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정신없는 한 주였다. 실시간 검색어에서 ‘선강’이라는 단어가 붙박이로 내내 달려 있었다.
차 회장이 대학교에 갓 들어간 새내기 여학생에게 마수를 뻗은 것. 그리고 뒤이어 그 대학생이 꽃뱀이었다는 기사. 대다수는 코웃음을 쳤고 일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그 여자가 꽃뱀인 거 아니야?
차 회장이 원하는 게 바로 그 반응이었다. 사람의 의심을 파고들어 여지를 만드는 것.
그러던 중 다른 기사가 이어 터졌다. 이번에는 조금 결이 다른 기사로, 선강 그룹 전략 기획 조정실 상무 차강주에 대한 사적이고도 깊숙한 가십이었다. 그가 차 회장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기사.
각기 다른 기사가 연이어 터지자 사람이 둘 이상 모인 장소는 여지없이 그와 관련된 화제로 들썩거렸다.
‘뭐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럼 차병준은 아들이 자기 아들 아닌 거 알고 배신감 느껴서 외도한 거야, 뭐야?’
‘아니래, 친아들 아닌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대. 차병준 부인이 원래 로열패밀리잖아. 차병준은 데릴사위였고. 다 알고 들어온 거지, 뭐.’
‘하기야 여기저기 지분 다 끌어모아 봤자 그 부인이랑 아들 거에 못 미친다고 하더라.’
‘근데 그거 누가 터뜨린 거지? 차병준이 흘린 건가? 보니까 이혼 얘기까지 나오던데 그 전에 여론 형성하려고?’
차 회장이 원하는 건 단순했다. 제 외도의 이유를 집안 사정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혼외 자식이라는 강주의 존재로 제 외도를 정당화하여 우위를 점하는 것. 세간의 이목을 ‘키다리 아저씨’라는 치욕스러운 단어에 집중시키기보다는 ‘혼외 자식 차강주’ 쪽으로 돌리기를 원하며.
하지만 몹시 불행히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휩쓸리지 않았다.
다들 더욱 차 회장을 비웃었을 뿐이다.
차 회장 발등에 불붙어서 지금 발악 중인 거네, 라고. 아주 가볍게.
***
한편, 재희가 강주의 소식을 알게 된 건 늦은 밤이었다.
휴대 전화를 끈 채 효정과 호텔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택시 안에서 휴대 전화를 켠 후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
「재벌 사모님의 아찔한 과거. 대기업 후계자의 친부는 과연 누구?」
처음 그 기사를 본 순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숨을 멈췄고, 그 이후엔 손을 떨며 분노를 삼켰다. 이제야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악랄한 차 회장이 왜 강주를 그토록 괴롭혔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이제서야.
그래서, 그래서 강주 오빠가 늘. 그래서… 그 창고에……. 강주를 지독한 외로움의 구덩이에 빠뜨린 이유가. 그 악랄한 이유 때문에. 마음이 울렁거려 호흡이 힘들었다.
새하얀 달빛 아래, 그보다 더 하얀 강주의 얼굴을 남몰래 적셨던 눈물을 기억한다. 웅크리고 앉아 홀로 울던 몸의 떨림 역시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다 자신이 창고에 들어서면, 그제야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던 그 얼굴을. 그럼에도 속눈썹 끄트머리에 애처롭게 달려 있던 눈물방울을.
재희는 가느다란 호흡을 힘겹게 뱉었다. 이건 차 회장과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됐던 날 느꼈던 충격과는 사뭇 다른 종류였다. 마음이 미어지고, 아프고, 조였다.
재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기사를 다시 훑었다. 무어가 강주를 벼랑 끝으로 몰았었는지 찬찬히 읽고 또 읽는다. 기사 하단부에는 가벼운 댓글들이 즐비했다.
어쩐지 하나도 안 닮았더라, 재벌가가 콩가루구나, 역시 현실이 드라마보다 막장이다.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이 쉽게 달궈지고 튀겨졌다. 남들이 쉽게 떠들어 대는 화제의 중심에 강주가 있었다.
