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96)

 #79

 꽉 막혔던 재희의 목이 그제야 트였다. 재희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아뇨, 저야말로 실장님을 이용할 수 없어요. 처음 CCTV를 달라며 이 일에 실장님 끌어들인 건 저예요. 그러니 책임도 제가 집니다. 권 실장님 이용하고 입 싹 닦으라니, 전 그렇게 못 합니다.”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히 대꾸했으나 권 실장의 답은 더욱 단호했다.

“이미 유 관장님은 그리 알고 계십니다. 번복해 봤자 제 신용만 떨어질 뿐이에요. 절 위해서라도 그냥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시면 되는 겁니다.”

“…….”

 재희는 쉽게 답을 잇지 못했다. 권 실장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쪽을 향해 그녀를 안내하며 입을 싹 다문다.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하다는 얼굴이었다. 재희는 고마움으로 뒤범벅된 감정을 안고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세요.”

“네. 고마워요, 실장님.”

 재희는 크게 심호흡한 후 관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차를 마시는 영현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유 관장은 잔에서 올라오는 김 사이로 재희를 바라만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폭 큰 걸음으로 다가와 소파에 앉은 후 재희에게 손짓한다.

 재희는 눈치껏 자리에 따라 앉았다. 절 빤히 들여다보는 유 관장이 새삼 강주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가에 비스듬히 앉은 모습이라든가, 보폭이 큰 당당한 걸음걸이라든가, 사람을 헤집을 듯 응시하는 고요한 눈매가 강주를 떠오르게 한다.

 유 관장이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CCTV 봤나요?”

 질문을 애꿎게 돌리지 않고 직구로 꽂는 성격마저 강주와 지독히 닮아 있었다.

“봤습니다.”

“그거 강미령 씨 맞죠?”

“네, 제 어머니 맞습니다.”

 재희는 마치 타인의 일을 말하듯 담담히 대꾸했다. 하지만 엄마의 이름이 올라온 순간 살짝 떨리는 눈동자는 숨길 수 없었다.

 영현의 눈동자 속에 재희를 향한 찰나의 안쓰러움이 스쳤지만 이내 지워졌다. 대신 이어 올라온 건 확고한 신념이었다. 영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희를 향해 명령하듯 말을 던졌다.

“차 회장, 최대한 빨리 신고해요.”

“네?”

 재희가 침착함을 깨고 톤을 높여 반문했다. 유 관장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놨다.

“내 남편이 저지른 일, 사건 재수사 들어가라고 최대한 빨리 신고하라는 소리예요. 화력 꺼지기 전에 이어 터트려야 하니까.”

 재희 역시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차 회장의 부인 입에서 나오자 사뭇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지어 자신은 그들의 아들과 결혼하겠다고 들이밀고 들어온 사람이지 않은가.

 영현이 당당히 말을 이었다.

“결혼 일은 우선 뒤로 미뤄 놔요. 재희 씨가 시아버지 될 사람을 고발한다… 뭐 이런 무거운 감정 가질 필요 없다는 얘기예요. 어차피 나와 이혼하면 남이 될 사람이니까.”

“…….”

“아,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오해하면 곤란해요. 재희 씨와 강주의 결혼을 전제한 소리가 아니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니까. 난 아직 두 사람 결혼 반대예요. 이런 식으로 어지럽게 얽힌 상황이라 더욱. 내 집에서, 내 남편이었던 남자와 좋지 않게 얽힌 여자의 딸을 며느리로 마주하는 거 꽤 곤혹스럽거든.”

 예민한 문제를 다루느라 머리가 아픈지 영현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네,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차 회장님을 신고하려 했습니다. 제 엄마 일이니까요.”

 재희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침착하게 가장하던 표정도 살짝 일그러진다. 재희를 응시하는 영현의 눈가도 살짝 좁아졌다가 이내 다시 평소로 돌아왔다.

 영현은 한숨 뒤 다소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뒤는 확실히 내가 책임질 테니 회장 겁내지 말고 잘 덤벼 봐요.”

“네. 저 겁나지 않아요, 관장님.”

 강단 있는 재희의 목소리에 중심이 빳빳이 잡혀 있었다. 영현은 심중이 복잡한지 재희를 비껴 소파 너머를 바라보며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하아……. 어쨌든 잘됐어요. 안 그래도 내가 페이퍼 컴퍼니 건으로 차 회장 엎어뜨리려고 했거든. 이혼 소송 걸면서, 동시에 미령 씨 사건까지 걸리면 차 회장은 그야말로 궁지에 몰리는 거니까.”

“…….”

“내가 오물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한이 있어도, 차 회장 그놈은 어떻게든 무너뜨려야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잘해 보죠. 내 아들의 여자 친구이고 뭐고 그런 간판 다 떼고 사람 대 사람으로.”

