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96)

 #85

“저는 어머니 보고 싶어요. 재희 씨와 손잡고 오래, 자주.”

 영현은 강주에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제 아들이지만 참 어려운 상대였다. 반기 들어 크게 반항하면 차라리 다루기 쉬웠을 텐데, 동요 하나 없이 차근차근 다가오니 참 수월하지 않다.

 영현은 물만 벌컥 마셨다. 강주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이번 일이 씨알도 안 먹혔다는 건 알 것 같았다.

 ***

 퇴근 30분 전, 재희는 영현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복사실로 뛰어와 몰래몰래 받으며 들은 얘기는 간단했다.

 -한번 만나요, 우리. 강주 없이 둘이서만.

 이제 정말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영현과 독대한 적은 있었으나 제 엄마 사고 문제로 불려 갔던 것이지 결혼 얘기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재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결혼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가리라고.

 그간 영현은 의도적으로 결혼 얘기를 회피하기만 했었다. 몸서리치며 반대한 적은 없으나 결혼은 시기상조라며 딱 잘라 선을 그었고, 더 만난 후에야 오갈 얘기라며 미리 차단했었다.

 그랬던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 오는 이상, 칼을 들 준비가 됐다는 거다. 그 칼이 자를 것이 무엇이든.

‘내가 싹둑 잘리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재희는 애써 가볍게 생각하며 로비 앞에 선 차에 올라탔다. 흰색 리무진 뒷자리에는 이미 영현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그래요, 반가워요.”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영현 역시 눈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삼십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적한 한강 근처 카페였다. 재희와 영현은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창 뒤로 강물이 유유히 흘렀다. 노을 내린 수면이 깨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반짝거렸다. 바람도 머물러 갈 것처럼 평온한 장소였다.

 비서가 커피를 내려놓자마자 영현은 급하게 몇 모금 마셨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재희는 돌아서는 비서에게 고개인사를 보낸 후 저 역시 잔을 들었다. 하지만 “잘 마시겠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영현의 목소리가 던져졌다.

“나, 재희 씨 싫지 않아요.”

 재희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마시려던 커피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테이블에 다시 놓았다. 영현에게서 바로 본론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마실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내 집에 살 때부터 칭찬하고 싶었어요. 아주 잘 자라 주었어. 눈빛도 좋고.”

 소파에 등을 길게 대며 영현은 긴 다리를 죽 늘여 꼬았다.

“재희 씨 아주 예쁘고……. 아주 참해. 재희 씨 착한 눈동자 보면 안아 주고 다독여 주고 싶어요. 어린 동생 잘 키웠지……. 아프신 엄마 잘 모셨지. 이번 일도 아주 딱 부러지게 처리하고. 칭찬하며 고개 끄덕여 주고 싶어.”

 재희는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속삭였다. 제 칭찬을 하려 꺼낸 얘기가 아니라는 건 확실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여지없이 맞았다.

“타인의 눈으로 볼 땐 재희 씨가 이겨 낸 모든 것들이 참 대단해 보이거든. 그런데……. 그런데 내 아들 부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렇지가 않아. 내 아들 발치 잡아끄는 고된 역경으로 보이는 거야.”

“…….”

“진작 말했어야 서로가 편했을 텐데, 내가 피하기만 해서 미안해요. 솔직히 말할게. 난 재희 씨 허락할 수가 없어. 환경 조건만 아니었다면 재희 씨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거야. 재희 씨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

“…네.”

“그런데 그 칭찬해 주고 싶은 안쓰러운 애가, 내 아들의 부인이 되는 건……. 솔직히 탐탁지가 않아요.”

 재희는 가까스로 답하던 ‘네.’라는 짧은 문장조차 내뱉지 못했다.

 영현은 시선을 창문 밖으로 떨어뜨렸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심란한 둘의 마음을 모르는지 강물은 평화롭게만 흘러갔다.

 이윽고 한숨과 함께 영현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고개를 숙이고 망연한 표정으로 손만 내려 보는 재희가 보였다.

“재희 씨.”

 재희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마주한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젖어 있었으나, 애써 참는지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재희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가정 꾸리고. 다만……. 내 아들 말고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면 안 될까?”

 재희는 영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강주와 너무도 닮은 얼굴이 보였다.

 차라리 드라마 속 사모님들처럼 얼굴에 찬물을 붓거나 뺨을 쳤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돈이라도 밀어 준다면, 이런 것 바란 적 없다며 거절이라도 할 수 있건만. 조곤조곤 교양 있는 어조로 전하는 터라 오히려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게 살다 보면 주제 파악쯤은 할 수 있게 된다. 분명, 자신은 강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께하고 싶었다. 먼 길 돌아 이제야 마음이 닿았는데. 이제야 서로의 마음을 보았는데. 이대로 꼬리를 만 채 고개 숙여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재희는 허리를 똑바로 폈다.

