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영현의 핏속에 한기가 섞여 온몸을 휘돈다. 기우뚱 휘청이는 상체를 다잡으려 테이블을 짚었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딸아이의 말이 무시무시한 윤곽을 잡아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외면하며 고개를 돌리고 싶으나 그럴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시은의 얼굴이 아픔으로 구겨졌다.
충격과 혼란, 의구심으로 뒤범벅된 엄마의 얼굴을 본다. 어릴 적 오빠는 아주 많이 갇혔었다. 고래처럼 커다랬던 아빠에게 잡힌 작은 몸이 껌껌한 방 안에 홀로 처박혔었다.
그 때문이었다. 성장하며 오빠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가족에게 커다란 벽을 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학대하는 남자와 그 남자의 딸을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친모가 없는 외로운 성이었기에 그에겐 사방이 적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늘 오빠를 자랑스러워했다.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과 의젓함에 미소를 지었었다. 하지만 오빠의 삶이 평탄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철없는 사춘기를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 아팠다. 딱 잘라 맞춘 듯 완벽한 인생을 사는 오빠. 감정의 동요 없이, 그렇기에 진심으로 웃는 일 하나 없는 그 오빠.
오빠를 지탱해 주던 건 윤재희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시은은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아빠 몰래 살금살금 다가갔던 창고. 그 안에 있던 둘을 보고 그대로 뒤를 돌았었다.
나는 여동생인데 왜 나보다 쟤랑 더 친하지? 내가 더 잘 위로해 줄 수 있는데. 어린 마음이 그리 시기하며 진실을 모른 척했었다. 질투와 시기를 품고 재희를 미워하기까지 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은 참으로 어리석은 철부지였다.
“그래서 나도 늘 죄책감을 이고 살아. 엄마에게라도 말했다면 오빠가 그리되지 않았을 텐데. 시간이 흐른 후엔, 엄마에게 말하는 것조차 새삼스러워졌거든. 오빠도 엄마가 진실을 알지 않길 원했을 테니까.”
기어코 영현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시작인 듯 그녀의 얼굴이 눈물로 온통 젖어 가기 시작했다. 충격에 휩싸인 얼굴은 입술만 바들바들 떨며 일그러졌다.
머리가 어지러워 모든 게 모호하게 느껴졌으나 적어도 하나쯤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제 손으로 아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차병준… 이 나쁜 새끼가……! 가만히 안 둘 거야, 이 나쁜… 나쁜!”
영현은 펑펑 울며 차병준의 이름을 불렀다. 잘게 흔들리는 손으로 와인병을 붙들었으나 잔에 따르기도 전에 엎어져 버렸다. 영현은 아예 병을 밀어 던지며 크게 울었다. 병은 깨지지 않고 큰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아빠 욕하지 마. 애초에 오빠 혼자 둔 건 엄마였으니까. 가장 큰 죄는 아빠가 저질렀지만, 엄마도 결백하지는 않아.”
“…….”
“아빠도 죄인이고, 엄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야. 오빠에겐 우리가 다 괴물이고… 귀신이고… 도깨비야…….”
담담한 척 말을 이으려 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말끝이 뭉그러진 뒤였다.
시은의 하얀 얼굴이 온통 눈물에 얼룩져 있었다. 오랜 시간 홀로 이고 졌던 죄책감이 아프게 파헤치고 깊게 찔렀다. 끅끅 밀려드는 울음을 목 뒤로 억지로 삼키고, 제 안에 가득 고이는 눈물을 움켜쥐었다.
슬픈 엄마를 위로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죄인이고 엄마도 죄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행위조차 강주 오빠를 기만하는 짓이다. 아파야 했다. 아프게 울고, 아프게 뒤틀어야 했다. 위로받을 자격, 자신들에겐 없었다.
“오빠에게 죄인 아닌 사람은 재희 씨뿐이야. 오빠한테는 재희 씨밖에 없었어.”
“…….”
“그러니까 엄마는 재희 씨 반대하면 안 돼. 그럼 정말 안 되는 거야. 염치도 없는 거야.”
영현은 울음을 씹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이 지치지 않고 눈물을 토해 냈다. 손바닥이 눈물로 함빡 젖어 갔다. 통곡에 가까운 사무친 목소리가 강주를 혼잣말처럼 불렀다.
“강주… 강주야…….”
시은은 들썩이는 영현을 보며 저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새까만 정원이 푸른 새벽빛에 물들 때까지 영현의 오열은 멈추지 않았다.
***
재희는 하얀 대리석을 밟아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막 영현의 부름으로 미술관을 방문한 참이었다. 만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부르다니. 또 무슨 일일까.
비서의 안내에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끝에서 누군가 보였다. 영현이었다. 영현은 재희를 발견하자마자 뛰는 것처럼 성급히 내려왔다. 그리고 재희 앞에 멈추어 서서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절 보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윽고 영현이 두 팔을 벌려 재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절로 달아오르려는 눈시울을 가리며 재희를 품에 안았다.
“…아… 저기…….”
