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영현이 농담처럼 뒤를 받쳤다.
“제 아들이 모처럼 효도를 하겠다는데, 방해하시면 제 심기가 몹시 불편해요, 여러분.”
가벼운 농담에도 웃음소리 하나 없었다. 강주와 영현만이 흐릿한 미소를 올렸을 뿐이다. 강주가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책상을 짚고 섰다.
“범죄자는 벌을 받아 감옥에 가야지, 어찌 회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아비를 ‘범죄자’라 일컫는 발언에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강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쐐기를 박았다.
“구정물이 더럽다고 피하면 썩어 버리죠. 다 퍼낸 후 새 물을 채워야 합니다. 아마, 폭풍이 지나고 나면 맑은 물이 차 있을 겁니다.”
“…….”
“그럼 여러분의 선택을 믿겠습니다.”
사족 하나 없이 깔끔하게 강주의 말이 끝났다.
이사진은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슬쩍슬쩍 오가는 눈빛에 그들의 심중이 대충 드러났다. 이미 판세는 한쪽을 향해 명확히 기울어진 뒤였다.
***
차 회장의 입원이 한 달이 넘어간다. 차 회장은 이따금 기자가 찾아오면 앓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가 혼자가 되면 영현과 강주의 이름을 짓씹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개 같은 새끼들……!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병상에 있는 사이 모든 일이 해결되면 좋으련만. 모든 것이 제게 불리한 쪽으로만 굴러가고 있었다. 제 명망이, 권력이, 지위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굴지의 대기업 회장으로 승승장구하다가 가진 건 돈뿐인 잔챙이로 전락하게 된 셈이다. 더없이 견디기 힘든 잔혹한 현실이었다.
시은은 권 실장의 차를 타고 차 회장에게 향했다. 집안에 몰아친 파랑으로 인해 그녀 얼굴 위에도 수심이 한가득이었다.
그녀는 강주와 달리 차 회장과 피를 나눈 친딸이었다. 친어미, 친애비의 진흙탕 싸움이었기에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핸들을 옆으로 돌리며 권 실장이 말했다.
“저 원망하는 거 압니다.”
시은의 시선이 그를 향해 돌아갔다. 우직한 그의 옆 선이 보였다.
최근, 권 실장은 시은에게 모든 진실을 고백했었다. 자신이 CCTV를 직접 영현에게 건넨 것. 그 영상을 웹상에 업로드한 것. 사랑하는 연인의 아버지를 제 손으로 옭아맨 사실을 모조리.
시은이 고개 돌려 앞을 응시하며 담담히 답했다.
“맞아요, 원망해요.”
“…….”
권 실장의 눈빛이 한 번 가라앉았다.
“하지만 언젠간 밝혀질 일이었어요. 늘 마음속에 병을 품고 지냈었거든요. 말하자면 잠복기였던 거죠.”
시은은 잠시 말을 쉬었다가, 차창 밖으로 가로수가 여섯 그루 정도 지나가자 다시 말을 이었다.
“기석 씨는 그저 기폭제일 뿐이에요. 솔직히 원망스럽긴 한데……. 밉지는 않아요. 오히려 잘됐어요. 후련하기까지 해요, 이젠.”
“…시은 씨.”
“제겐 어릴 때부터 죄책감이 있었거든요. 그게 뭔지 기석 씨에게는 말 못 하지만……. 방관도 죄인데 늘 방관하기만 했어요. 우리 아빠 죄, 제가 그냥 외면하고 눈감았던 거예요. 용기가 안 났거든.”
차 회장이 자행했던 강주의 감금을 말하는 것이었다. 기석은 분명 무슨 뜻인지 모를 터이지만 고백처럼 말을 흘려보냈다. 케케묵은 죄악감을 고해성사하는 신도라도 된 기분이었다.
홀로 곪아 가는 강주를 외면한 채 자신은 호의호식했다. 진실을 알았으나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게도, 엄마에게도 열지 않고 홀로 품고만 있었다. 그를 학대했던 이가 제 아비였기에, 차마 밝힐 수 없던 진실이었다.
아버지인 차 회장을 향한 돌팔매질은 차 회장 스스로가 던진 것이었다. 본인의 죗값을 치르는 과정이었고 그렇기에 피 흘려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에게 던져진 많은 돌 중에 기석이 던진 돌이 섞여 있을 뿐이다.
“전 용기가 안 났어요, 기석 씨.”
“…….”
“대신 용기 내 주어 고마워요.”
시은은 속삭이듯 말했다. 눈동자가 가물가물 젖어 갔다.
시은은 널따란 병실에 들어섰다. 커다란 특실은 병원 특유의 소독약 내음 대신, 꽃 내음으로 흠뻑 잠겨 있었다.
“아빠, 저 왔어요.”
전혀 아픈 이 같지 않은 아비를 향해 시은은 가볍게 인사했다. 차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더욱 편히 눕혀 티브이에 시선을 박았다. 갈색 머리 사내가 푸른 바다를 향해 풍덩 뛰어드는 장면이 지나갔다.
“너는 아비가 아픈데 뭐가 그리 바빠 이제야 찾아오냐.”
