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96)

 #83

 주말 내내 둘은 짐승처럼 몸을 겹쳤다.

 서로의 몸이 떨어지면 강주는 입을 맞추며 달라붙었고, 정액으로 얼룩덜룩한 그녀의 몸을 붙든 채 쉼 없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던 재희는 강주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성난 남자를 포근히 다독이며,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사정하는 남자를 품에 안아 쓸어내렸다.

 몇 번의 정사가 이어진지도 모르겠다. 끝을 모를 것 같던 밤도 어느덧 밝았다. 해소되지 않은 갈증에 재희를 물고 빨며 뒹굴던 사내가 그녀의 다독임에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하아…….”

 재희는 그의 품 안에서 너절한 숨을 뱉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셀 수 없는 절정을 맞이한 몸은 손가락 까딱하기 힘들 만큼 나른했다. 이대로 침대 깊숙이 녹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자 따뜻한 햇살이 제 몸을 잔뜩 뒤덮고 있다. 깊은 충족감이 그보다 더 따뜻하게 제 마음을 뒤덮었다. 보드랍고 말랑한 감정이 날갯짓하며 제 마음속을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재희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시달리느라 펑펑 울었던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단단한 그의 턱이 보였다.

“강주 씨.”

 그의 이름을 부르자 강주가 얼굴을 내려 눈을 마주쳐 왔다.

 밤새 그녀의 목소리를 막고 숨결까지 집어삼키려 했던 그다. 재희가 꺼낼 말이 두렵다는 듯 억세게 밀어붙이기만 했다. 이별을 인정할 수 없던 탓이다.

 강주의 눈빛에 미약한 초조함이 일었다. 재희가 대가를 운운하며 마지막을 말해 온다면 같은 짓을 할 의향이 있다는 의지가 다분한 눈이었다.

 재희는 조심스레 그의 뺨을 쓸었다.

 평소라면 이 무뚝뚝한 얼굴을 보며 불안해했을 터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마음을 안다. 강주의 무표정한 낯 속에 숨은 일렁임이 빤히 보여 불안하지 않았다.

 진작 알았더라면 나도, 당신도 이토록 돌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강주 씨, 내가 좋아요?”

 그의 표정에는 동요 하나 없었다. 하지만 일순 흔들리는 눈동자를 재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났다. 이전에는 왜 몰랐을까. 본인의 마음을 숨기는 데 급급하여 그가 숨긴 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이렇게 빤히 드러내는 사람이었는데. 미련하게.

“아니면, 사랑해요?”

 속삭임 같은 물음이 조용히 울렸다. 담담함을 가장하던 강주의 낯에도 이번엔 균열이 갔다. 강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은 이미 차고 넘쳐 입만 열면 고백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올 것이나 애써 짓눌러 버린다. 마치 자신의 입으로 사랑을 말하면, 눈앞의 재희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처럼 불안한 얼굴이었다.

 한참이나 재희를 바라만 보던 그가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재희가 이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당겨 안는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허물어지는 속삭임이 잔물결처럼 스쳤다.

“그 어떤 짓을 해서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고 말하면.”

 절 으스러지게 안는 그의 체온이 뜨거워, 재희는 이불만 꽉 쥐었다.

“그러면 나 봐 줄 수 있어요? 재희 씨 마음, 한 번쯤 줄 수 있겠어요?”

 강주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마치 무너지는 것처럼 고백했을 뿐이다. 담담하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그가 평생 품고만 있던 감정이 무겁게 파도쳤다.

“내가 재희 씨를 사랑한다고 해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재희 씨뿐이라고……. 그렇게 말해도 그때처럼 나 버릴 거예요?”

 재희는 놀란 눈을 들었다. 심장이 크게 출렁였다.

 그때처럼 날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무리 과거를 더듬고 회상해 보아도 자신이 그를 버린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훌쩍 떠나고 밀어냈던 건 그 아니었는가.

 내가 강주 씨를 어떻게 버려요. 강주 씨 버린 적, 한 번도 없어요. 사무치는 속마음을 말해 보려 고개를 들었으나 절 으스러지도록 안는 강주의 억센 힘에 몸이 다시 묻혔다.

 얼굴을 푹 기댄 가슴팍에서 거세게 뛰는 강주의 심장 소리가 울렸다.

“나 동정해 줘요. 학대받으며 자란 불쌍한 놈이라고 혀를 차도 좋아요. 기댈 건 재희 씨밖에 없던 병신이라고 욕해도 좋으니 가엾게 여겨 줘요. 그렇게라도-.”

 치미는 감정을 삼키는지, 강주의 목울대가 천천히 넘어갔다.

“그렇게라도 사랑해 줘요.”

“…….”

 재희는 눈을 홉뜨며 강주에게서 뺨을 떨어뜨렸다.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낮고 고요해서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재희는 알 수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 뒤에 어떤 격한 감정이 고여 있는지. 아마 성난 듯 요동치며 아프게 그를 긁고 있을 것이다.