“저도 제가 강주 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관장님.”

 영현은 재희가 무슨 말을 할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저 강주 씨 정말 좋아해요. 정말 좋아합니다. 강주 씨도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어요.”

“…….”

“결혼하겠다며 되바라지게 반항해서 관장님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사랑하는 분의 어머니시니까요. 다만, 헤어지시라 종용하시면…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습니다.”

 영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침묵뿐인 영현을 향해 재희는 고개를 숙였다.

“제게 다른 사람과 행복하라고 하셨지만 전 다른 사람과는 행복할 수가 없어요. 강주 씨가 있어야 행복해요. 관장님 말씀에 고개 끄덕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

 영현은 가만히 팔짱을 꼈다. 입술 틈으로 미끄러져 나오는 말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강주는 이미 귀가한 뒤였다. 그도 방금 들어왔는지 젖은 머리로 서류를 검토하려다 재희의 도착을 알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다녀왔어요?”

 자연스럽게 재희의 가방을 받으며 강주가 물었다. 그에게서 약한 바디 워시 향이 났다. 마음이 괜히 편해졌다.

 함께 퇴근하자는 강주의 말에 재희는 선약이 있다며 거절하고 영현을 만난 참이었다. 누구를 만나는 거냐며 꼬치꼬치 묻는 강주에게는 나중에 알려 주겠다고 대충 둘러대고는.

 재희는 카디건을 벗으며 솔직하게 답했다.

“유 관장님 만나고 왔어요.”

“…어머니?”

 자연스럽게 재희의 카디건을 받아 들던 강주가 행동을 딱 멈췄다. 재희는 몸을 돌려 강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 위로 무성히 지나는 감정이 확연했다. 의문, 걱정, 염려. 영현이 무슨 말을 하려 불렀을지 빤히 보인다는 눈이었다.

 재희가 스치듯 웃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헤어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으니까.”

 강주가 뒤늦게 한숨처럼 웃었다. 그제야 안도한 듯했다.

“어머님께서 제게 나쁜 말씀 하신 건 아니니 그것도 걱정하지 말고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말씀해 주셨을 뿐이거든요. 솔직히 상처이긴 했는데……. 사실이라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어요.”

“왜 혼자 갔어요. 다음에는 나 불러 꼭 같이 가요.”

“아뇨, 강주 씨가 보란 듯 저 싸고돌면 관장님은 더 벽 치실 거예요. 괘씸하다고.”

 재희는 손을 들어 강주의 뺨을 가만히 매만졌다. 걱정으로 침전된 얼굴이 조용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앞의 사랑이 이토록 잘생기고 이토록 잘났는데. 그런 잘난 사람 얻으려면 이 정도 난관쯤이야. 게다가 영현의 반대는 이미 예측했던 바 아니었나.

“관장님 반대에 쥐새끼처럼 몰래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어머님 앞에 강주 씨 죄인 만들기도 싫어요. 그렇다고 제가 관장님께 아양 피우며 어머님, 어머님, 한다고 받아들여 주실 것 같지도 않고…….”

 영현은, 손 싹싹 비비며 하는 아부에 치를 떨 게 뻔했다. 애초에 딱 부러지는 성정이 그러했다. 강주와 놀랍도록 닮은 사람 아닌가.

“아무래도, 관장님 설득하는 건 제 몫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잘 부탁할게요. 강주 씨 협상 잘하잖아요. 나 살살 꼬여서 계약 결혼까지 성공시키고.”

 그녀의 농담 어린 언중에 강주를 향한 믿음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래요, 재희 씨는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해요.”

 강주는 재희의 믿음을 향해 나지막하게 답하고는 그녀의 몸을 힘주어 안았다. 고맙고, 소중하고, 동시에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

 늦은 밤. 영현은 와인병과 잔 두 개를 들고 딸 시은을 찾았다.

“딸, 자니?”

“아니야, 엄마.”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던 시은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우리 엄마 술이 고프신가 보네? 장난스럽게 웃으며 영현에게서 와인병을 받아 든다.

 둘은 2층 테라스에 자그마한 술판을 벌였다. 서늘한 바람이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와인 두 잔을 연달아 마신 영현이 달아오른 뺨으로 시은에게 말했다.

“시은아, 오늘 재희 씨 만났거든. 만나서 헤어지라고 말했는데 안 통하더라.”

“…그랬어?”