시은을 쳐다도 보지 않고 차 회장이 물었다. 언론에 비친 것처럼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놀랍도록 생생한 얼굴과 분노로 타오르는 눈을 가진 중년 사내가 있을 뿐이다.
“…죄송해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은이 자리에 앉았다.
차 회장은 이불을 박차고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제야 티브이를 끄고는 눈앞의 딸을 향해 이를 갈듯 말을 건넨다.
“유영현, 네 엄마.”
영현의 이름이 짓씹듯 나왔다. 시은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차 회장은, 입 밖으로 그녀의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아가 치민다는 듯 뺨을 실룩거렸다.
“네 엄마는 부부의 연을 배신했다. 제 남편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냐는 말이다.”
“…….”
“남편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찾아오지도 않고. 뉴스에서 보니 아주 얼굴이 쌩쌩하더구나.”
시은은 분노를 표출하는 제 아비를 멀거니 바라만 봤다. 그의 말대로 엄마는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아 보였다. 낮에는 괜찮은 듯 바삐 지냈지만, 이따금 밤에는 홀로 잔에 양주를 따랐다. 열띠게 차오르는 분노를 삭여 내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를 악물기도 했다.
둘은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중 피해자는 제 아빠가 아닌 엄마라고, 시은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입 속에서만 어물거렸다.
“시은아, 아빠는 상황이 퍽 난처하게 됐다. 너라도 이 불쌍한 아비의 상황을 이해해 주어, 네 엄마에게 말을 잘해 줘야 해. 이 상황에서는 아빠가 피해자인 거야. 아빠 편을 들어야 하는 거야. 그게 맞다.”
“…아빠.”
“네 엄만 늘 밖으로만 돌던 사람이야. 시은이 곁에서 늘 챙겨 줬던 게 아빠라는 거, 알고 있지?”
시은은 고개를 내저으며 바닥을 응시했다. 상아색 대리석 바닥이 매끈했다. 늘 평탄하게만 살아온 아빠의 인생처럼.
그는 늘 부인에게 무시당한다며 분노했고 기저에 깔린 열등감에 치욕스러워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평탄했다. 너무나 평탄해서, 자그마한 상처라도 생기면 그것이 아파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오빠는 아닌데.’
오빠의 상처는 너무도 깊고 많아, 자그마한 생채기 따위는 그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빠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아빠였다.
아빠는 어린 시절 오빠를 학대한 사람이었고, 이런 일에도 엄마를 원망하는 어리석은 이였다.
시은은 제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였기에 끝내 외면하며 돌아설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못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아빠. 저 아빠 사랑해요.”
“알지, 네 마음 내가 제일 잘 알지.”
대리석 바닥에서 시선을 올린 시은이 차 회장을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거랑 이건 달라요. 죄를 저지르셨으면, 값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뭐?”
차 회장의 표정이 순간 딱딱해졌다.
제 딸이 하는 말이 무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가, 찰나의 틈이 지나자 간파했다. 그의 낯 위로 배신감이 스멀스멀 덮였다. 시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 꽉 다문 입매가 아래로 강하게 떨어져 있다.
시은은 차마 제 아비의 원망을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눈길을 내렸다.
“엄마 먼저 배신한 건 아빠잖아요. 다른 사람 만났잖아요.”
“네 엄마도 그랬을 거야!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아……. 미령 아주머니께도 나쁜 짓 했잖아요.”
“그건…….”
당황한 차 회장이 그 말에는 차마 사족조차 달지 못했다. 시은은 연거푸 한숨을 뱉으며 미간에 슬픈 주름을 지었다.
“그리고 아빠, 제 오빠 괴롭혔잖아요.”
“…….”
차 회장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는 숨만 씨근덕거렸다. 그를 향해 시은은 침착하게 속마음을 풀어놓았다. 그간 꽉꽉 밟아 숨기고 보이지 않게 감추어 놓았던 오랜 진심을.
“오빠 가두고, 학대했잖아요. 아빠가 그렇게 행동해서, 난 아직 죄책감에 힘들어요. 방관했던 내가 미워서. 스스로 너무 미워서.”
“…….”
“아빠 나쁜 사람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아주 나쁜 사람. …그래서 이번만큼은 아빠 편을 들 수가 없어요. 반성하시고 죗값 받으세요.”
“너, 너……!”
차 회장이 들고 있던 베개를 들어 시은에게 던졌다. 그녀의 오른쪽 뺨을 스치고 간 베개가 뒤로 털썩 떨어졌다. 시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가! 당장 나가!”
차 회장의 얼굴에는 손톱만큼의 반성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제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자라면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 저 갈게요.”
시은은 차 회장에게 고개 인사를 전한 후 등을 돌렸다. 쉭쉭 내쉬는 거친 호흡이 들렸다.
“다 필요 없어! 저딴 것도 딸이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시은은 조각난 유리 조각 위를 걷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아픔이 욱신욱신 절 찔렀다. 그래도 아비다. 오빠는 학대했을지언정 자신에게는 오롯한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말이었고 취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아픈 와중에, 마음이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편했다.