“네, 관장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습게도, 재희는 옅은 웃음마저 치밀었다. 차 회장을 어떻게든 무너뜨리겠다는 영현의 얼굴 뒤로 강주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역시 저렇게 무감정한 얼굴로 짓씹듯 차 회장의 이름을 올렸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딱 맞는다. 영현이 현실에 눈 돌려 강주를 외면했어도, 그를 지독한 외로움에 떨어뜨려 놓았어도 어미는 어미였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어느 정도 마지막을 향해 있었다. 둘 사이에 필요한 말은 모두 꺼냈고 모두 쏟아 냈다.

 영현은 마지막 인사를 뒤로 미루며 재희를 빤히 응시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묘한 시선으로 재희를 훑는다. 재희는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 냈다. 이윽고 영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우선 이 일 다 해결된 후에. 그 후에 결혼 얘기는 다시 말해 보는 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좋아요, 가 봐요.”

 비로소 마지막 퇴장 명이 울렸다. 재희는 무미건조한 영현의 목소리를 향해 예의 있게 허리를 숙이고는 등 돌아 나갔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침착하게 문을 벗어난 후, 차가운 문 바깥에 기대어 무너지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이제 정말 차 회장의 처단에 한 발짝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주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차 회장을 파헤치지 못했을 테고, 영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사건이 급물살을 타고 순항하지는 못했을 거다.

 말하자면, 똑 닮은 두 모자가 제 구원자였다.

 재희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빳빳이 허리를 세우고 밖을 향해 걸어 나간다. 절 기다리고 있는 권 실장을 향해 그녀는 담대히 웃었다.

“말씀 잘 나누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권 실장님.”

 이제는 차 회장이 받을 차례였다. 그간 자신이 저질렀던 죗값을 모조리.

 20장. 누군가에겐 끝일, 누군가에겐 시작

“감사해요, 이모. 이렇게 도와주시고…….”

“도와주다니, 얘는? 당연히 할 일 하는 거지. 차병준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아휴…….”

 은진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화가 치미는지 눈썹을 바짝 구겼다. 미령과 차 회장의 CCTV를 보자마자 은진은 재희에게 곧바로 연락했다. 사건의 정황을 대번 알아차린 것이다. 차 회장의 가정부가 미령이었던 것과, 차 회장과 미령의 과거를 알고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르냐며 은진은 핏대를 세웠다. 그런 불한당 같은 인간은 처벌받아야 한다며 창고를 온종일 뒤졌다. 그리고 차 회장과 관련된 자료를 몽땅 들고 재희에게 건네는 중이었다.

“예전 자료라 제대로 된 증거로 채택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건 설명하는 데 참조는 될 거야. 도움 됐으면 좋겠다, 재희야.”

“도움 될 거예요, 정말 큰 도움 될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자료를 꽉 붙들고 고마움을 전하는 재희에게, 은진은 두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꼭 이겨, 알았지?”

“네, 꼭 그럴게요.”

 재희는 은진이 넘겨준 편지와 사진을 손으로 훑었다. 은진에게 제 엄마가 보낸 편지들과 보육원에서 찍은 단체 사진들이었다.

 어쩌지? 차병준 씨가 자꾸 찾아와서 곤란해, 저번에는 밤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끌어안기까지 했어. 그런 문장이 적힌 편지가 있었고, 차 회장과 미령이 함께 찍힌 단체 사진도 있었다.

 재희는 가만히 편지를 더듬었다. 누렇게 낡은 종이 표면은 차가웠지만, 엄마의 글씨가 있어 그런지 괜히 손끝이 뜨거워졌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모…….”

 재희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중얼거렸다. 은진은 도리어 자신이 먼저 울었다. 화장이 지워질세라 콤팩트를 들어 눈가를 보고 화장지를 꾹꾹 누르며 울먹울먹 말한다.

“얼마나 힘들었니……. 힘내고.”

“네, 힘낼게요.”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럴 생각이었다. 힘내어 완벽하게 차 회장을 고꾸라트릴 것이었다.

 ***

『서울북부지검 형사 6부 부장검사 이한영은, 거액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선강 그룹의 차병준 회장에게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받을 것을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차병준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출석 연기 신청서를 제출한 후 강남 XX병원 특실에 입원…….』

 재희는 소파 위에 단정히 앉아 아침 뉴스를 경청했다.

 최근 차병준 회장은, 부인인 유영현 사외 이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고발을 당했다. 차병준 회장이 페이퍼 컴퍼니를 꾸며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을 저질렀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세간의 관심은 대단했다. 모두의 이목이 모인 화제의 중심에 차 회장이란 이름이 있었다.

 그의 난잡한 사생활이 폭로된 데다, 횡령 및 배임 비리 의혹까지 대두됐으니 가히 국민적인 스캔들이라 불릴 만했다. 더욱이 그의 비리를 부인인 유영현이 직접 제기했기에 더욱 조명이 집중됐다.

‘정황상 이혼할 거로 보이지?’