재희는 당황으로 정신이 없었다. 엉거주춤한 몸을 움찔거리며 눈만 굴릴 뿐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혹시 관장님이 날 다른 사람으로 오해한 건 아닐까.
처음 강주가 호텔 방으로 절 이끌고 갔던 날보다 더 어찌할 바를 모를 기분이 치밀었다. 그나 그의 엄마나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데는 참 일가견이 있다고 재희는 생각했다.
커다란 숨을 내쉰 영현이 이내 몸을 떨어뜨렸다.
“고마워요.”
“네? 네……? 도대체 뭐가…….”
차 회장의 재판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직 영현이 고마워할 일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영현은 재희의 반문에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재희의 손을 잡고 찬찬히 2층 로비로 걸어갈 따름이었다.
이윽고 둘은 2층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사방이 하얀 대리석 조각으로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평소 모습을 찾은 영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예쁘죠? 제가 좋아하는 조각들만 모아 놓은 거예요.”
“네, 예쁘네요.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여기 앉아서 얘네 둘러보면 마음이 엄청 흐뭇해져. 재희 씨가 보기에도 예쁘다니 기분이 좋네요.”
마주 앉고는 부질없는 얘기만 나눴다. 연말에 여기서 파티를 열기로 했다는 말이라든가, 이따금 이곳에서 신인 작가들의 작가전을 열어 준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재희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갑자기 불러 일상적인 말을 잇는 영현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이 시간이 싫지 않았다.
한참이나 말만 빙빙 돌리던 영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치미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일 년. 딱, 일 년만 떨어져 있어 봐요.”
재희의 미소가 차근차근 지워졌다. 영현이 말하는 일 년이 무슨 뜻인지 대번 알아듣지 못한 까닭이다. 일 년이란 게 무언지. 하지만 어렴풋이 형태가 잡히기도 해 가물가물 되물었다.
“혹시 강주 씨와 일 년 떨어져 있으란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역시. 예상했던 바가 맞았다. 재희는 입술을 물었다 뗐다.
“이건 내가 굽힐 수 있는 마지막까지 굽혀 낸 제안이에요. 일 년. 일 년 동안 떨어져 있어도 그 마음이 여전하면, 그땐 허락할게요.”
“…허락이라면……. 결혼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맞아요.”
영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의 과거를 알게 된 이후 영현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예쁘고 짠하고 딱했던 윤재희란 아이가 내 아들 강주의 구원자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내 아들의 여자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재벌가 회장의 딸로, 재벌가 사모로 산 그녀였다. 평생을 친구처럼 지녀 온 우월감과 선민의식은 쉽사리 재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만, 여지를 주기로 했다.
격동하는 사랑도, 불타는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꺼지기 마련이다. 영현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몸이 멀어진 일 년은, 마음이 멀어지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 후 그들의 마음이 여전하다면, 그땐 어쩔 수 없이 허락할 생각이었다.
“난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켜요. 재희 씨가 강주에게 일 년만 연락하지 않고, 내 아들 흔들지만 않으면 되는 거예요. 계약서라도 쓸까요?”
여전히 답이 없는 재희를 향해 영현이 먼저 물었다. 재희는 한참이나 고민하는 듯 잔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정리됐는지 잔을 내려놓고는 크게 심호흡했다.
“아뇨, 믿습니다. 다만…….”
강주와 닮은 영현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치졸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걸리는 건.
“다만 저도 조건이 있어요, 관장님.”
“…조건. …그래요, 말해 봐요.”
일순 영현의 눈가에 미세한 경멸감이 피었다 사라졌다. 사람이 사리사욕을 쫓는 건 당연하다지만 눈앞의 여자애는 그런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영현의 입가가 실망으로 슬쩍 내려가려는 순간, 재희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일 년 뒤엔 꼭 복직시켜 주세요.”
“…응?”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선강 그룹은 대기업인 데다, 근무 환경도 좋아서 계속 다니고 싶거든요.”
재희 말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는지 영현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원하는 게… 복직. …복직이라고?
“일 년이나 휴가를 쓸 수 없는지라 퇴직으로 처리될 텐데, 취업이란 게 정말 힘들어서요.”
영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가 재빠르게 지웠다.
“원하는 게 그거예요? 복직? 그거?”
“네, 꼭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영현은 잔을 들어 돌연히 웃으려는 제 입매를 가렸다.
한 시간 후. 재희가 떠난 테이블. 홀로 앉은 영현은 테이블을 두드렸다. 일정한 박자 소리가 고요한 미술관을 울렸다.
영현은 재희가 떠나기 전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재희 씨는 전혀 불안해 보이지 않네요? 강주가 변심하면 어쩌려고? 사내들은 믿을 게 못 돼요. 차병준을 생각해 봐요. 개새끼처럼 여기저기 얼마나…….’
‘저는 강주 씨를 믿어요.’
‘그래요? 그럼 강주는 그렇다 치고. 본인 마음은? 재희 씨 본인은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해요?’
그 말에 재희는 가당치 않다는 듯 빙긋 웃었었다.
‘네, 전 절 믿어요. 전 강주 오빠만 십 년 넘게 좋아한 사람인걸요.’
