨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대로 강주를 잃을까 두려워 다시 슬픈 눈물이 치솟았다. 재희의 울먹임을 강주가 가로막았다.
“정 찔리면 눈 감아요. 재희 씨가 나 안 보면 되는 거니까.”
커다란 손바닥이 두 눈을 가렸다. 재희의 세상이 캄캄해졌다. 그 캄캄한 세상 위로 따뜻한 온기가 살며시 닿았다.
“아…….”
재희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눈물로 젖은 입술을 가르며 이어 혀가 들어왔다. 농밀하고 부드럽게 안을 쓰다듬다가 이윽고 험하게 밀려든다. 애써 누른 감정이 터진 것처럼, 강주는 재희에게 달려들었다. 입술을 거세게 빨아 당기고 혀를 아프도록 감아올렸다.
재희는 신음과 함께 그에게 몸을 기댔다. 눈물로 달아오른 뺨이 흥분으로 뜨겁게 달궈졌다.
반년 만에 하는 그와의 키스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재희는 마치 첫 키스를 하는 사람처럼 끙끙대며 어리숙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안을 파헤치는 키스로 숨이 막혔다. 겨우 뱉으려던 호흡마저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그의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재희의 옷 틈을 파고들었다. 맨허리를 만지고 부드러운 살갗을 쓰다듬는다. 재희는 흠칫 놀라 그의 혀를 꽉 깨물었다. 지나가는 이가 거의 없는 곳이라지만 여긴 밖이 아닌가.
강주의 손목을 꽉 붙들며 고개를 젓자 그제야 두 입술이 떨어졌다.
강주가 입꼬리를 올려 옅게 웃었다. 여전히 가까운 입술 틈으로 둘의 숨결이 흐트러졌다.
그가 재희를 안심시키듯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재희 씨. 어머니가 막고자 했다면 출국부터 손을 쓰셨을 거예요. 아마 재희 씨 멀리멀리 숨겨 놨겠지. 이곳에 내가 있을 수 있는 자체가 허락이라는 뜻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달뜬 흥분에 눌려 거칠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희는 강주의 목덜미를 다시 끌어당겨 안았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줘요. 진작 말해 주지.”
“재희 씨가 나 혼자 내버려 둬서 심술이 좀 났어요.”
재희는 말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기분 좋은 떨림이 계속돼 심장이 저릿저릿했다.
벤치에서의 재회 후, 둘은 도란도란 서로의 근황 얘기를 나눴다. 그간 무얼 하고 지냈냐는 강주의 말에 재희는 수녀처럼 지냈다고 답했고, 그러는 강주 씨는 무얼 했냐는 재희의 질문에 강주는 워커홀릭, 운동 홀릭처럼 지냈다고 답했다.
그리움을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고 그래도 보고 싶어 지치도록 운동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추적해도 행방을 알 수 없어 매일 그리움에 사무치며. 덕분에 체력이 한결 더 좋아진 것 같다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재희는 약간 겁먹었다. 지금도 넘치도록 좋은 게 그의 체력인데 여기서 더 좋아지면 어쩌려고.
귓가에 닿는 바람이 서늘해져서야 둘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재희의 숙소로 돌아왔다.
강주의 태도가 급변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평화롭게 손을 잡고 숙소에 들어온 강주는, 숙소 문이 닫히자마자 짐승이 됐다.
“읏, 강주 씨, 잠시, 잠시만……!”
문이 닫혀 밀실이 됨과 동시에 재희를 현관 벽에 밀어붙이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것이다. 당황한 재희가 어깨를 밀어 보았지만, 이미 옷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손은 거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