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96)

 #81

“어디 아파요?”

 재희는 괜히 찔려 약통을 꽉 쥐었다.

“아뇨, 아픈 건 아니고…….”

 강주의 눈매가 좁다래졌다. 무얼 생각하는지 미간에 미약한 주름이 잡힌다.

“그건 뭔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

 피임약이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는 일. 연유 없이 민망해 재희는 말을 대충 뭉뚱그렸다. 강주의 냉랭하게 언 눈길이 그녀를 헤집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재희는 그의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피임약을 찬장에 다시 넣은 재희가 몸을 돌려 웃는 얼굴로 그를 걱정했다.

“피곤하시죠? 요새 많이 바빠 보이시는 것 같아 걱정했어요.”

“…….”

“그래도 홀가분하시겠어요. 어제 공고문도 돌았잖아요. 차 회장의 해임 건. 저희 엄마 일로 고소도 당했고… 원하시는 건 다 얻으셨네요.”

 조곤조곤한 그녀의 말에 강주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그의 시선이 피임약이 있을 서랍장과 재희의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원하는 걸 다 가졌다고.”

 묘하게 차가운 목소리가 느릿하게 쏘아졌다. 재희는 그제야 그를 제대로 살폈다. 그저 피곤해 보인다고만 생각했는데, 무표정한 얼굴 위로 냉랭하고 메마른 무언가가 싸늘하게 배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러던가요.”

 차분한 어조는 마치 힐난 같았다. 재희는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팔뚝만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왜 저렇게 칼날 같을까. 적당한 대답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지이이잉- 날 선 침묵 사이로 휴대 전화 진동음이 끼어들었다. 재희는 고개 돌려 그의 휴대 전화를 응시했지만, 강주의 시선은 여전히 재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몇 번이나 몸을 떨어 대던 휴대 전화가 이내 조용해졌다.

“방금 전화 왔었는데…….”

 재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동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강주는 소음을 무시하다가 전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자 지치지도 않고 계속 울리는 휴대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들었다.

“네, 차강주입니다.”

 재희는 옆에 있던 의자에 나약하게 앉았다. 괜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엿들으니 차 회장의 뒤를 이어 오너가 된 그의 외삼촌인 것 같았다.

 대번 심각해진 강주의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또 일이 터진 모양이다. 방금 들어왔는데 다시 나가야 할 만큼 급한 일. 강주는 전화 너머를 향해 알겠다는 말을 던지고는 표정을 구기며 전화를 끊었다.

“저녁에 다시 얘기 좀 하죠.”

“네, 강주 씨.”

 재희는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할 얘기가 무얼까. 어쩐지 속이 몹시 불안해졌다.

 가로등 조명이 땅거미 진 도로를 비추는 시간. 테이블을 짚고 선 재희가 휴대 전화를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넘겨 보냈다.

“그래도 조심하고.”

 -응,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강주 오빠가 붙여 주신 분이 매일 지켜 줘.

“다들 신경 쓰지는 않니?”

 -수업 중에는 밖에 계시니까, 신경 쓸 일 없어.

 손끝으로 테이블을 긁은 재희가 어렵게 되물었다.

“혹시 네 일, 애들이 눈치채지는 않았고?”

 -응, 전혀 모르던데? 소문 안 돌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경호원이 왜 붙어 있는지 궁금해하지는 않아?”

 -궁금해하는데 내가 말 안 하니까 자기들끼리 대충 유추하던데? 누구는 나한테 조폭 딸이냐고까지 묻더라. 그러다가 그냥 관심 다들 껐어.

 재희는 그제야 안도에 찬 숨을 뱉었다. 혹여 차 회장과 관련된 소문이 돌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아무리 결백하다 한들 그런 난잡한 사건에 휘말리는 순간 뜯고 씹기 쉬운 가십이 되고 만다. 어린 효정에게는 버거운 일일 터다.

 효정이의 신변은 철저히 보호해 주겠다는 강주의 말이 있었는데, 역시. 그가 잘 처리한 모양이었다.

“알겠어, 저녁 맛있게 먹고.”

 -응, 언니도! 나 다음 주에 놀러 갈게!

“…그래.”

 그때도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면… 그래. 그러자. 재희는 효정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입 속으로 감쳐물며 전화를 끊었다.

‘저녁에 얘기 좀 하죠.’

 아까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음속에서 까끌까끌하게 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혹시 끝을 말하려는 건 아닐지.

 서로 원하는 걸 가진다면 깨끗하게 마무리를 짓자던 그였기에 더욱 불안함이 사무쳤다. 그는 다 이루어 내지 않았나. 차 회장의 몰락과 제 지위 모두를. 영현의 태도로 보건대 곧 자유도 얻어 낼 수 있으리라.