재희는 휴대 전화를 아예 주머니 속에 푹 밀어 넣었다. 차창 밖을 스치는 도시가 유달리 차갑다.
이 차가운 도시 안. 차가운 건물 안에서 강주 씨는 오늘도 홀로 있겠지. 강주 씨는 이 기사를 보았을까. 보았다면 지금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모습으로.
“…하아.”
초조함으로 마음이 일렁였다. 강주를 만나고 싶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를 강주를, 지금 당장. 서울 시내를 가르는 택시의 속도가 오늘따라 굼벵이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온 재희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강주가 보였다. 침대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인기척이 들리자 찬찬히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이, 평소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왔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역시 기사를 봤을 텐데. 절 중심에 두고 물고 뜯고 씹고 비웃는 사람들의 반응을 모조리 들여다보았을 텐데. 이런 날까지 홀로 침착한 강주가 새삼스러웠다.
강주를 저리 만든 이가 차 회장이라는 사실에 재희는 문득 분노가 치밀었다. 아이의 두려움을, 눈물을, 분노를 모두 자근자근 짓밟아 판판하게 다져 놓은 게 차 회장이었다. 모두 그놈의 짓.
괜찮아요? 물을 수도 없는 아픈 문장이 혀끝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뱉을 수 없었다. 그를 위로하려 드는 순간, 그는 동정받는 존재가 된다. 그는 동정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강주 오빠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
우두커니 서서 강주를 바라만 보는데 강주가 먼저 그녀를 불렀다.
“재희 씨.”
어서 와 안기라는 듯 한쪽 팔을 뻗은 채. 재희는 주춤주춤 걸어가 그의 품에 몸을 묻었다. 편안하고 따뜻했다.
등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닿았다. 정수리 위에 닿는 온기는 필시 그의 뺨일 거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늘 그렇듯 다정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고 안기어 체온을 나누었을 뿐.
한참이나 재희를 품고 있던 강주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나직이 웃었다.
“재희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는데… 나 괜찮아요. 내 가족만 알던 일을 세상 모두가 알게 된 것뿐이니까.”
재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확 터져 버릴 것 같아 강주의 가슴팍을 붙들고 그의 옷깃만 뚫어지라 째려봤다.
그것도 모르고. 난 그것도 모르고. 지난 그의 과거가 마음 아파, 재희는 그의 가슴팍에 기대 한참이나 울먹임을 참았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 동요하고 있다. 그 사실이 퍽 우습긴 했으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그의 손이 다시 재희의 등을 토닥였다.
참 이상한 일이지. 위로받아야 할 건 그인데, 내가 도리어 위로받는 기분이라니.
“저는요, 강주 씨가 본인만 생각하면 좋겠어요.”
재희는 그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차마 그의 눈을 마주할 수도 없었다.
“강주 씨는 늘 참아 내기만 했잖아요. 그거 유 관장님 위해서였죠?”
재희는 강주가 아프게 인내했던 이유를 이제야 꿰뚫어 보았다. 어째서 홀로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지. 강주의 성격상 제 어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자신이 아픈 쪽을 택했을 거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울먹이는 건 자신이었고, 절 위로하듯 끌어안은 건 오히려 그였으니. 그 사실이 마음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냥 울고불고 하소연하지 그랬어요. 나 아프다고, 힘들다고 눈물 콧물 쏟으며 엉엉 울지 그랬어요. 차 회장 나쁜 새끼라고, 나 학대했다고 떠들지, 왜. 혼자 참아서 뭐 해. 거기서 그렇게 혼자…….”
재희는 애써 참던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어린 시절, 강주의 아픈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재희 하나뿐이었다. 새까만 어둠에 묻혀 홀로 힘겨워하던 강주를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재희의 목소리에 결국 눈물이 담겼다.
“강주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가물거리는 속삭임이 눈물과 함께 흘렀다. 재희는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젖은 호흡을 뱉었다.