“마음 같아서야 험한 말 해서 쫓아내고 싶은데……. 걔 눈을 보니 그렇게 안 되데. 눈동자가 참 선하고 맑아서 차마 못 그러겠더라고. 나 나쁜 말 잘하는데.”

“알지, 우리 엄마 모진 말 잘하는 거.”

 시은이 알게 모르게 웃었다. 제 모친 영현은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말속에 사정을 두는 편도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에 속에 있는 말을 투명하게 내뱉는 쪽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재희에게 모진 말을 하지 못했다는 건, 마음속에 일말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겠지.

“재희 씨가 싫은 건 가정환경 때문이야?”

“응, 내 아들. 잘나고 멋진 내 아들, 제일 잘나고 제일 멋진 며느리 붙여 놓고 싶은 거… 욕심 아니잖아. 세상에 그렇게 반듯하고 잘생기고 능력 있는 애가 어디 있어? 사모들 모이면 다 강주 얘기해. 어쩜 그런 애를 낳았냐고.”

“그렇지. 오빠 좋아하지, 다들…….”

 영현은 잠잠히 눈을 깔고 와인을 따랐다. 잔을 채우는 물소리만이 나직이 울린다.

“중간만 가도 허락하겠어. 가정부 딸이 뭐야, 가정부 딸이. 차병준, 그 사람과 얽힌 건 또 어떻고. 왜 하필…….”

 술기운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얼굴로, 영현이 주정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가난하기만 한 게 아니라 가정사가 불우하기까지 하다.

 재희 자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런 환경의 아이를 강주에게 붙였다가 강주까지 발목 잡힐까 걱정이 됐다.

 소중한 내 아들. 어린 시절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최고의 며느리라도 붙여 줘야지. 그것이 주지 못한 사랑에 보상할 길인 것 같았다.

 지금은 사랑에 눈이 멀어 윤재희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 콩깍지가 떨어지면 알게 될 터다. 여자는 무수히 많고 그중 윤재희보다 좋은 여자도 있다는 사실을.

 시은은 엄마의 잔을 빼앗아 제가 마셨다. 복잡한 표정으로 단숨에 목 뒤로 넘기더니 탁, 잔을 내려놓았다. 결심한 얼굴이 영현을 향해 고개를 든다.

“엄마, 엄마의 그 자랑스러운 아들. 과거에 무슨 일 있었는 줄 알아?”

“…응? 일이라니?”

 영문 모를 표정으로 영현이 반문했다.

 시은은 잔을 꽉 움켜쥐었다. 재희와 강주의 결혼을 팔 걷어붙이고 설득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이야기가 나온 이상 할 말은 해야 했다.

 제 속에 늘 감추고 있던 말. 아마, 엄마를 아주 아프게 할 그런 말을, 지금 이 순간.

“오빠, 폐소 공포증 있어. 엄마도 알지?”

 영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두려움의 종류나 크기는 다를 수 있다며 주치의가 가볍게 위로해 주었기에 이미 수긍하는 바였다.

“그거 두 사람 때문이야.”

 영현은 쉽게 시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눈썹 사이로 미약한 주름을 만들며 되물었다.

“두 사람이라니?”

“엄마, 그리고 아빠.”

“…뭐?”

 시은의 표정이 사뭇 무겁게 가라앉았다. 충격으로 찬찬히 젖어 가는 영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엄마가 이 커다란 집에 오빠 넣어 놓고 모른 척했잖아. 그래서 아빠가 강주 오빠에게 커다란 괴물이 됐다고.”

“그게 무슨…….”

 영현은 시은을 망연히 응시했다. 심장이 쿵쿵쿵, 기분 나쁘게 뛰었다. 거센 혼란이 인다. 무언가 좋지 못한 예감이 물밀듯 치밀었다.

 강주의 폐소 공포증이 나 때문이라니. 게다가 차병준, 그 사람이 괴물이 됐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거칠게 절 흔드는 심장 소리 틈으로 시은의 목소리가 꽂혔다.

“오빠가 어렸을 때, 창고에 자주 갇혔어. 엄마 몰래 아빠가 오빠 학대했다고. 오빠 트라우마도 그래서 생긴 거야.”

“…….”

 망연자실한 눈이 시은의 입술만 응시했다. 제 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아니, 알아듣기는 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명확히 이해했다. 하지만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가쁜 숨만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 그때 재희 씨 없었더라면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는 그 오빠……. 지금 없어.”

 아주 늦은 밤. 창고로 들어서던 재희를 우연히 발견했던 밤. 그날을 떠올리며 시은이 쓰게 웃었다. 다시 되새기는 과거조차 죄책감을 아프게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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