 재희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시작이기는 하지만 엄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됐으며, 그의 옆에서 받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서로 관계를 끝내도 문제없을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갖고 싶은 건 강주 씨인데.”

 멀거니 밖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본인이 원하는 건 늘 그였다. 잡을 수 없어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분에 넘치게 함께할 수 있게 된 차강주. 몸뿐인 거짓 관계라 해도 그에게 안겨 있을 때 느낀 충족감은 진짜였다.

 재희는 무릎을 끌어당겨 두 팔로 안고는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초조함으로 범벅 된 얼굴이 아래로 폭 숨었다.

“고백하자.”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아까부터 치밀던 결심을 중얼거렸다.

 그가 끝을 말해 온다고 하더라도, 이제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냉정하게 내치더라도. 사실은 사랑한다고, 이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이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아…….”

 차가운 두려움이 전신을 뒤덮었다.

 그의 반응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못 들은 척 넘기려나. 혐오스러워하면 어쩌지. 고등학생 때 그랬듯 다정하고도 차가운 얼굴로 밀어내면 난 어찌해야 할까. 그의 거절을 다시 마주하면 심장이 너덜너덜 찢어지겠지. 아마 아주 많이 아플 것이다.

‘그래도 할 거야.’

 재희는 무릎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제 속에 있는 일말의 희망을 믿어 보기로 했다. 혹시 모를 일 아닌가. 그간 보이던 다정함이 진심일 수도. 처음엔 그저 몸이 마음에 들어 다가왔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어쩌면 마음으로도 품어 주었을지 모른다.

 미리 두려워하지 말자. 떨지도 말자.

 재희는 그리 떨리는 손끝을 꽉 맞잡았다.

 언젠가 강주가 말했던 적이 있다. 거래가 끝나면 대가를 주겠다고. 네가 원하는 거라면 가능한 무어든 해 주겠다며.

‘제가 원하는 건 강주 씨예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마음으로만 품던 못난 고백을 어렵게 꺼내어 자신이 원하는 대가. 차강주를 요구할 예정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초조함에 속이 새까맣게 물들고 손끝이 차게 식었을 무렵 강주가 도착했다.

 재희는 마치 중요한 시험을 치른 후 결과를 기다리는 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시계만 올려다보며 언제쯤 발표가 날까…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런 아이.

“오셨어요?”

“네.”

 강주는 넥타이를 풀며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속이 불안해 그런 걸까. 유달리 오늘따라 그의 눈이 차가워 보였다.

 이어 물소리가 들렸다. 얼핏 스치듯 본 그의 낯에 피곤과 신경질이 잔뜩 감겨 있던 듯싶다. 주말에 급작스레 불려 갈 정도로 바빴으니 이해가 갔다.

“…오늘은 때가 아닌가.”

 무릇 기안서조차 과장님 기분이 좋을 때 올리지 않나. 그에게 전해야 할 게 기안서가 아닌 고백이었으나 그럼에도 적절한 시기란 건 있을 텐데.

 하지만 어려운 일일수록 마음먹었을 때 재빨리 해치우는 게 나았다. 그녀가 생각해 보건대 고백에 적절한 시간은, 바로 오늘이었다.

 재희는 흘러내리는 숄을 어깨 위로 올리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씻고 나올 그를 위해 따뜻한 차라도 탈 생각이었다. 그것이 강주의 굳은 표정을 조금이라도 녹여 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재희는 의식적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속에 치미는 초조함과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기는 싫었다. 음음- 거리며 뜨거운 물에 찻잎을 한 번 우리고, 다시 물을 따라 두 번째로 우렸다. 차 뚜껑을 달칵거리며 도구를 정리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기분 좋아요?”

 향긋한 바디 워시 내음과 듣기 좋은 저음이 함께 다가왔다. 재희는 속삭임처럼 달라붙는 목소리가 아찔해 어깨를 살짝 굽혔다.

“그냥… 이런저런.”

“재희 씨야말로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지니 기분이 좋은가 보네요. 이제 끝을 볼 수 있게 된 거니까.”

 목덜미에 내려앉는 입술과 함께 허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흩어졌다.

 재희는 하마터면 유리잔 뚜껑을 떨어뜨릴 뻔했다. 강주의 젖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자 흠칫 소름이 돋아 온 까닭이다. 손바닥으로 상판을 짚으며 살며시 뒤를 돌았다.

“이거… 차 한 잔 드실래요?”