‘응, 정의로운 처단이네. 현실 사이다다.’

 혹자는 대단하다고 웃었으며,

‘근데 그 유영현이란 여자도 좀 무섭지 않아? 그래 봤자 자기 회사인데.’

‘그러니까, 좀 어리석지. 지금 선강 그룹 회장이 차병준인데 고발해 봤자 발등 찍는 거지.’

 혹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사태를 관망했다.

 실례로 선강과 관련된 모든 주식 그래프가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물론 영현을 위시한 인사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차피 거쳐야 할 관문이다. 털어 낼 게 있으면 털어 내고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깟 추문에 휩쓸려 휘청일 회사라면 이전에 망해도 벌써 망했다며.

『동시에 차병준 회장은 강 모 씨에게 과실치상 혐의로 고소를 당한 상태로… 서울 강남경찰서는 재수사에 착수하여 현재 조사 중이라 밝혔으며 자세한 사항은 차후 공식적으로 발표… 차병준 회장의 차후 거취가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어…….』

 아나운서의 정갈한 목소리 중간중간 자료 화면이 떴다. 차 회장이 링거를 꽂고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우습네.”

 재희는 혼잣말처럼 그를 비웃었다.

 차 회장의 실신은 거짓이 아니었다. 영현에게 뒤통수를 맞고, 재희 모친의 일로 고소를 당하자 그 충격을 참을 수 없었던지, 목덜미를 잡은 채 실신한 것이다. 분노로 인해 이성이 끊겼다는 표현이 알맞았다.

 재희는 티브이를 끈 후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시작이야.’

 엄마를 대신하여 차병준 회장을 고소했다. CCTV 외엔 목격자도, 증거도 없어 불안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희망을 가지기로 했다. 워낙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라 우리 쪽에 유리하다며 변호사가 자신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단죄는 이제부터야.’

 길고 긴 싸움이 될 것이다. 아마 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입을 차 회장의 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재희는 그의 미래가 기대됐다.

 부디. 처절하게 무너지기를.

 내 엄마를 아프게 하고, 강주 씨를 아프게 한 당신이 부디……. 부디.

 ***

 회장 한쪽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빛이 들지 않는 숲에 고인 안개처럼 공기가 척척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른쪽에 앉은 이사진들의 낯이 모두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특히 차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이들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입매에서 그들의 참담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회장 중앙과 그 왼쪽에 자리 잡은 이들의 낯은 사뭇 달랐다. 평소와 같이 단정했으며 두 손을 정갈히 모으고 어깨를 쭉 폈다.

 선강 그룹 본사 최상층 회의실. 유영현 사외 이사를 비롯한 인사를 중심으로, 차병준 회장의 자격 박탈을 논의하는 위원회가 열렸다.

 법률사무소 출신 사외 이사 김 변호사가 할 말이 있는 듯 마이크를 두드렸다. 그는 차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사외 이사단에서 차 회장의 뒤를 든든히 받쳐 주던 사람이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지 않습니까. 판결도 아직인데 회장직 박탈 논의라니요. 벌써 주식이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차 회장님의 회장직 박탈 소식이 알려지면 더욱 사태가 참담해질 겁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차 회장이 범죄자가 되면 흔들리다 못해 아예 무너질 겁니다. 그 사태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딱 잘라 답하는 영현의 답에, 김 변호사는 큼큼 목을 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발버둥 식의 항의를 내보이기는 했으나 씨알도 안 먹힐 말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의 유려한 혓바닥도 지독하게 분명한 현실 앞에서는 단단히 굳는 모양이었다.

 영현 곁에 있던 강주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장내에 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울린다.

 최근 차 회장 뒤에 조용히 숨어 있던 두 사람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차 회장의 부인인 유영현, 그리고 그의 아들인 차강주. 물밑에서 조용히 발질만 하다가 파도치는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영현의 곁에는 늘 강주가 앉았는데 그 자리가 주는 의미는 명확했다. 영현 그녀가 차병준을 회장으로 세웠듯 제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여 다음 실세로 선포한다는 뜻이었다. 대놓고 드러나는 권력의 승계였다.

 물론 회장직을 맡기엔 아직 젊은 나이다. 때문에 잠시 뒤에 물러서 있을 수는 있으나, 이제 선강의 다음 진짜 실세가 누구인지는 극명하게 알 수 있었다.

 강주의 행동 하나, 눈길 하나, 손짓 하나에 모두가 주목했다.

 고요한 시선으로 회장을 찬찬히 둘러본 강주가 뒤늦게 손짓을 보냈다. 화면 위로 차병준 회장의 기사가 떴다. 첨부 사진 속 차 회장은, 마스크를 쓴 채 파리한 얼굴로 병실에 누워 있었다.

 강주의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아버지께서 몸이 몹시 불편하신가 봅니다. 편히 쉬셔야 아들인 제 마음이 놓일 것 같군요.”

 장내는 더욱 고요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