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96)

 #84

 21장. 말해 줘

 아침 하늘은 높다랗고 청량했다. 차를 타고 지나느라 햇살 머금은 나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만큼 좋은 날이었다.

 재희는 운전하는 강주의 옆얼굴을 힐끔 살폈다가 괜스레 얼굴이 붉어져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반듯한 얼굴이 새삼스레 참 잘생겼다.

 하늘이 높다란 게 당연한 것처럼 강주가 잘생긴 것도 몹시 당연한 일이었는데……. 제 옆에 있는 사람이 근사해서 괜히 설??다. 이제 제 사람이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동안은 먹을 수 없는 떡이라는 생각을 해 애써 외면했지만, 당장 집어 먹을 수 있는 떡이 됐다고 생각하니 더 맛있어 보인달까.

 재희는 라디오 음악 소리에 맞춰 앞발을 까딱였다.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사건은 쾌속 순항 중이었다. 엄마의 사건 재수사 신고 이후 방향의 윤곽이 잘 잡혀 가고 있었다. 차 회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건을 질질 끌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의 몰락은 예정된 일이었다. 좀 더 시간을 늦추는 것뿐.

 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새까만 구렁텅이뿐이었다.

 멀리 회사가 보였다. 재희는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한 번 바르고 뚜껑을 다시 잠갔다. 도착도 전에 가방부터 만지는 재희를 보며 강주가 옅게 웃었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나갈 준비 하는 거예요? 서운한데.”

“그냥 입술이 말라서 바른 거예요.”

 재희는 변명처럼 내둘러 말했다. 재희의 통통한 입술을 힐끗 바라본 강주가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그의 차를 타고 출근하는 일에 이젠 꽤 익숙해졌다. 이전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 통근했으나 지금은 강주와 함께였다.

 사실 마음이 통하기 전에도 강주는 제 차를 타고 통근하라 제안했으나 그때엔 깨끗이 거절했었다. 언젠가는 끝날 사이라 생각했기에 공연히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강주를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재희는 어느새 멈춘 차 안에서 강주를 향해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아침부터 외부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답했는데 기어이 이렇게 회사까지 바래다주었다.

“고맙긴, 이따 봐요.”

 아무렇지 않은 강주의 답 뒤로,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재희는 깜짝 놀라 가방을 움켜쥐었다. 지금 강주의 차가 서 있는 곳은 회사 로비 앞이었다. 그녀만 내려 주고 다시 갈 것이었기에, 출근 중인 회사원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바로 로비 앞에 차를 세운 것이다.

 심지어 차 바로 앞에는 보안 요원까지 서 있는 상태였다. 선팅이 아무리 잘되어 있다고 한들 이렇게 하면 실루엣 정도는 보일 텐데.

 놀라 달싹이는 입술 틈으로 혀까지 들어왔다. 강주는 아주 짧게 그녀의 입 안을 헤집고는 깔끔하게 물러섰다. 양껏 붉어진 뺨으로 재희가 씩씩거리며 상체를 물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럼 어디서 뭘 할까요.”

“…….”

“다른 데 가서 다른 거 하면 괜찮아요? 다른 데 갈까?”

 운전대를 툭툭 두드리며 하는 농담에, 재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이 통한 이후로 그는 늘 이렇게 직진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잘 웃었고 상무님일 때보다 가벼운 농담을 자주 던졌다.

 그래서, 꼭…….

‘꼭 강주 오빠랑 있는 것 같네. 마음 간질간질하게.’

 물론 눈앞의 강주가 그 ‘강주 오빠’가 맞긴 했다. 하지만 그간 ‘상무님’은, 학생이었던 강주 오빠와는 몹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나. 표정부터 태도, 툭툭 쏘는 말투까지 차이가 극명해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 진짜 갈게요.”

“그래요.”

 아침 볕이 그의 눈동자에 가느다랗게 담겼다. 미소 짓는 얼굴이 어찌나 반짝이는지 재희는 문을 열려다가 말고 강주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강주 오빠가 날 좋아한다니 믿을 수가 없어. 이렇게 눈치 보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다니.’

 적극적인 재희의 접촉에 오히려 강주는 빳빳이 굳었다. 살짝 놀란 모양이다. 재희는 강주의 뺨에 기습적으로 뽀뽀를 하고는 조수석을 빠져나갔다.

“이따 봐요!”

“…….”

 그녀의 온기만 남긴 채 햇살만이 맴도는 차 안. 홀로 남은 강주는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뒤도 안 보고 걸어가는 재희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그녀가 로비 안으로 들어가서야 고개를 돌렸다.

 무얼 생각하는지 강주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재희가 팔을 감았던 목덜미를 느릿하게 매만지고,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천천히 문지르더니 번지듯 천천히 미소 지었다.

 ***

“그간 많이 신경 쓰이셨겠어요.”

“아주 곤혹스러웠지, 뭐.”

 유선의 걱정에 영현은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억지로 끼니를 때우려 했으나 식욕이 돌지 않는지 앞 접시마저 밀어 버린다.

 일은 순조롭게 돌아갔다. 제 남편은 곧 완벽한 전남편이 될 터이고, 그의 일이 제 낯을 화끈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일은 잘 수습됐다. 아마 차병준을 처단하고 난 뒤 발을 쭉 뻗고 잘 즈음이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지금의 수치는 지워지고 없을 터다.