“재희 씨.”
머리 위에 강주의 나직한 목소리가 닿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으나 강주가 힘주어 끌어안았기에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의 부름이 조용히 이어졌다.
“재희 씨.”
“네.”
“재희야.”
“…네.”
“재희야.”
강주는 재희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애초에 그녀의 답을 듣기 위함은 아닌 것처럼, 홀로 가만히.
재희의 심장이 괜히 따끔거렸다. 그의 목소리 안에 뭔가 깊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그게 무언지는 도통 알 수 없었으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내내 뜨거운 가시가 절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날아가는 새를 억지로 붙든 것처럼 재희를 안고만 있던 강주가, 이윽고 천천히 그녀를 눕혔다. 재희는 푹신한 침대에 등을 댄 채 강주를 가만히 올려 보았다. 어스름히 그를 덮은 달빛이 오늘따라 처연하다. 깊게 침전된 눈동자가 달빛과 함께 그녀를 덮쳤다.
“강주 씨…….”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닿았다. 달이 기울 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재희는 그를 받아들이며 팔을 들어 단단한 등을 마주 안았다. 맞닿은 체온이 따뜻해 괜히 마음이 소리 없이 출렁였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숨결을 나누며 강주는 차근차근 그녀의 단추를 풀었다. 사락거리며 천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유달리 선명했다. 반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브래지어가 나타나자마자, 강주는 그것 역시 곧장 풀어냈다. 가쁘게 담겨 있던 살덩이가 출렁이며 흐트러졌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가리려는데 그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그녀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목덜미에서 가슴골로 타고 내려온 입술이 부풀어 오른 하얀 젖가슴을 그대로 물었다.
“아!”
재희는 입술을 짓쳐 물며 고개를 내렸다. 훤히 드러난 가슴 위,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다. 군데군데 야경 빛이 내려앉아 그가 젖꼭지를 빨아 당기며 움직일 때마다 빛 반사가 일었다.
재희는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두툼하고 따뜻한 혀가 젖꼭지를 느릿하게 핥으면 아랫배가 오목하게 들어갔고, 입술이 유륜을 덮으며 천천히 훑으면 어깨가 슬쩍 뒤틀렸다. 쾌감이 미열처럼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살갗에 닿는 공기는 서늘한데, 그의 입술은 놀랄 만큼 뜨거워 감각이 더욱 묘했다. 유두를 건드리던 혀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빳빳하게 일어선 젖꼭지 끄트머리를 쪽쪽 빨아 휘감고 이로 잘끈 씹었다. 마치 젖먹이 아이가 어미에게 매달리듯.
아이의 세상에 어미 젖가슴밖에 없듯, 어린 강주에게는 재희밖에 없었다. 재희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도 없었다. 그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두운 길을 헤매며 방황할 때마다, 길 끝에서 등불을 든 채 서 있던 여자애.
강주 오빠, 하고 웃으며 절 안아 주던 숨구멍.
절 살게 해 준 유일한 젖줄.
“재희야…….”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며 강주가 속삭이듯 이름을 불렀다. 재희는 안타깝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직이 신음을 흩트렸다. 아찔한 감각에 흐트러지다가 강주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등 위로 재희의 손길이 느껴지자 강주의 몸짓이 더욱 절박해졌다. 애원하듯 젖가슴을 베어 무는 모습이 마치 굶주린 아이 같았다. 나오지 않는 모유를 찾아 정신없이 젖무덤을 파헤치는 굶주린 아이. 애정에 굶주리고 사랑에 배곯는 안타까운 어린아이.
“아… 읏…….”
재희의 신음에 미약한 통증이 섞였다. 그가 아프도록 물고 빠는 통에 젖꼭지가 따끔따끔 얼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재희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그를 마주 안았다. 제 가슴팍에 탐욕스레 매달린 그를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위로는 이런 일밖에 없다는 듯 가슴을 내어 주며.