 그녀의 허리를 줄기처럼 휘감으려던 강주가 움직임을 멈췄다. 눈을 내려 잔을 응시한다. 둘 사이에 뜨거운 김이 희미하게 올라왔다. 따뜻한 김 너머로 재희를 응시하던 그는 이윽고 손을 들어 잔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든 채 다른 팔을 위로 뻗었다.

 재희의 머리 위에 있는 찬장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강주는 재희 뒤에 있는 찬장을 뒤지며 몸을 붙였다. 덕분에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눌린 재희는, 강주의 가슴팍에 손을 대며 엉덩이를 상판에 붙였다.

 강주의 따뜻한 체온과 향기로운 내음이 아득하게 밀려왔다. 어쩌면 이 사람은 이렇게 향기까지 좋을까.

 강주가 무언가를 집었는지 무언가 찰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희는 그 소리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강주만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그의 턱선이 단단히 굳어 있는 게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조심스레 용기를 건넸다.

“강주 씨, 저 할 말 있어요.”

“그래요.”

 어디 한번 말이나 해 보라는 식으로 강주는 무감각하게 답했다. 그가 한 발짝 뒤로 몸을 물리자 맞붙었던 온기가 멀어졌다.

 재희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주 잡은 손가락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저……. 일이 다 끝나면 제게 대가를 준다고 하셨었죠?”

“…….”

 짤각거리던 작은 소음이 멎었다. 귀로만 그녀 말을 들으며 약통을 살피던 그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발언이 새삼스러웠는지 단단히 굳은 눈동자가 파헤칠 듯 그녀를 응시했다.

 재희는 그를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럽고, 불안하고, 속이 달았다. 발끝마저 바짝 움츠러든 게 보였다.

“강주 씨는 원하는 걸 다 얻으셨잖아요. 저도 그렇고요. 이제 대가 얘기를 나눠 봐야 할 시간 같아요. 저는요. 이제 저는…….”

 재희는 차마 고백을 꺼내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미 말문을 튼 이상 아주 짧은 문장 하나만 더 건네면 되는 거였다.

‘전 강주 씨의 마음을 갖고 싶어요.’

 하지만 그 간단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기만 했다.

 고백 후에 밀쳐지면 정말로 끝임을 알기에. 고백 뒤에 따라올 그의 반응이 두려웠다.

 재희의 주저를 향해 강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원하는 걸 서로 가졌으니 이제 끝내자……?”

 어조에 옅은 비웃음마저 섞여 있었다. 재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프게 일그러진 그의 눈매가 보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게 아니라, 하며 고개를 저으려 했는데 무섭도록 날카롭게 저며진 그의 눈빛이 생경해 몸이 굳었다. 분명 그의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호의적인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나와 얽히기 싫었다면 애초에 발도 들이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가 약통을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섰다. 짤깍. 그의 손아귀 힘에 약통이 흔들렸는지 알약 흔들리는 작은 소음이 올라왔다. 강주의 표정이 더욱 서늘히 굳었다.

“그래요, 원하는 게 뭐예요?”

“네?”

“뭘 줘야 재희 씨가 만족하며 계속 있겠느냐고. 말해 봐요. 다 해 줄 테니까.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을게. 지금 당장 엎드려 빌면 되겠어요?”

 그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읊조렸다. 노기를 억지로 누그러뜨리는 것 같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재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왜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는 걸까. 그는 도대체 무엇에 화가 나서. 왜 저렇게 아픈 눈을 해서는.

“갑자기 그게 무슨…….”

 성난 얼굴에 놀라 재희는 준비했던 고백조차 잊었다. 황망한 눈동자로 숨만 들이켤 뿐이다.

 강주가 툭, 피임약 뚜껑을 열었다. 와르르, 알약 쏟아지는 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재희는 대리석 바닥을 나뒹구는 알약을 눈동자로만 좇았다.

“이것 때문에.”

 강주가 텅 빈 약통을 집어 던졌다. 텅그렁거리며 떨어진 약통이 데굴데굴 굴러가다 멈추자 이를 갈며 다시 말을 잇는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혼잣말 같은 읊조림이었다. 안에서 불길처럼 솟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는지 목소리마저 꽉 눌려 있었다. 강주는 피임약을 쥐었던 손을, 마치 더러운 것을 떨치듯 여러 번 털었다.

“알아보니 매일 같은 시간에 먹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하던데.”

 그의 목소리에 재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 다가와 제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서늘했던 눈동자는 간데없이 다정함과 부드러움이 남은. 그러나 서릿발 같은 안광만은 새파랗게 튀는.

“한번 시험해 볼까요. 먹을 시간도 없이 계속하면, 어떻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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