영현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웃었다.
“귀여운 애야.”
원하는 게 복직이라……. 그 대답이 꾸며진 것이든 무어든 그 자리에서 담대히 발언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절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 역시 사뭇 마음에 든 게 사실이다.
“…귀엽네.”
그 귀여운 애를 좋아하는 제 아들을 떠올리며 영현은 다시 웃었다.
***
열흘 뒤. 재희는 착착 정리된 파일을 임 대리에게 건넸다. 끝낼 건 끝내고 넘길 건 넘겨 업무에 이상은 없을 일이다. 일 년 뒤에 강주와 결혼한 뒤 다시 복직하면 모든 게 해피 엔딩인 셈이다.
“여기요, 대리님. 어제 드렸던 자료에 이상은 없었죠?”
“응, 윤 주임이 워낙 잘 정리해 놨으니까.”
열흘 전. 재희는 갑작스레 퇴직 소식을 전했다. 일 년 뒤에 다시 오겠다며. 그 말을 들은 팀원들은 모두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상무님과 그런 사이인데 지금까지 근무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말로는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을 테지. 차후엔 사모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겠지……. 모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시 뵈어요.”
재희는 깔끔히 마지막 인사를 전한 후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뼈를 갈아 가며 만든 자리인 데다 경력도 착착 쌓아 가고 있었는데.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많이 지쳐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은 기회라 여기며 푹 쉬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영현이 반드시 복직시켜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일 년만 좋은 곳에서 쉬면 강주 씨를 준다는데……. 어쩔 수 없지.’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재희 인생의 우선순위는 엄마와 효정이, 그리고 강주였다. 그 우선순위를 위해 무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출국장에 들어서는 재희의 짐은 가뿐했다. 자그마한 배낭 하나와 캐리어 하나가 다였다. 재희는 커다란 유리창 앞을 서성이며 효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효정아. 응, 응. 아냐, 가끔 들어와서 너랑 엄마 볼 거야. 강주 씨에겐 말하지 말고……. 응, 맞아.”
강주는 보지 못해도 이따금 한국에 오기는 할 터라 의외로 마음의 짐은 없었다. 센스 좋게도 영현이 효정이 기거할 집까지 마련해 주어 더욱 속이 편했다.
효정과 전화를 끊은 재희는 한참이나 휴대 전화를 들고 만지작거리다가 강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주 씨. 휴대 전화 창 위에 간결히 박힌 단어가 오늘따라 낯설다.
몇 번 울리지 않아 강주가 받았다.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위치를 물어 왔다.
-어디예요, 재희 씨? 집에 왔는데 재희 씨가 없네요.
재희는 일순 침묵했다. 전화기를 든 손이 움찔거렸다. 지금까지 대범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으나 그의 목소리를 듣자 감정이 새삼스러워졌다.
지금 나가면 정말 일 년은 그를 보지 못할 터다. 이따금 귀국할 때도 그는 볼 수 없다. 이 다정한 음색도, 절 안아 주던 품도 일 년 후에야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심장이 묵직하게 조였다. 애써 숨긴 감정이 비집어 나올까 두려워, 재희는 가슴팍에 손을 얹어 심장을 꽉 눌렀다.
-재희야?
재희는 숨을 깊게 네 번 정도 쉰 뒤에야 그에게 답할 수 있었다.
“강주 씨, 우리 결혼할 수 있게 됐어요. 단… 일 년 뒤에.”
-…뭐?
재희는 애써 힘껏 웃었다.
“자세한 얘기는 관장님께 들으시면 돼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약속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애초에 약속이 그것이었다. 강주에게는 비밀을 지킬 것. 떠나는 당일 전화로 작별 인사는 해도 되나, 그 이후에는 절대 연락하지 말 것.
재희는 아무렴 좋았다. 둘 사이의 믿음이 있는데 그 정도 제약이 대수랴. 그렇게 자기 합리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않으면 헤어짐으로 사무치고 미어지는 제 마음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강주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화 너머로 가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입을 다문 강주를 향해 재희가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전 강주 씨 믿어요. 강주 씨도 나 믿으리라 생각해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지금 어디예요, 재희 씨.
“일 년 뒤에 봐요. 사랑해요.”
그리고 그의 답이 들리기 전에 통화를 끊었다. 가방을 열어 휴대 전화를 가장 아래 눌러 박았다. 그의 목소리가 계속 남은 휴대 전화를 붙들고 있노라니 발을 떼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재희는 비행기 표를 든 채 게이트 앞으로 걸어갔다. 발걸음마다 아픈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오늘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발걸음을. 분명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는 것처럼 조금은 외롭고 낯설며 사실은 매우 슬픈, 지금을.
여행의 단꿈에 젖은 이들 사이에서 재희는 이방인처럼 움직였다. 진정 이방인이 될 곳을 가기 위해 찬찬히 발을 디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자르르 슬픈 파동이 쳤다.
그날은, 기묘하게 시작된 술래잡기에서, 기어코 재희를 잡아챈 강주의 새로운 놀이가 시작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