 아마 한때 웃으며 씹었던 가십으로만 남게 되겠지. 단물 다 빠져 땅에 뱉어 버린 껌처럼 의미 없는 일이 될 거다. 모든 일이 그렇듯.

 영현은 입 속으로 작게 욕을 했다. 차 회장을 떠올리니 새삼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영현의 속내를 읽은 듯, 빙긋 웃은 유선이 찻물을 따라 건넸다.

“드세요, 관장님. 아까 마셔 보니 입 안이 개운해지더라고요.”

“고마워요, 유선 씨.”

 영현은 잔 너머로 유선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아무리 보아도 참 아까운 상대였다.

‘우리 강주와 정말 잘 어울리는데.’

 하지만 강주 옆에는 부용 그룹 회장 손녀 정유선이 아닌, 가정부 딸 윤재희가 있었다.

“…….”

 안 그래도 썼던 입 안이 더욱 써졌다. 내로라하는 집안까지는 아니더라도, 흠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아비도 일찍 여읜 데다가 시집도 안 간 여동생이 딸린 아이. 심지어 모친은 제 남편과 불미스럽게 얽혀 있기까지 했다.

 사람을 사람만 보고 평가할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결혼을 위해서는 상대의 집안이나 재력, 심지어 가풍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것을 소위 조건이라 불렀다. 결론적으로 윤재희는 그 조건에 전혀 맞는 대상이 아니었다.

 윤재희. 윤재희. 영현은 머릿속으로 재희의 이름만 읊조렸다. 영현을 지켜보던 유선이 빙긋 웃었다.

“관장님.”

“응, 응?”

 생각에 잠겨 있던 영현이 겨우 답했다.

“이렇게 자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하긴, 내가 먼저 강주에게 유선 씨 들이민 건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주어 나야말로 고맙지.”

“솔직히 저 자신 있었거든요. 열 번 찍으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좀 당황하기는 했어요.”

 그런데도 도통 포기가 안 돼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유선이 싱겁게 웃었다. 영현은 시계를 한 번 살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곧 강주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유선과 함께 있음은 알리지 않고 강주를 불러들인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나게 한 다음, 그래도 정 아니라면 깨끗하게 포기할 생각이었다.

 오래지 않아 별실 문이 열렸다. 안에 들어서던 강주는 유선을 발견하고는 멈칫 걸음을 멈췄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영현 옆에 앉았다.

“오래간만이네요, 강주 씨.”

“네, 잘 지내셨습니까.”

 절 향해 빙긋 웃는 유선을 향해 미소를 되돌리기까지 하며.

 식사 시간은 의외로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영현의 미술관에 새로 도착한 작품 이야기나, 요즘 유행하는 패션계 얘기까지 아우르는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영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둘을 보고 기뻐했으나,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오늘 반가웠어요, 강주 씨. 다음에 한번 전시회라도 함께 가요.”

“죄송합니다만, 제겐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어 함께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강주는 딱 자른 매너로 유선을 대했고, 유선은 그의 딱딱한 친절을 마주하며 거의 체념한 상태였다. 둘 사이 기류를 읽은 영현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유선이 떠난 별실에 두 모자만이 남았다. 강주가 먼저 앉아 찻잔을 들었다. 유선을 배웅하는 사이 차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어머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 조금 지겹습니다.”

 차를 마시며 강주가 담담히 의견을 전했다.

 웃고 있기는 하지만 꽤 피곤한 상태였다. 어머니와의 식사 자리인 줄 알고 왔더니 난데없이 유선이 앉아 있었다. 모친의 얼굴을 보아 적당히 상대하기는 했으나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회사 일로 바빠 정신없이 시달리던 참이다.

 영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막상 강주의 태도를 보니 괜히 실망스러웠다. 그럼 그렇지.

“강주야, 엄만 네 결혼 방해할 생각 없어. 결혼하지 말라고 너 쫓아다니며 시위할 생각도 없고.”

“그런 것치고는 상황이 꽤 당황스러운데요.”

“네 결혼에 반대는 안 하겠지만, 나 역시 내 뜻대로 널 설득해 보겠다는 뜻이지.”

“글쎄요……. 어머니와 저만 피곤해지는 선택이 아닐까 싶어요.”

 강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미소를 마주하는 영현은 강주가 퍽 괘씸해졌다. 어미인 자신은 속이 달아 발이 동동인데, 홀로 저렇게까지 태연자약할 필요가 있나.

 이게 뭐 날 위해 하는 일인가? 너 잘되라고, 다 널 위해서 하는 일인데.

“강주야, 엄마도 재희 나쁜 아이 아니라는 거 알아. 그런데 걔는 내 남편과 불미스럽게 얽혔잖니? 볼 때마다 차병준이 떠오르면 어떡해? 엄마 마음도 네가 이해해 줘야지. 엄만 지금도 그 사람 생각하면 치가 떨려.”

 순간 강주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이어 강주는 어렴풋이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저도 보지 않으셔야지요.”

“응?”

“제 법적 아버지와 깊이 얽혀 있는 건 재희 씨보다 아들인 저겠죠. 절 볼 때마다 아버지 떠오르면 그때도 저 안 보실 거예요?”

“…….”

 애써 변명한 핑계가 대번 싹둑 잘리자, 영현은 잠깐 답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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