 재희는 강주의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고개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으로 마음을 풀어내고 있는지 마주하며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희를 놓아주지 않을 셈인지, 그녀를 안은 강주의 힘은 더욱 억세졌을 뿐이다.

“강주 씨, 저 할 말 있어요.”

 재희는 그의 팔뚝을 달래듯 토닥토닥 두드렸다. 미동도 없던 팔이 그제야 살짝 풀렸다. 그녀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절 깊게 파고드는 눈동자가 보였다. 마치 처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불안과 초조로 미약하게 흔들리는.

“강주 씨, 전 강주 씨 곁에 계속 있을 거예요.”

 순간 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크게 뜬 눈이 재희를 놀라 바라본다.

“어릴 적, 강주 씨 곁에 있던 건 동정 때문이 아니었어요. 지금 강주 씨 곁에 있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예요.”

 손바닥에 닿은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대하면서도,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안해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이다.

 그런 강주를 향해, 재희는 자그맣게 고백했다.

“사랑이었어요.”

“…….”

 침대 위는 고요했다. 창문 밖에서 환청처럼 밀려오는 밤의 소음만이 정적을 저밀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히 그에게 닿았다.

 강주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출렁였다. 그녀의 말을 확신할 수 없다는 듯 반쯤의 기쁨과 반쯤의 의심이 숱하게 지나갔다.

 재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불신이 문득 가여워졌다.

 무엇이 당신을 이토록 불안하게 했을까. 무엇이 누구보다 강한 당신을 이토록 무너뜨리는 걸까. 그게 내가 아니라면 좋겠는데.

 먼저 팔을 뻗은 건 재희였다. 늘 그에게 안겨만 있다가 용기를 내어 먼저 끌어안았다. 희미하게 굳어지는 그의 어깨가 닿았다. 강주는 딱딱하게 경직돼 안겨 있기만 하다가, 그녀의 체온이 계속 절 감싸 안자 그제야 안도한 것처럼 기다란 숨을 내쉬었다.

 재희는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커다란 몸으로 제게 무너지듯 기댄 남자의 머리카락이 섬세하게 스쳤다.

“강주 씨가 좋아요.”

“…….”

“그냥 말할 걸 그랬나 봐요. 강주 씨가 절 피할까 봐, 절 밀어낼까 봐 무서워서 혼자 품고만 있었는데.”

“…….”

“강주 씨도 내가 좋으면 그냥 말하지 그랬어요. 애꿎게 괜히 먼 길 돌아왔잖아. 그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강주를 향해 재희는 혼잣말처럼 고백했다.

 강주는 그녀에게 기대어 가만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담담하고도 동요 없는 태도 같았으나, 격하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과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을 재희는 선명히 마주했다.

 분명 자신의 말 한 마디, 단어 하나 놓치지 않고 속에 담아내고 있으리라.

 그는 늘 이런 사람이었다. 말 대신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미리 눈치챘더라면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해 다른 길로 돌아오는 엇갈림은 없었을 텐데.

 한동안 재희를 안고만 있던 강주가 그녀의 머리에 제 뺨을 살며시 댔다.

“내 마음을 보이면 네가 날 또 피할까 봐.”

“…….”

“그렇게라도 갖고 싶었어.”

 그 이후 재희는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겼다. 익숙한 체온에 갇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그에게 꽁꽁 묶였다. 재희는 미소 지으며 제 몸을 그에게 맡겼다.

 당신도, 겁이 났구나. 태산같이 커다랗고 고목처럼 단단한 사람 같아도, 실상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린 시절의 차강주가 있었다. 제 품에 매달리며 부둥켜안던. 상처 입어 날개를 다친 작은 새.

 재희의 두 뺨에 강주의 손바닥이 닿았다. 강주는 조심스럽게 재희에게 입을 맞췄다. 마음이 통하기 전에는 오히려 거침없이 파고들던 사내가 마치 깃털이 앉듯 초조하고 나약하게 입술을 눌렀다.

 재희는 눈꺼풀 위에, 코끝에 스치듯 겹쳐지는 온기를 느끼며 작게 웃었다. 쉼 없이 내려앉는 키스가 다정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옅은 미소는 곧 멎었다. 문득 뺨 위에 따뜻한 물기가 뭉그러졌기 때문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칠 때마다 그녀의 뺨이 젖어 갔다.

 재희는 손을 들어 그것이 무언지 차마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을 뿐이다.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얼굴이 제 눈물로 젖는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파고드는 강주를 쓰다듬기만 했다.

 애원하듯 무너지는 커다란 사내를 끌어안는다. 재희는 저 역시 크게 울어 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이름을 불러 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속삭여졌다. 재희는 함께 우는 대신 자신을 부둥켜안은 사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제 품 안에서 녹아들 듯 허물어지는 강주가 느껴졌다.

 우는 남자를 끌어안고 이토록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 줄이야. 몹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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