***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재희 씨도 좋은 아침.”
많은 일이 터졌어도 회사는 알아서 잘 굴러갔다. 차 회장이 병상에서 두문불출해도, 사내 개미들은 오늘도 열심히 발발거리며 움직였다.
재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게 쏟아지던 시선들도 시간이 지나니 멎었다. 신경 쓰지 않으며 평소같이 지내니 다들 일상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재희는 출근하자마자 습관적으로 메일함부터 열었다. 미확인 메일이 몇 개 떠 있었다. 클릭해 열어 보는 대신 커피 먼저 타 왔다.
의자에 앉아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차근차근 내용을 확인하는데.
“…어?”
하마터면 컵을 엎을 뻔했다. 재희는 출렁이는 잔을 바로 세우고는 눈을 크게 떴다. 미끄러지는 손을 올려 마우스를 다시 잡고는 다시 커서를 움직인다.
[사내 이사 차병준 회장의 직위 변경(해임) 공고]
인사부에서 정식적으로 발송한 공지 메일이었다. 상황이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었지만 사실 내용은 간단했다. 차병준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 좋게 말해 일선 퇴진이지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것과 다름없었다.
차 회장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말을 들어 예상하기는 했으나……. 막상 공고문을 보게 되자 기분이 사뭇 새로웠다.
재희는 커피를 몇 모금 마시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가 목 뒤로 넘어가지 않아 개수대에 쏟아 버리고 물을 받아 올 생각이었다.
탕비실 안에서 자그마한 수다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희는 바로 들어가려다가 그들에게서 강주 이름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그럼 차기 회장은 누구래?”
“듣기로는 차 회장님 처남, 그러니까……. 상무님 외삼촌인 본부장님이 임시로 맡는다고 하던데?”
“왜 차 상무님이 안 하시고?”
“아직 너무 젊잖아. 보는 눈도 있고 하니……. 우선은 잠자코 계신 거지, 뭐.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알걸? 실세가 누군지. 차병준 회장님 쪽이었던 이사진은 대부분 물러나고 나머지는 다 그쪽으로 돌아섰대.”
“그럼 이제 상무님 세상이네.”
재희는 그대로 등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불안함이 쿵쾅쿵쾅 가슴을 두드렸다. 본의 아니게 엿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가 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무서워졌다. 현재, 강주가 원하는 건 모두 차근차근 다 이루어졌다. 차 회장의 몰락은 이제 기정사실이었으며 그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 역시 어렵지 않게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차가운 벽에 등을 대고 서서는 찬찬히 커피를 마셨다. 미적지근하게 식어 그런지 혀끝에 닿는 단내가 유독 텁텁하게 느껴졌다.
탕비실 앞에서 소화시킬 수 없는 말을 훔쳐 들어 그런 걸까, 커피와 함께 삼킨 문장들이 무겁게 얹히는 기분이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재희는 침대 위에 앉아 멍하니 야경을 바라봤다. 손을 내려 이불을 더듬자 빳빳한 천이 매만져졌다. 퍼석퍼석 소리가 날 만큼 잘 다려져 있었다.
이불보도 다림질해 씌운다는 걸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예전에 살던 반지하 방은 집이 꿉꿉해 그런지 이불을 덮을 때마다 이유 모를 습기가 느껴졌었는데. 다림질은 상상조차 못 했었지.
손에 닿는 천은 온기 없이 차가웠다. 강주가 없었기에 제 옆자리는 언젠가부터 계속 빈 상태였다.
최근 강주는 몹시 바빠 회사에서 산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대부분은 아주 늦은 시간에 퇴근했고, 귀가하지 못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차병준 스캔들 때문이었다. 차 회장이 선강 그룹 오너였던 이상, 주식이 요동치고 회사가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정상화될 테지만 당장은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오늘도 안 오나…….”
언제부터 그와 매일 잤다고. 습관이 되어 버린 그의 품이 그리워, 재희는 몸을 둥글게 말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이불 안이 체온으로 훈훈해졌지만 어쩐지 발끝이 차가웠다.
***
주말 아침은 쾌청했다. 태양이 높다랗게 떠서야 재희는 겨우 눈을 떴다. 최근 심경이 복잡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오래간만에 늦잠을 잤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멍하니 걸음을 옮겨 주방 찬장에서 피임약을 꺼냈다. 달칵달칵 뚜껑을 열어 자그마한 알약을 손에 쥐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뜨며 물을 마시려는데 저 멀리 강주가 보였다.
“엄마야!”
집주인의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 어깨를 들썩이자 물 잔 속 물이 출렁였다. 재희는 놀란 눈을 끔뻑이며 알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물을 마셔 그것을 넘기고는 그를 향해 말을 건다.
“언제 왔어요?”
자신이 자는 사이 들어왔다가 이제 막 씻고 나온 듯했다. 아직 물기에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 아래 보이는 눈매엔 피곤이 미약하게 감겨 있었다.
“아침에 오셨나 봐요. 요새 계속 철야신 것 같던데.”
강주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약통.
“…….”
그의 시선이 다시 아주 천천히 위로 올라와 재희에게 박혔다. 강주가 그녀의 표정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